매일 새벽 5시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10시간을 일했다는 아버지와 얼굴 보기 힘든 어머니, 지나치게 엄격한 할머니 밑에서 아이들은 사랑보다 제재를 더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황실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겁니다.

씨시의 아이들 중 가장 불행한 운명을 맞은 것이 외아들 루돌프(1858~1889년)였지요. 차기 황제란 이유로 어린 나이에 견디기 힘든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가 일곱 살 적에 소피대공비가 임명한 선생이 군사교관이었습니다. 장군 곤트레코트 백작은 7살 난 루돌프를 신병(新兵)처럼 취급했습니다. 한겨울 눈 덮인 궁에서 행진을 시키고 담력을 키운다며 자는 루돌프 옆에서 권총을 쏘는가 하면 몸에 얼음물을 끼얹고 숲에 내버려두기도 했습니다. 루돌프는 안타깝게 어머니의 품을 그렸지만 씨시는 항상 부재중이었습니다.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집무실 책상 옆에 유리벽을 세워놨는데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는 이 유리벽의 의미는 아들에게까지 적용됐습니다.

씨시가 살던 아파트 인근의 광장. 오스트리아 비엔나에는 골목마다 작은 광장들이 작은 사연들을 품고 있다.

루돌프는 벨기에의 공주 스테파니와 결혼했지만 시작부터 불행했습니다. 브뤼셀의 황금왕국에서 자란 그녀를 맞은 것은 곰팡이 냄새와 볕이 들지 않는 락센부르크성의 별실이었습니다. 상황도 시어머니 씨시와 달랐지요. 씨시에겐 참을성 있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있었지만 루돌프는 스테파니의 불평을 지겨워했습니다. 첫딸을 낳으며 남편은 서서히 그녀에게서 멀어져갔습니다. ‘브라반트의 장미’ 스테파니의 화는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내는 남편한테 화를 냈습니다. 아버지 황제마저 “왜 가정에 충실하지 않으냐”고 질책했지요. 이런 과정에서 부부의 사이는 더 멀어졌습니다. 어머니는 여행만 다녔고…. 어머니 씨시는 아들의 약혼식에도 불참했지요.

꼭 이 대목에 양(洋)의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주책꾼이 등장하지요. 사촌 라리쉬 백작부인이었습니다. 그가 베체라 남작의 딸 마리를 루돌프에게 소개해줍니다. 사랑에 눈먼 루돌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넙니다.
교황에게 "처음의 정략결혼을 무효로 해주십시오"라고 편지를 보낸 겁니다. 놀란 교황은 당연히 아버지 황제에게 이 일을 전했습니다. 고지식한 황제는 아들에게 애인과의 결별을 강요하면서 공개적인 창피까지 줍니다.

루돌프의 애인 마리 베체라도 보통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녀는 궁정오페라가 있는 날이면 성장(盛裝)을 한 채 스테파니 황태자비가 앉은 좌석 맞은 편에서 도전적인 눈길을 보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1889년 독일대사관에서 열린 파티 때 스테파티 황태자비가 입장할 때 마리 베체라만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공주와 백작부인-남작부인들은 고개를 숙이는데 그녀만이 승리에 찬 미소로 황태자비를 응시했다지요. 마리 베차라의 어머니 베체라 남작부인이 황급히 이성을 상실한 딸의 무릎을 꿇졌지요. 이 내용을 전해들은 루돌프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만으로도 그 가문은 멸문(滅門)하는 걸 안 것입니다.

루돌프 황태자의 사랑 마리아 베체라. 그녀는 대담하게 행동했지만 끝내 황실의 높은 문턱에 좌절했다.

파티가 열린 다음 날 루돌프는 사냥소풍을 가면서 황태자비 대신 마리 베체라를 데려갑니다. 그 직전 루돌프는 아버지와 왜 교황에게 이혼을 간청하는 편지를 썼는지를 마지막 대화를 가진 뒤 유언장을 작성합니다. 루돌프는 빈에서 24㎞ 떨어진 황실 별장에서 친구들과 사슴고기와 와인으로 만찬을 한 뒤 방에 있던 마리의 왼쪽 관자놀이에 총을 쏩니다. 그리고 아침 6시 반, 하인에게 한 시간 뒤 아침식사를 호출해달라고 명하지요.

루돌프는 침실로 돌아가 자기 머리에 권총을 겨눕니다. 아침 7시 반 하인이 문을 두드렸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루돌프의 친구 호이오스 백작이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그들이 본 것은 불행한 두 연인의 주검이었지요. 루돌프의 죽음을 우리는 비련(悲戀)으로 단정하지만 거기엔 음모도 있었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려던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이 루돌프가 모반을 꾀했던 것처럼 만든 거지요. 루돌프는 함정에 빠졌던 겁니다.

비운의 황태자 루돌프. 그는 아버지의 완고함과 어머니의 방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고민하다 끝내 권총자살을 택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외아들의 자살로 고민에 빠집니다. 항간에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습니다. ‘황제가 사형시킨 헝가리 민족주의자의 어머니가 저주를 내렸다….’ 그럼에도 후계는 중요했습니다. 죽은 루돌프에 이어 황태자위에 앉은 이가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 대공(大公)이었습니다. 원래 황태자 자리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두 동생 중 가장 나이 많은 카를 루드비히 대공의 몫이어야 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보다 세 살 어렸던 그는 성실했지만 누구도 그를 황제의 후계자로 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에겐 프란츠-오토-카를 페르디난트 등 아들 셋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제외하면 황태자위에 가장 가까웠지요.

셋 중 제일 똑똑한 이는 장남 프란츠 페르디난트였습니다. 미남이었던 둘째 아들 오토는 항상 스캔들을 뿌리고 다녔고 막내 카를은 권력의지 대신 빈 황실극장의 극장장이 되겠다는 소박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상류층 여자 대신 소박한 헝가리 가문의 소피 폰 초테크와의 결혼 문제로 큰아버지인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갈등을 겪었지만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합니다. 그리곤 루돌프에 이어 황태자가 되지요. 신분이 낮은 아내를 끝까지 지켰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두 번째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합스부르크제국 전체의 헌법을 고치고 헝가리인 전체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등 혁신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운명의 1914년 6월28일 그는 아내와 사라예보 육군훈련을 참관 하러 갑니다. 그 이전에 몇번이나 암살 경고가 있었지만. 그날 황태자 일행이 기동훈련 참관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첫 번째 폭탄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황태자 부부는 무사했지만 뒤따르던 육군중령 에리히 폰 메리치가 다쳤습니다. 황태자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병원에 들렀다가 나오는 길에 대학생 암살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저격을 받습니다. 두발의 총탄이 울렸지요. 저격으로 황태자비는 즉사하고 황태자도 뒤이어 숨을 거둡니다. 비보를 전해 들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별로 애통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기의 명을 어기고 낮은 가문의 여자와 결혼한 조카에게 앙금이 남았던 거지요.

루돌프에 이어 황태자가 된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가족사진. 이들 부부가 암살되면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는 장면을 그린 삽화.

그로부터 정확히 한 달 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지난 11월11일이 1차 대전 종전일(終戰日)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이날을 우리 현충일, ‘리멤버런스 데이(Rememberance Day)’로 삼습니다. 1차 대전은 인류가 벌인 최악의 전쟁이었습니다. 900만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시작은 1914년 7월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러자 유럽의 각국이 전장에 뛰어듭니다.

러시아의 동원령→독일의 룩셈부르크-벨기에 침공→독일의 프랑스 파리 진격→영국의 대독(對獨) 선전포고가 서부전선에서 일어났습니다. 동부전선에선 러시아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침공→독일 침공이 전개됩니다. 그런가 하면 남쪽에선 그해 11월 오스만튀르크제국이 참전(參戰)하면서 싸움이 코카서스-메소포타미아-시나이반도로 확대되지요. 이탈리아-불가리아가 1915년, 루마니아왕국이 1916년, 미국은 1917년 참전합니다.

이 와중에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세상을 뜹니다. 후임은 카를 1세, 카를 루트비히대공의 차남 오토 프란츠(1865~1906)의 장남이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씨시 사이의 외아들이 자살했기에 방계로 넘어간 것입니다. 국가 멸망엔 악운(惡運)이 잇따르지요. 프란츠 요제프 1세 사망, 아들 루돌프 황태자 자살,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은 동시대적이었습니다.

왜 암살당한 페르디난트 대공 아들이 세 번째 황태자에서 제외됐을까요? 페르디난트 대공이 신분 낮은 여성과 결혼한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왕가에선 서얼 출신이 제위(帝位)를 이을 수 없지요. 카를은 1918년 11월16일, 제위에 오른 지 만 2년에서 닷새가 부족한 그날 마지막 황제로 퇴위합니다.

카를 1세는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유럽 각국과 협상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전쟁을 피해갈 수 있도록 하려 했지만 마지막 욕심, 즉 이탈리아에 한치의 영토를 내주려 하지 않는 바람에 그 노력은 물거품이 됩니다. 앞서 옥스포드레터<31>-알자스 로렌과 알퐁소 도테편에서 전했듯, 프랑스와 독일이 수백년을 다툰 알자스 로렌에 대해서도 카를 1세는 프랑스편을 들었습니다. 욱일승천하는 독일에서 그는 그로 인해 신망을 잃게 됐습니다.

오스트리아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1세. 그는 왕좌에 앉자마자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제국이 해체되는 설움을 겪는다.

‘마지막 황제’의 팔자(八字)는 어디나 같습니다. 중국 청나라의 황제 부의(溥儀)가 일제에 의해 괴뢰국가인 만주국 황제가 됐다가 중국이 공산당 수중에 떨어지자 정원사로 일생을 마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러시아의 황족(皇族)들은 혁명 후 모조리 사살당했지요. 1918년 11월16일 오스트리아의 정무에서 손을 뗀 카를1세는 1919년에 스위스로 망명했습니다. 그후 두 차례나 헝가리왕 복위를 2번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비운의 황제는 그는 포르투갈 마데이라로 망명한 뒤 그곳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아들 오토 폰 합스부르크(1912~2011년)는 아버지 덕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태자, 보헤미아의 황태자란 직함을 얻었으나 한번도 영화(榮華)를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오토대공(大公)이라 불렸고 유럽의 다른 왕가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대우를 해줬지만 그는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시민권과 유럽의회 의원, 국제범유럽연맹 명예회장직을 지녔을 뿐입니다. 구글을 검색하면 1차 대전 참전국이 20개국인데 이것은 영국제국에서 호주-캐나다-인도-뉴펀들랜드(캐나다)-뉴질랜드-남아공을 하나로 계산한 것입니다. 독일제국 역시 바덴대공국-바이에른왕국-프로이센-작센왕국-뷔르템베르크왕국을 하나로 친거니 그 규모를 알 수 있지요.

마지막 황가인 오토대공의 가족. 그는 정치인으로 변신해 유럽의회의원까지 지냈지만 황가를 복원하지 못했다.

전쟁은 엉뚱한 양상으로 끝을 맺지요. 러시아가 1917년 3월 혁명으로 군주제가 붕괴하면서 동부전선은 소강상태에 빠집니다. 이어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영토는 오히려 줄어들지요. 휴전은 1918년 11월4일 이뤄집니다. 이로써 4개 제국이 무너졌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독일제국, 러시아제국, 오스만제국입니다. 승전국 영국과 프랑스도 피해가 컸습니다. 해외 식민지가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독립하게 된 것이죠. 이것은 유럽을 300년 이상 지배해온 최고의 명문(名門)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의 궤멸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합스부르크왕가’란 대체 무엇인가? 이것이 제가 ‘빈과 황가(皇家)의 여인들’ ‘영원한 빈의 연인 씨시’로 오스트리아 역사를 다룬 핵심 주제입니다.

합스부르크왕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게 신성로마제국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신성로마제국에 대해 “신성하지도 로마답지도 제국답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독일 문호(文豪) 괴테도 비슷한 문장을 남겼지요. 그의 대표작 ‘파우스트’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라이프치히 아우어바흐트의 술집에서 대학신입생 프로슈가 부르는 노래인데요, ‘사랑하는 신성로마제국이여, 어떻게 해서 여태껏 존립할 수 있었느냐’는 부분입니다. 괴테가 ‘파우스트’ 1부를 내놓은 게 1808년, 2부는 그가 죽기 한해 전인 1831년입니다. ‘파우스트’의 습작(習作)이라 할 ‘원(原) 파우스트’를 괴테가 쓴 게 1773년부터 1775년입니다. 거기도 같은 부분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괴테가 뭔가를 봤다는 얘기지요. 괴테가 본 것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 요세프 2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이었습니다. 13살 괴테의 눈에 그것은 ‘지상의 존엄이자 권력의 화려한 상징’이었던 겁니다.

신성로마제국의 기원은 ▲샤를 마뉴부터▲오토1세(962년)부터라는 설이 있지만 이때는 '신성(神聖)'이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황제 아우구스투스' 혹은 '로마인과 프랑크인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라고만 불렀지요. '로마제국'이란 말이 공식 문서에 나온 것은 1034년 독일 작센왕조의 콘라트2세 때입니다. '신성제국'이란 말은 1157년 바르바로사, 이탈리아어로 '붉은 수염'의 프리드리히1세(1122~1190년)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이 두 왕은 합스부르크왕가와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당시 유럽은 프랑크왕국(프랑스)만이 국가형태를 갖췄고 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이탈리아-폴란드-헝가리-체코 등은 제후(諸侯)들이 할거하던 시대였습니다.

역사상 ‘신성로마제국’의 칭호를 제일 먼저 쓴 사람은 홀란드(지금의 네덜란드)공작 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빌헴이었습니다 1254년 작성된 공식 문서에 이 단어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빌헴의 최후는 황제답지 않았지요.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칭한 지 2년 뒤인 1256년 지금의 네덜란드 북부인 프리슬란트로 원정 가던 중 아무도 모르는 사이 말과 함께 늪에 빠져 죽습니다. 그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사망한 지 무려 26년 뒤의 일입니다.

지금의 독일-네덜란드-벨기에-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당시 보헤미아)-이탈리아 북부에서 느슨한 연방형태로 존재했던 수수께끼 같은 이 제국에 합스부르크가가 등장한 것은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1218~1291) 때입니다. 여기서 잠깐 합스부르크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볼까요? ‘옥스포드레터-빈의 연인 씨시’편에 등장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1848년 오스트리아황제에 즉위했을 때의 공식 칭호가 다음과 같이 길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스트리아의 황제, 헝가리의 왕, 보헤미아의 왕, 롬바르도-베네토,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일리리아의 왕, 예루살렘의 왕, 오스트리아대공, 토스카나대공, 크라쿠프대공, 로트링겐, 잘츠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케언텐, 카르니올라, 부코비나의 공작, 트란실바니아 대공, 모라비아 변경백, 상하 슐레지엔, 모데나, 파르마, 피아첸차 및 구아스탈라, 옹슈비엥침, 자토르 및 테센, 프리울리, 두브로브니크 및 자다르의 공작, 합스부르크 및 티롤, 키부르크, 고리치아 및 그라디스카의 백작, 트렌토 및 브릭센공, 상하 루사티아 및 이스트리아의 변경백, 호에넴스, 펠트키르히, 브레겐츠, 존넨베르크의 백작, 트리에스테, 코토르, 빈디츠 마르흐의 영주, 독일연방의 대표이신 프란츠 요제프1세 폐하….’

그가 아내의 도움으로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성립되면서 헝가리의 사도왕(使徒王)을 겸임하면서 공식 칭호는 변하는데, 지금 이탈리아에 속하는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가 작위(爵位)에서 사라집니다

시내 광장에서 결혼 사진을 촬영하는 젊은이들. 이렇게 평화롭게 보이던 오스트리아는 100년전만해도 유럽에서 가장 풍운이 가득한 도시였다.
비엔나 오페라의 내부. 잘 차려입은 관람객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오페라가 시작하기 전 관람객들이 입장하고있다. 계단은 곧 신분상승을 통했으며 오페라는 비엔나 귀족들이 로맨스를 나누던 곳이었다.
비엔나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잘츠부르크도 평화가 가득해 보이지만 실상은 동구권에서 밀려온 빈민들로 고민을 하고 있다.
잘츠부르크의 미라벨정원. 겨울 햇살이 한가롭게 공원에 비치고 있다.
쇤부른궁전 앞에서 황금빛으로 온몸을 칠한 채 구걸하는 사람. 오스트리아는 로마 못지 않게 과거를 먹고사는 도시다.
이런 역사의 굴곡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엔나 시내에 들어선 엄숙한 건물들 앞에서 시민들이 한가롭게 오후를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