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들린 베니스행 티켓. 직항이 없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들러 베니스로 가는 여정.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서 체류하는 5시간을 합하면 가는 데만 19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지인들은 물었다. 이탈리아로 19시간이나 들여 인터뷰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국왕이라도 되느냐고. 무심한 듯 이렇게 답했다. “아니, 김장훈.”

미리 말하건대, 김장훈의 팬이었던 적은 없다. TV에 나오면 나오는갑다, 새 앨범이 나오면 냈는갑다, 했다. 그런 그가 베니스에서 공연을 한단다. 지난 12월 13일 오후 9시, 골도니 극장(Goldoni Theatre)에서. 이 극장은 1622년에 지어졌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 이탈리아의 국민가수들에게도 꿈의 무대로 꼽히는 곳이다. 팬이 아닌 기자로, 호기심이 발동했다. 동행 취재를 기획했다. 김장훈도 좋다고 했다. 베니스행 티켓을 끊었다.

만나러 가는 길

유럽은 멀었다. 좁은 좌석에서 다리 한번 못 뻗고, 12시간을 날아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공연 전날인 12월 12일. 현지 시각으로 새벽 4시. 베니스로 가는 비행 편은 5시간 후인 오전 9시. 환승 게이트를 찾아가려는데, 이거 웬걸.

안내 전광판, 내 비행 편에 'Cancelled(취소됨)'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항공사 안내데스크로 뛰어갔다. 베니스로 꼭 가야 된다고 했더니 정 그러면 밀라노행 티켓으로 바꿔주겠다고 했다. 밀라노에서 베니스까지는 기차를 타고 가란다. 주저 없이 밀라노행 티켓으로 바꿨다. 밀라노행 비행기는 오전 10시에 뜰 예정이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보딩 시간이 됐다. 티켓과 여권을 챙겨 줄을 섰다. 그때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왠지 모를 불길함이 엄습하더니 귀에 꽂힌 딱 두 단어, '밀라노'와 '캔슬'.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한참을 오도카니 서 있었다. 내 머리 위에만 세찬 비가 내리는 듯했다. 몸과 마음이 축축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파업이 진행 중이었다. 렌치 총리의 노동법 개정안에 반발하는 양대 노조가 총파업을 진행하던 날이 바로 그날. 항공, 기차를 비롯한 모든 대중교통과 학교, 은행 등 기관들도 마비됐다. 12시간까지 공항에 체류한 끝에, 항공사 측으로부터 인근 호텔을 배상받고 암스테르담에서 하루를 묵어야 했다. 더 큰일이 생기지 않은 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런데, 아마 믿기 힘들 거다. 더 큰일이 생겼다. 공항에서 빠져나오며 여권을 잃어버렸다. 그 후 지방에 있는 영사관을 찾아 여권을 재발급받았던 약 5시간 동안의 일은 '중략'으로 남겨두자. 그 '썰'을 풀자면, 반나절은 걸릴 테니.

한편 마음속엔 김장훈이 다른 존재로 새겨지기 시작했다. '한번 만나볼까? 만나지, 뭐'로 시작했던 게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수 있겠지… 제발…'로 바뀌면서 내 맘속에 한 마리의 '파랑새'가 돼가고 있었다.



파랑새 놓치다

날이 밝았다. '사노라면'의 후렴구, "내일은 해가 뜬다"를 흥얼거리며 공항으로 갔다. 다행히 파업은 끝난 상태. 드디어 출발! 베니스엔 오전 11시 50분쯤 도착했다. 공연까지는 아직 9시간여가 남았다. 그전까지 만반의 준비를 마칠 참이었다. 김장훈 측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전날 겪은 게 '강풍'이라 치면, 토네이도 급이었다. 것도 메가톤 급으로다가. 공연이 취소됐단다.

불가항력적인 이유였다. 앞서 공연 팀은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오는 일정이었는데, 한국에서 부친 악기와 공연 의상 등 짐이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오지 않았다. 이번 공연은 이탈리아 현지 팬들은 물론 베니스카니발, 베니스영화제 등 이탈리아 유력 문화 관계자들이 관람할 예정이었다. 그런 만큼 기대도 컸고, 상심도 컸다. '베니스에서 공연하는 김장훈'을 취재하러 갔기에, 인터뷰할 명분은 자연히 소멸됐다.

그렇게 '멘붕'의 연속이었던 이틀을 보내고, 김장훈과 전화 통화를 했다. 그는 "생각보다 괜찮다"고 입을 뗐다. 더 좋은 일이 일어날 거니까, 그냥 잊어버리겠다고 했다. "원래 큰일이 생기면, 소주 한잔 하고 치우자는 주의예요. 빨리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돌아가면 바로 한국 공연을 준비해야 하는데, 거기에 전념하려고요." 그는 "다만, 의도치 않게 인터뷰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화끈한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잠깐이나마 각자가 겪은 '풍파'를 토로하고,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날 오후, 공연 장소였던 골도니 극장으로 가봤다. 이미 극장 앞에 그의 포스터는 없었다. 관광객들은 공연장 앞에서 이따금씩 기념 촬영을 했다. 그들에게 '두 유 노 김장훈?'을 물을 수 없었던 아쉬움을 짧은 한숨으로 토해내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날 베니스엔 여우비가 내렸다.

인고의 시간 후… 화끈한 인터뷰

김장훈이 말하는 '여자·술·노래'


피천득은 말했다. "어리석은 자는 인연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고도 놓치고, 현명한 자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고. 그렇다면, 피천득 선생님, 묻고 싶습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도 스치지 못한 인연을 살려낸 자는 무엇일는지요? 돌아, 돌아 김장훈을 만났다. 

한국에 돌아온 당일이었다. 그는 밤 10시가 돼서야 시간이 난다고 했다. 이미 그를 향한 맘은 ‘오기’에 가까워서 아마 새벽 3시라고 해도 튀어 나갔을 거다. 서강대 메리홀. 그는 한국 공연 준비에 한창이었다. 직전엔 피치 못할 술자리가 있었단다. 소주 2병을 이미 걸치고 나온 상태였다. 그 모습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왠진 모르겠는데 ‘맨정신의 김장훈’은 어울리지 않았다.

# 여자 

심지어 그는 "술에 좀 취해서 말을 막 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옳다구나 싶었다. 머릿속이 하얘져서 뭘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쉽게, 쉽게 가자고 제안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하게 된 인터뷰이니만큼 섭섭지 않게 해주겠다"고 했다. 내친김에, 그렇다면 화끈하게 오늘 주제는 '술, 여자, 노래'로 하자고 했다. 그는 "좋다. 우선 여자 얘기부터 하자"고 말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실, 결혼 얘기부터. 사람들은 절 독신주의로 봐요. 그런데 전 반드시 결혼을 하겠다는 주의예요. 왜냐면 제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어요. 지구 상에 엄마랑 누나 둘이 다예요. 친척도 없어요. 게다가 어렸을 때 3년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외로운 날을 보냈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날들을 견뎠어요. 그러면서 여태까지 살아왔어요.

잠깐만요, 태어날 때 3년 동안 병원에 있었다고요? 아니요. 초등학교 1, 2, 3학년 때요. 그때 3년 동안 링거 꼽고 오늘만 산다고 하고 살았어요. 기관지 천식에 악성 빈혈이었죠. 좀 낫다 싶어서 학교 가려고 하면 그럴 체력이 안 돼서 또 쓰러지고, 다시 입원. 너무 외로웠죠. 그땐 스무 살만 되길 원했어요. 당시엔 스무 살이 어른인 줄 알았으니까. 어쨌든, 어떻게든 살다가 고등학생이 되니까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엄마 때문에 가정의 행복을 못 줘서 미안하다. 너는 좋은 여자 만나서 반드시 결혼해라" 그래서 그게 박혀 있었죠.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무조건 좋은 여자 만나서 일찍 결혼하겠다 마음먹고 살았죠.

그런데 지금은 (왜 혼자인가요)? 운명이라는 게 자기가 원하는 길에서 만나는 경우는 잘 없더라고요. 원하지 않는 길에서 항상 만나곤 해요. 사람들이 그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거냐, 그렇지 않느냔데, 저는 그걸(예측 불가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여자뿐만 아니라 제 삶이 생각했던 것과 다 바뀌었어요.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하는 게 꿈이었는데, 이렇게 됐어요. '이렇게'의 뜻은 알아서 생각하시면 돼요.

결혼을 하고 싶단 얘기죠? 정말 하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그래요. 결혼이 늦었다고. 근데 결혼에 늦은 건 없는 것 같아요. 스무 살에 결혼해도 사십, 오십은 오고. 육십, 칠십이 돼도 로맨스를 유지할 자신이 있거든요. 결혼이라는 게 강박으로 하는 건 아니잖아요.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하면 되는 거잖아요.
만났던 여자분들 얘기 좀 들려주세요. 평생 사랑을 3.5번 했어요. 첫사랑은 고1 때부터 5년 동안 친구였다가 사랑으로 변한 케이스. 원 없이 사랑하다 떠나갔고요. 두 번째 사랑은, 아직도 못 잊었었는데….

'못 잊었었다, 아직도?' 이건 과거인가요, 현재인가요? 못 잊었어요. 최근까지. 이번에 발표한 '21년. 이젠 나도 결혼하려고'라는 노래의 대상이기도 해요. '나와 같다면'의 "나의 잘못했던 일과, 너의 따뜻함만 자꾸 생각나", '혼잣말'의 "조금 더 잘해주지 못하고 울리던 일들만 마음에 남아 이젠 내가 눈물이 날까"  이게 전부 그녀 얘기예요. 제가 너무 힘들게 한 사람이죠.

아직도 생각나요? 네. 생각나죠. 심지어 3년 전에는 진상 짓도 했어요. 그 사람의 싸이월드에 가본 거죠. 봤더니, 뉴질랜드에 가 있더라고요? 여행을 갔나 봐요. 거기서 3개월을 있다 온대요. 그 글을 보면서, 속으로 '아. 왜 이렇게 오래 있는 거야. 빨리 오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아니,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지금은, 생각은 나지만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 친구 남동생을 얼마 전에 만났어요. 저랑은 고등학교 때부터 봤으니까, 그냥 형 동생 하는데…. "누나 잘 살아?" 물어봤더니, "애들도 많이 컸고"라는 얘기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요즘 독립영화 제목이랑 비슷한데, '내 님이 그 강을 건넜구나'. 20년 간직했던 내 님이 그 강을 건넜구나. 건너갔는데 내가 계속 부르면 그건 사랑이 아니니까, 그냥 끊어야겠다. 끝내야겠다. 그래서 21년, 하고 마침표. 이젠 나도 결혼하려고라는 제목이 나온 거예요. 내가 이제 그만할게, 싶었죠. 

3.5번의 사랑. 0.5는 뭐예요? 세 번째 만난 여잔데요, 같은 사랑이었어요. 아주 예뻤죠. 맨날 나이트나 다닐 것같이 생겼었는데, 앉아서 공부만 하던 친구였어요. 영문과 학생이었는데.

설마 최근에 대학생 만나신 건 아니죠? 90년대 일이에요. 지금은 교수가 된 친군데, 왜 0.5냐면, 너무 짧았어요. 사랑은 깊이 했지만. 붙을 만하면 우연히 헤어지고, 붙을 만하면 헤어졌었죠. 그래서 이건 반 번의 사랑이다 싶었죠. 걔가 나한테 보낸 편지의 제목 중에 '0.5의 사랑'이란 게 있었어요. "나는 오빠한테 0.5잖아"란 얘길 했었죠. 그 (편지) 내용이 굉장히 재치 있으면서도 시쳇말로 '웃픈(웃기고 슬픈)' 기억이에요.
선호하는 여성상이 있나요? 음, "어떤 결혼 상대를 원하느냐"는 질문 많이 받는데, 사실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아마 결혼한 후에 결과론적으로 '지금 보니 이 여자가 이상형이었네요' 이럴 것 같아요. 다만, 살집이 있는 사람이 좋아요. 마른 건 싫어요. 왜 그런가 했더니, 어렸을 때 정을 못 받고 자라선 것 같아요. 한땐 그래서 연상을 좋아하기도 했죠. 푸근한 사람을 좋아하는 건데, 푸근함은 나이가 아니더라고요. 그 여자가 갖고 있는 가치관이 나를 푸근하게 해주는 거더라고요. 그러니까 나이도 상관없고, 직업도 상관없어요. 다만 행복의 기준을 저로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 영역을 방해받고 싶지 않고, 또 저도 그의 영역을 존중하고 밀어주고요. 일주일에 한 번 만난다고 해도 그 순간 사랑할 수 있으면 된다 싶어요. 제가 중학교 때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장훈이 너는 누구한테 속박을 당하는 걸 못 견디니까 자기 세계가 분명한 여자를 만나라"고. 그리고 "친구처럼, 연인처럼, 그렇게 지내라"고요. 그때가 중학생이었는데, 그게 이해가 돼요? 나중에 지나고 나니까, 엄마가 진짜 대박이었구나, 정확하게 봤구나….

속박을 못 견디면서 막상 속박당하지 않으면 외롭지 않나요? 맞아요. 지금은, 이를테면 '아름다운 구속'을 원해요. 저요, 보기에 마음대로 사는 것 같지만 만약에 여자를 만나면 시키는 대로 다 할 것 같아요. 기꺼이, 즐겁게. 사실 제가 가장 원하는 건 어느 순간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저를 바보로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냥 바보로. 첫사랑에 미쳤을 때처럼 바보로요. 그리고 저는 좀 (여자가) 가난했으면 좋겠어요.

어떤 면에서요? 물질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한데, 모나지 않은. 부자면 모든 걸 누려봤기 때문에 저로 인해 행복한 게 적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많았으면 좋겠어요. 여자의 학벌이나 재산, 뭐 이런 거 중요하지 않아요. 물론 지성적이면 좋죠. 지성과 배움은 다르니까요. 결혼한다고 해도, 전 원하는 거 하나도 없어요. 이를테면 예단. 그거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옷이 있는데. 요즘은 보니까 남자가 집, 여자는 혼수라는 공식이 있더라고요. 그건 예전에 각자 부모 집에 얹혀살 때 문화예요. 근데 지금은 각자 살잖아요. 각각 10평짜리에 산다고 치면, 합쳐서 15평짜리 집에 살고 5평짜리를 부모한테 주는 게 맞다고 봐요. 부모님들이 소고기 먹을 거 돼지고기 먹으면서 자식 등록금 내주고, 집 사주고, 결국 월세 혹은 전세에서 초라하게 황혼을 보내는 게 말이 됩니까. 오히려 자식 덕분에 좋아져야죠. 저랑 결혼할 때 그냥 콜밴 타고 오기만 하면 돼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제 결혼이 사회에 경종을 울렸으면 좋겠어요. 지금의 허례허식을 계몽하는.

'김장훈 이상형'이라고 인터넷에 쳐보니까 이휘향 씨가 뜨던데요? 아, 휘향 누나 정말 좋아해요. 누나는 제 공연에 늘 빠지지 않고 오세요. 처음 봤을 땐 가슴이 쿵쾅거렸다니까요. 보이는 모습(차가움)과 다르게 굉장히 따뜻하고, 부드럽고 저를 순화시켜주는 분이에요. 어떤 사람을 추구하다가 정작 만나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휘향 누나는 10배는 더 만족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남한테 안 한 얘기도 다 하게 되고. 따뜻하고, 엄마 같고, 누나 같고, 연인 같고. 사실 누나, 누나 하지만, 만나면 속으로 데이트한다는 기분을 가졌어요. 그 누나도 저랑 데이트하는 기분이었을 거예요. 전 그렇게 믿어요.

뭐, 믿음은 자유니까요…. 네. 정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결혼을 한다면 자식은요? 자식에 대한 욕심은 없어요. 대학교 여후배들이랑 되게 친하게 지내는데, 결혼한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남편이랑 말도 안 섞고, 잠자리도 안 가진대요. 그럴 거면 왜 같이 사나 싶은데, 애들 때문에 산대요. 그건 아니라고 보거든요. 부부가 애한테 전력투구하는 거예요. 나는 너를 사랑해서 결혼한 건데. 나는 항상 네가 1등이에요. 아이는 2등이에요.

욕심이 없는 거지, 원치 않는 건 아니죠? 저 개인적으론 없어도 상관없는데, 그녀가 원한다면 입양을 해서 키우고 싶어요. 남남으로 만나도 가족처럼 지낼 수 있어요. 제가 부천 새소망의집에 간 지 17년 됐거든요. 그 당시 중학생이던 애들이랑 지금 맞담배, 맞술 하면서 형제처럼 지내요. 남남이었지만. 지금 제 나이에 결혼해서 애기를 낳는 게 (물리적으로) 여자분에게 고통이 될 수도 있으니까. 물론 직접 낳은 아이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고요. 전적으로 맡기고 싶어요. 정해진 틀이 있는 건 아니에요. 행복의 모양은 수천, 수만 가지가 있는데, 꼭 어떻게 해야만 행복한 건 아니잖아요.
이렇게 결혼 얘기를 할 때, 떠올리는 사람 있지 않나요? 네, 아까 말씀드린 '21년 그녀'요. 근데 뭐, 그 사람은, 지금 안 되니까.

그분 말고요. 지금은 만나는 사람 없어요? 결혼할 여자요? 없어요. 만나는 사람도 없고요. 근 2년 동안 데이트를 한 번도 못 했어요. 오죽하면 게이설도 나돌았겠어요. 하도 여자를 안 만나니까. 에서 니콜라스 케이지가 그러죠. "내가 술을 마신 다음에 아내가 떠난 건지, 아내가 떠나고 나서 술을 마셨는지 모르겠다"고. 제가 무대에 미쳐서 여자를 못 만난 건지, 여자를 못 만나서 무대에 미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봐요.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행복하고 싶은데. 예전엔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도 해줄 수 있는 게 많이 없었거든요. 항상 가난했으니까. 근데 지금은 해줄 힘이 있는데, 여자가 없네?

여자를 만날 땐 어떤 편이에요? 성향이랄까, 그런 거. 사람들은 남성미 가득한 사람으로 보는데 완전 페미니스트예요. 여자만 있는 집에서 자라서 굉장히 여자 위주예요. 그래서 여자 친구가 있을 때 다른 남자들이랑 노는 건 괜찮은데, 집에만 안전하게 들어가라고 강조해요. 만약 새벽 1시에 집에 혼자 들어갔다, 이러면 넌 바보냐? 너처럼 예쁘고 귀한 애를 그 자리에 같이 있던 남자들이 집에도 안 데려다주는 게 말이 되느냐, 그래요. 화가 나요. 다른 남자랑 뭐 했다는 건 상관없거든요. 그건 그녀의 의지니까. 근데 집에 안 데려다주는 남자들이랑 어울리는 건 안 돼요. 정말 고귀하게 에스코트해줄 수 있는 그런 남자들만 만나라, 이러거든요. 사실 마초기도 있고, 여성적인 면도 있고 양극단이 공존해요. 극단적이죠, 그래서.

극단적인 분이군요? 굉장히 극단적이에요. 세속적이면서 이상적이고, 좋은 사람이면서 못됐고요. 결혼을 못하는 것도 그래서인 것 같아요. 몸과 정신이, 이를테면 1차적으로는 때가 묻고 망가졌는데 2차적으로는 순수한 초딩인 거예요. 여자랑 잠을 자도 아무런 감정이 없을 때가 있으면서, 손만 잡아도 설레는 감정을 느끼고 싶은 거죠. 지금도 누군가가 '여자 친구 만나면 뭐 하고 싶냐'고 물으면, 손잡고 마냥 걷고 싶다고 대답할 거예요. 걷다가 카페 들어가서 말없이 같이 있어도 좋고.

그간 만났던 분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얘기가 뭐였나요? 좋은 얘기든, 아니든. 외로웠다는 얘길 하더라고요. 헤어질 때 너무 외로웠다고 하더라고요. 차라리 바람을 피운 거라면 질투할 대상이라도 있지, 옆에 있으면서도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는 그 공허함은 어떻게 해도 채울 수가 없다고. 그렇게 말을 하더라고요. 제가 어린 시절 외롭게 보내서, 늘 갈망하는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계속 먼 데를 봤던 거고…. 어쨌든 지금은 예쁜 여자 만나서, 예쁘게 살고 싶어요.


 # 술

여자 얘긴 이쯤 들으면 된 것 같았다. 사실 알딸딸해 보이는(?) 그가 너무 거침없이 얘기할까 봐 멈추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어차피 19금이라 쓰지도 못할 얘기 들으면 아깝기만 할 뿐. 술 취한 그에게 술 얘길 꺼냈다.

술 좋아하신다고요? 좋아하죠.
어떤 술 드세요? 소주요. 주로 소주를 마셔요. 양주는 싫어하고요.
소맥은 안 드세요? 어우, 소맥 좋아하죠. 소주가 고구마로 만들어서 단맛이 나면서 쓰잖아요. 근데 맥주랑 타면, 그 쓴맛을 까주고 단맛을 극대화시키면서 술술 넘어가죠. 원래 소맥 안 마셨었는데, 지금은 그 이상 맛있는 건 없는 것 같아요.
비율은? 소주 1이랑 맥주 4요. 제가 기가 막히게 타죠, 또. 죽어요, 죽어.

술 마시면 취하나요? 취하죠. 원래 주량은 반병인데, 분위기에 따라 달라요. 반병에서부터 세 병까지 가는 것 같아요. 누구랑 어떤 자리에서 마시느냐에 따라.  

필름은 안 끊겨요? 한 번도 없어요, 필름 끊긴 적. 그래서 괴로워요. 술 마시고 실수한 게 다 기억나니까요.

보통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실수를 많이 하는데, 기억나는데도 실수를 한다고요? 네. 예를 들면, '아 어제 그 여자랑 왜 그랬지' 이런 거?

그런 실수도 하는군요. 민간인일 때는 남녀 간의 사고가 자주 났어요. 근데 지금은,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해도 조심하죠. 세상에 남녀 간의 사고만큼 재밌는 게 어디 있어요. 그 이상 재밌는 건 없어요.

사고 나기 직전까지가 재밌죠. 아, 3단계가 있다고 쳐요. 뽀뽀하고, 그다음, 그리고 마지막. 근데 전 1단계를 넘진 않아요.(진지함)


 # 김장훈, 그리고 엄마

워~워. 술 얘기도 자칫 위험할 뻔했다. 사실 저런(?) 얘기만 한 건 아니다. 막걸리 이야기를 하다가, '전통술 계승에 대한 고찰'도 했다. 진짜다. 기사 흐름상 안타깝게도 편집됐지만. 그는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이란 시가 나올 정도인데, 전통주가 보존이 안 되고 있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여기에서 나아가 "직접 빚은 도자기에 제가 주조한 고급 막걸리를 담아 팔고 싶다"는 포부를 내비치기도 했다. 하여간 머릿속에 갖가지 게 다 들었다. 김장훈 스스로에 대한 얘기를 나눠봤다. 또, 엄마 이야기도 물었다. '21년 그녀'도 그녀지만, 사실 가장 많이 언급한 사람은 엄마다.

체력이 대단한 것 같아요. 술 드시고, 노래하고, 뭐 여러 가지 하시는데. 얼마나 주무세요? 3시간 정도 자요. 하루에 한 20시간을 일해요. 여러 가지 활동을 하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물어봐요. 음악은 언제 하느냐고. 이렇게 답하죠. 하루에 10시간 정도 하고 있는데요? 한땐 불면 증세도 왔는데, 지금은 고쳤어요.

어떻게 고쳤어요? 60시간을 안 잤더니 고쳐지던데요. 참, 그리고 공황장애도 다 나았어요. 공황장애는 저한테 축복이었어요. 그때 필(feel)이 많이 늘었거든요. 공황장애는 100% 완치되는 병이에요. ‘어떻게 약으로 마음을 고치지?’ 싶었는데, 고쳐지더라고요.

잘됐네요. 아직도 만나는 사람들이 많이 물어봐요. 괜찮으시냐고. 완쾌했는데 계속 물어봐요. 왜 그런지 봤더니, 여러 연예인들이 “실은 나도 공황장애다”라는 걸 밝힐 때마다 ‘김장훈이 앓았던 병’이라는 게 나오니까. 어쨌든 그 사실을 밝힌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이후로 정신과의 문턱이 낮아진 것 같거든요. 정신과 간다고 낙인찍을 필요 없잖아요. 그냥 뇌 감기일 뿐이에요. 내가 힘들면 한번 껴안아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게 사람 사는 거잖아요. 완치했다는 걸 다시 한 번 밝히고 싶어요. 그래야 여러 사람들이 희망을 얻죠. 저 완치했습니다. 아무런 불편함이 없어요.

말씀 중에 어머니를 자주 언급하시는데, 어떤 분인가요? 이북 분이신데요, 되게 강성이세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니면 아니라는 분. 아빠 없이 자랐다는 소리 안 듣게 하려고 정말 엄격하게 키우셨어요. 대쪽 같은 엄마. 그걸 보고 자랐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버티지 않았나 싶어요.

목사님이라고요. 일산에 ‘십대교회’라고요. 청소년 교회예요. 교회 전화번호 뒷자리도 1318일에요.(13~18살)

일산에 계시니까 자주 뵙겠어요. 거의 못 봬요. 통화는 자주 해요. 2시간씩 통화하기도 하고요. 엄마가 저보다 더 바빠요. 여기저기 대구까지 가서 강의하시고. 유일한 청소년 교회잖아요. 어렸을 땐 사실 엄마 때문에 많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항상 옳으신 분이라고 여겨요. 내 잣대가 우리 엄마인 게 정말, 참 고맙고…. 특히 모자간 사이를 더 좁히게 된 건 세월호 참사 이후예요. 주변 사람들이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더 소중하게 대하게 됐어요. 이런 얘길 나눠요. 우리 이번 생에는 아기자기한 가정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다음 생엔 오순도순 가정을 꾸려서 살자,라고요. 제 인생의 서열 1위는 엄마. 그다음이 누나들. 그리고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게 스태프들. 젤 행복할 때가 언젠 줄 아세요? 돈을 벌어서 주변 분들한테 나눠줄 때예요. 그리고 그들이 기뻐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어렸을 때는 생각보다 기뻐하지 않는 모습에 섭섭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주는 것만 생각해요.

기부를 하게 된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 컸나요? 엄마와의 신의를 지키려고 시작한 거예요. 어렸을 땐 집이 잘살았었거든요? 어머니가 대차서 철강업 하고, 광산업 하고 돈을 진짜 많이 버셨어요. 한강물이 다 말라도 엄마 돈은 안 마른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그렇게 신발에 흙도 안 묻히고 살다가, 차압 세 번 들어오고 나서 월셋 방으로 옮기게 됐어요. 원당에 있는 시골집으로. 사업 세 번 말아먹으니까 월세 8만원으로 가더라고요. 그때 엄마 소망이 수세식 화장실 쓰는 거였는데, 어느 날 그러시더라고요. 나중에 돈 벌면 엄마 좀 도우라고요. 그땐 제가 돈을 벌 거란 생각을 못 했으니까 그저 그럴게요, 했는데 1998년에 빵 터진 거예요.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이제 벌었으니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요. 그때부터 부천 새소망의집에 가기 시작했어요. 이후 2000년엔 계약금으로 12억원을 받았어요. 득달같이 전화드렸죠. “엄마, 12억이면 엄마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어?” 그랬더니, 무슨 소리요. 지금 12억 보낼 테니까 하고 싶은 거 하시라고 했어요. 그래서 지은 게 청소년 교회죠. 엄마 덕분에 청소년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기부 등 여러 사회활동도 그렇고요.

사회 참여가 높아지니까, 정치색 얘기가 따라붙기도 하는데요. 반문하고 싶어요. 정치색의 개념을 내게 먼저 가르쳐달라고. 정치색이 뭔가요? 내가 꿈꾸는 정치? 여야? 좌우? 전 정치를 꿈꾸지도 않고, 여야는 다 싫고, 진보나 보수 개념은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정치가 아니라, 이건 정의고 상식인 거죠. 이걸 어떤 이익집단이 정치색으로 굴절시킨 거죠. 이 작은 나라에서 지역갈등, 세대갈등, 좌우갈등…. 이게 무슨 코미딘가요. 정치색이 있느냐, 그렇다면 뭐냐. 이거 되게 우매한 질문 같아요. 설령 색이 있다고 한들, 그게 잘못된 거예요? 아니잖아요. 세월호? 그게 이념의 문제인가요? 사랑의 문제예요. 그걸 이념, 정치의 논리로 바꿔버린 게 이상한 거죠.

그래도 ‘대단하다’는 평가가 더 많아요. 저를 도와주신 분들이 대단한 거죠. 감사해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감사해요. 그 힘으로 사는 것 같아요.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약했던 아이가 아직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살아요. 저는 낙천주의자는 아닌데, 낙관주의자인 것 같아요. 요즘 신드롬인 에 비유하자면, 제가 바둑이 아마추어 5단이거든요? 연예인 중에서 젤 잘 둬요. 장그래랑 비슷한 게, 어렸을 때 프로기사를 꿈꾸면서 도장을 다녔는데 몸이 약해서 접었거든요. 인생을 바둑에 비유해서 살아왔는데, 완생, 사석, 미생 세 가지가 있잖아요? 인간들은 다 미생이에요. 미생은 또 두 가지로 나뉘어요. 이름 그대로 ‘아직 살지 않은 돌’, 이건 다르게 말하면 ‘아직 죽지 않은 돌’이잖아요. 미생으로 살 거냐, 미사(未死)로 살 거냐.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에 따라 인생이 바뀔 거라고 생각해요.



 # 노래 
어쨌든 김장훈은 가수다. 인터뷰의 방점은 여기다 찍는 걸로. 잘 찍힐지는 모르겠다(여자 얘길 너무 길게 해서).

이제 노래 얘기 해요. 놀랍게도, 노래 실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던데요? 노래는 예술이에요. 기술이 아니에요. 잘한다, 못한다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울리느냐, 마느냐의 문제예요. 제 노래를 듣고 울컥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 그러면 전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에요. 누가 제 노래를 평가하나요? 평론가? 아니에요. 관객들이에요. 공연이는 게 그래요. '그들만의 리그'예요. 제 공연에 와서 다 같이 즐기면 그만이에요. 가수와 팬이 그 공간에서 알콩달콩 사는 거죠. 최소한 팬들한테는 자신 있습니다.

물론 전 한 번도 제기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조동진, 양희은, 김현식, 전인권 선배들이 동시에 한 얘기가 있어요. 무대 위에 한 마리 짐승을 올려놓은 것 같다고요. 저한텐 최고의 칭찬이었어요. 또 하나는, 노래를 할 때마다 다르게 부른다고. 기복이 있다는 얘긴데, 그럴 땐 이렇게 말해요. 항상 같으면 재미없지 않냐고. 들을 때마다 똑같으면 앨범 들으면 되지 않냐고. 음, 통상적인 예술의 틀을 깨야 한다고 생각해요. 틀을 만들면, 그만큼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없애버리는 거거든요.

준비하고 계신 공연은 어떤건가요?(12월 18~27일) 빛과 소리의 향연이에요. 쿠킹호일이 포인트인데요, 한 100만원어치 써서 무대 뒤에 커다랗게 콜라주를 만들어놨어요. 이번엔 이렇게 디지털 요소를 많이 없앴고요, 오히려 스텐실, 콜라주, 모빌 이런 전통 미술 기법들을 활용했어요. 아날로그죠. 그러면 후진하는 것 같잖아요? 근데 아니에요. 다들 디지털을 쓸 때 반대로 가는 거니까 (반대편에서 보면) 앞서가는 거예요. 어차피 최근에 후배들이 하는 건 제 예전 공연을 답습하는 거예요. 제가 무대에만 1만 번 올랐는데요, 다 해봤죠.

1만 번. 무대에 오를 때마다 무슨 생각하세요? 열등감과 왕자병을 적절히 활용해요. 무대 오르기 전에는 '잘할 수 있을까?'라면서 열등감을 발휘하죠. 그러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요. 한편 무대에 오르면요? 왕자병을 끌어내요. '여기 올라온 이상 누구한테 지고는 못 배긴다'라는.

앞으로는 어떤 무대를 계획하세요? 브로드웨이에 세계적인 뮤지컬을 하나 올릴 계획이에요. 한국이 IT 강국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로봇들이 하는 뮤지컬을 준비하고 있어요. 카이스트와 함께. 아마 내후년쯤에 올릴 것 같고요. 그리고 어린이 뮤지컬을 준비 중이에요. 웬만한 어린이 뮤지컬은 다 봤는데요, 어른들은 전부 공연장 밖에 있어요. 유아기부터 노년층까지 다 즐길 수 있는 어린이 뮤지컬을 만들 거예요. 벌써 연출 다 짜놨어요. 한 공연당 연출안이 100개가 넘어요. 발상의 전환을 계속 시도하고 있어요. 주변에선 묻죠. "그러다 나중엔 뭐 하려고?"라고요. 그럼 "아무것도 안 하면 되지"라고 합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처럼요? 그렇죠, 그렇죠.
또 다른 계획은요? 노래에 있어서든, 삶에 있어서든. 앞으로 2년 동안은 어떤 싸움도 하지 않을 거예요. 어떤 것에도 각을 세우지 않고 2년을 보낼 거예요. 그간 독립투사 이미지가 강했는데, 2년 이후에 진짜 투사로 갈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일지 정할 거예요. 독립투사로 간다면 유사 이래 가장 기억에 남을 싸움을 할 건데요, 물론 이기는 싸움이죠. 그런데 아무래도 제가 음악을 하는 사람이니까 그것보단 사랑으로, 노래로 세상을 보듬을 공산이 클 거예요. 제가 생각보다 또 마음이 여리거든요. 눈물도 많고….


앞서 그는 자신더러 '극단적'이라고 말했다. 양극단이 공존하기에, 둘 다이기도 하면서 둘 다가 아니기도 하다. 이 때문에 김장훈은 스스로를 '주변인'이라고도 일컬었다.
"전 죽을 때까지 주변인일 것 같아요. 세속과 이상, 결혼과 독신, 부부와 불륜 이런 양극단,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이요. 부적응자. 인생은 여정이지, 목적지가 아니잖아요. 이게 목적지면 무너지겠지만, 여정이기 때문에 또 재밌는 거 아니겠어요? 죽기 전에 목적지를 발견하면 그땐 뭔 재미로 삽니까. 그래서 세상에 부적격자인 거에 대해서 불만은 없어요."

철학적이도다. 아까 '노래'에 방점을 찍겠노라, 했는데 그 점은 김장훈이 대신 찍어줬다. "그러니까, 제가 세상에 적응이 안 돼서 무대에 미친 건지, 아니면 내가 무대에 미쳐서 세상에 적응이 안 된 건지 모르겠어요." 무대에 미쳤다는 그는, 역시 가수였다. 인터뷰는 자정이 넘어서 끝났다. 김장훈은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소년처럼 무대로 뛰어갔다. 그러면서 혼잣말을 했다. "신 나는 리허설 시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