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Wien·Vienna)로 향하며 80년대의 추억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오스트리아 수도(首都)인 이 도시는 빈 혹은 비엔나로 불리지요. 빈은 독일어, 비엔나는 이탈리아어인데 영어에서 이 발음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80년대초 대학가에선 미팅이 유행했지요. 당시 그런 자리에서는 이름도 생소한 비엔나커피 한잔을 주문하는게 정석(定石)처럼 여겨졌습니다. 30년전 그 풍성한 크림에 덮인 달디단 커피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때문인지 오스트리아라는 말만 들으면 동시에 ‘비엔나커피’를 떠올리게 됐지요. 심리학에 나오는 ‘파블로프의 개(犬)’처럼 연상작용이랄까. 현지에선 ‘비엔나커피’라고 하면 잘모르고 크림을 올린 커피는 있습니다.

유럽에 커피가 유래한 역사를 볼까요? 1669년 7월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의 일입니다. 다이아몬드 박힌 가운을 입은 태양왕 루이14세 앞에서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무함마드4세의 사절 솔리만 아가가 뭔가를 선보입니다. 투르크 커피를 내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걸 본 신사숙녀들은 이국적인 음료에 매료됩니다. 이후 상류사회에선 커피 담당 하인을 고용하는게 신분의 상징처럼 됐습니다.

솔리만 아가의 목적은 커피 소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비엔나 침략전 프랑스에 중립을 요청하러온 겁니다. 1683년 오스만투르크는 30만군으로 비엔나를 공격했지만 바이에른-작센-폴란드 연합군에 져 퇴각합니다. 그들이 물러나며 남긴 게 검은 가루가 든 자루였습니다. 유일하게 폴란드 태생의 콜스치키, 혹은 코르시키란 사람만이 그 가루가 뭔지 알았습니다. 그가 이 분말로 조리한 것이 비엔나커피의 원조가 됐습니다. ‘아인슈패너’ 커피가 그것으로, 설탕과 크림을 얹어 마시지요.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20세기초만해도 프랑스 파리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화려했습니다. 프랑스 부르봉왕가(王家)와 라이벌이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따 쇤부른 궁전을 지은 것은 유명합니다. 절정을 구가하던 두 제국(帝國)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해체됩니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는 1789년 대혁명에 의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잘못된 선택으로 제1-2차대전 패전국이 돼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살던 쇤부른 궁전이다. 옛 영화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은 항상 관광객들로 붐빈다.
쇤부른 궁전과 함께 황족들이 머물던 벨베데레 궁전이다. 이 궁전은 상궁과 하궁으로 나뉜다.

현장에서 본 오스트리아는 쇠락(衰落)한 분위기가 물씬했습니다. 잘츠부르크에서도 느꼈지만 도시는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만큼 유서깊은 대형건물로 가득한데 활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파리나 런던과 비교가 됐지요. 방대한 영토를 잃었기 때문일까, 그로 인해 자신감마저 상실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체코-헝가리-슬로베니아-슬로바키아의 접경(接境)을 통해 90년대 민주화된 동구권 나라에서 가난한 유민(流民)들이 범람하기 때문일까.

비엔나와 함께 오스트리아 귀족들의 중심지였던 잘츠부르크의 성당이다. 600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화가 아직도 숨쉬고 있다.

은사인 안병영 전 교육부장관께서 비엔나대에서 학위를 하셨지요. 작년에 오스트리아 관련 서적도 낸 바 있어 꼭 한번 봐야겠다 싶어 부족하지만 공부도 했던 오스트리아는 한국이 참고해야할 점이 많은 나라였습니다. 특히 프란츠 요셉1세 황제와 아내 엘리자베스의 스토리를 보며 구한말 우리와 어찌 그렇게 비슷한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프란츠 요셉1세 황제(1830~1916)의 후계자 카를1세 때 붕괴하지요.

잠시 역사의 시계를 되돌려봅니다. 오스트리아가 격동기를 맞은 것은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皇后·1717~1780년)때부터였습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황제였던 카를6세의 장녀였습니다. 황제는 아들을 염원했다고합니다. 그런데 고대했던 아들은커녕 딸들마저 요절합니다. 카를6세는 ‘국사조칙’을 발표하지요.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황위(皇位)를 이을수 있다는게 골자였습니다. 아버지 카를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23살때 죽습니다.

이 여성이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다. 딸로 태어나 제국을 이어받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이 중심이 된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으로 취임 초부터 고생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사후(死後)를 꽤나 염려했던 모양입니다. 영국-프랑스-작센 및 폴란드-러시아-네덜란드-스페인-덴마크-프로이센, 심지어 교황청에까지 사정해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으니까요. 이 나라들은 카를6세 생전에 황제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그가 죽은 뒤 말을 바꿉니다. 우리 조선 때 세종대왕이 사후 아들 문종을 보살펴달라고 했던 집현전 학사들이 손자인 단종 때 ‘계유정난’을 일으킨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오스트리아 계승(繼承)전쟁’입니다. 전쟁으로 이득을 본 것은 신흥강국 프로이센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 땅을 빼앗겼고 황위마저 카를7세에게 강탈당했다가 겨우 되찾기도 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가 죽기 4년전인 19살 때 가난한 가문의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 그녀는 넷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지요. 그러다 황위에서 밀려날 뻔했으니 분노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영국과 손을 잡는 등의 우여곡절을 거쳐 마리아 테레지아가 상속녀로 인정받은 건 1748년, 황위에 오른지 8년 뒤였습니다. 그는 남편을 명목상 신성로마제국황제로 올려놓고 실권을 본인이 쥔채 개혁에 박차를 가합니다.

남편과 마리아는 묘한 관계였습니다. 아이만 모두 16명을 낳았는데 그중 11번째가 루이16세의 아내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였지요. 이 딸은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 38번째 생일을 2주 앞두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1765년 남편 프란츠 슈테판(신성로마제국 프란츠1세)이 사망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죽을 때까지 과부(寡婦)를 상징하는 검은 옷을 입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모두 16명의 아이를 낳았다. 오스트리아 황가에서 여성의 역할은 무조건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었다. 그래야 주변국과의 결혼을 통해 권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무서운 면도 있었지요. 남편의 외도를 묵과하지 않았습니다. 프란츠 스테판은 당시 부(副)수상의 부인 콜로레도 백작부인, 사르디니아 대사 카날레백작의 팔피 백작부인 등 숱한 상류층 여성과 밀회를 즐겼는데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그걸 아는 순간 수천배로 복수를 했습니다. 대표적인게 여왕이 만든 ‘순결위원회’였습니다. 처음엔 남편을 감시하려 만든 윤리경찰관들이 나중엔 도시 전체의 풍기(風紀)를 단속했는데 1774년에는 술집에서 여종업원을 고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까지 만들었지요. 법을 위반한 업주는 면허를 잃고 여종업원들은 속옷까지 벗겨진채 자루 속에 넣어져 일요일 미사가 열리는 동안 성당 앞에 묶여야 했습니다. 그리곤 머리를 완전히 삭발한 뒤 그 위에 타르를 바르고 폭도들에게 넘깁니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은 사람이 거의 살지않는 도나우강 하류 템스파르로 보내지는데 그 원시림에선 가혹한 노역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번 “그곳에 가느니 죽겠다”며 강으로 뛰어드는 여자들이 속출했다지요.

남편 대신 여왕의 신경은 자식들의 혼사로 쏠렸습니다. 1760년 장남 요제프2세(1741~1790)가 이사벨라 폰 부르봉-파르마와 결혼한 것을 필두로 차남 레오폴트2세가 마리아 루도비카 폰 부르봉-스페인을 아내로 맞았지요. 그러나 장남 요제프2세는 불운했습니다. 사랑했던 첫 아내 이사벨라가 세번째 아이를 사산한 뒤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겁니다. 몇년 뒤 독일공주 요제파와 재혼했지만 그녀 역시 천연두로 사망하자 결혼 꿈을 접었지요.
요제프2세는 요제파를 볼 때마다 괴로워했는데 역사서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허리는 절구통에 얼굴은 귤껍질처럼 얼룩덜룩했으며 치아는 들쑥날쑥했다…. 황제는 그녀를 보면서 절망이 혐오와 증오로 변했다."

딸들의 팔자도 기구했습니다. 가장 미인으로 스페인왕가로 가려던 엘리자베트는 천연두로 얼굴이 망가지면서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뒤를 이어 한살 때 스페인 왕가와 약혼한 요한나 가브리엘레는 12살 때 세상을 떴습니다. 그래도 굴하지 않은 여왕은 마리아 카롤리네를 스페인 왕가로 보냈으니 세딸이 페리디난트4세라는 남자와 결혼한 셈이 되지요.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는 훗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나폴리 왕가로 간 마리아 카롤리네는 추방당했으며, 파르마 공국으로 간 마리아 크리스티네는 낭비벽으로 나라를 파산 직전으로 몰고갔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 앙트와네트는 프랑스왕과 결혼해 온갖 사치를 누렸지만 1789년 프랑스 대혁명 후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어머니와 오빠가 몇차례나 사치를 부리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소용없었다.

남편의 사후 모든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날로 뚱뚱해져 나중엔 혼자 계단도 못올라갔습니다. 급기야 침대에서 몸을 돌리지도 못해 거울로 시간을 읽을 수 있는 시계까지 특별제작했지요. 이렇게 살다간 요제프2세의 뒤를 그의 동생, 즉 마리아 테레지아의 8번째 아이이자 차남인 레오폴트2세(1747~1792)가 이어받게 됩니다. 레오폴트2세는 아내 마리아 루도비카와의 사이에 12남4녀를 남기고 세상을 뜹니다.

레오폴트2세의 뒤는 장남 프란츠2세(1768~1835년), 그뒤는 다시 프란츠2세의 장남 페르디난트1세(1793~1875년)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문제가 터지고 맙니다. 페르디난트1세 황제가 정신장애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서(史書)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근친결혼의 영향으로 태어날 때부터 기형아였으며 간질을 앓고 있었다. 얼굴은 일그러지고 입은 비뚤어졌으며 말을 조리있게 하지 못했다. 계단을 오를 때 하인 둘이 부축해야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를 살피면 유독 정신장애나 아랫턱이 삼각형처럼 뾰쪽하게 튀어나온 형태, 너무 두툼한 아랫입술이 신체적 특성으로 나옵니다. 황위를 보존하기 위해 잦은 근친결혼을 했던 폐해였다는 분석입니다. 페르디난트1세가 남긴 일화 중 우리 수제비와 비슷한 '덤플링'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황제가 농부의 집에 들어가 덤플링을 먹으려다 주변에서 말리자 "나는 황제니까 덤플링을 먹을꺼다"라고 떼를 썼다는 이야기지요. 페르디난트1세의 아내, 즉 마리아 안나 폰 사보이(1803~1884년)는 비엔나의 궁전에서 남편을 처음 본 순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희생양'이 됐습니다. 하지만 운명에 순응한 그녀는 황제와 오누이처럼 지냈지요.

황제의 삼촌들이 ‘침실에서 여자와 해야할 일’을 자세히 알려줬지만 ‘사랑의 수업’은 성공한 적이 없었습니다. 황후가 아니라 궁전에서 병자(病者)를 지키는 간병인이 된 마리아는 끝까지 장수한 황제곁을 지켰습니다. 왕가는 끝내 황제의 퇴위를 종용하고 대권은 페르디난트1세의 동생 프란츠 카를대공(大公)의 장남 프란츠 요제프에게 넘어가지요. 페르디난트1세-프란츠 카를대공은 프란츠2세 황제의 장남과 3남이었습니다.

역사를 짚은 까닭이 있습니다. 형 페르디난드1세로부터 황위를 받지못하고 아들에게 넘긴 프란츠 카를대공의 아내 ‘바이에른의 소피(1805~1872년)’를 등장시키기 위해서지요. 그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소피의 남편 프란츠 카를대공은 ‘내버려두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무 생각도 하지않는 남자’였습니다. 오로지 자식낳는 것을 목표로 한 소피는 온천부터 수백가지의 비방(祕方)을 따른 뒤 마침내 아이를 낳습니다.

이 여자가 바로 소피 대공비다. 자식 교육에 집착한 그녀는 결국 며느리인 씨시와 갈등을 빚고 이것은 제국이 멸망하는 한 원인이 된다.

첫 아이를 낳을 때 그의 주치의는 베토벤을 살려내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은 말파티 박사였습니다. 앞서 두차례 유산한 소피를 위해 박사는 8주동안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임산부를 감금하는 극약처방을 내렸습니다. 답답한 나머지 딱한번 극장에 갈 때도 극장좌석까지 가마를 썼을 정도였지요. 이런 정성 끝에 소피는 1830년 8월18일 마침내 아들 프란츠 요제프 카를을 낳습니다. 훗날 프란츠 요제프1세 황제가 세상에 나온 겁니다. 늙은 황제 프란츠1세는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아이의 방에 하인 9명을 배치했고 젖먹이가 외출할 때는 6필의 말이 끄는 마차와 북을 치도록 명했습니다. 행인들은 이 아기가 지나갈 때마다 정중히 인사를 해야했습니다.

소피는 계속 임무를 완수했지요. 1832년 둘째 왕자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1833년 셋째 왕자 카를 루드비히를 낳은 겁니다. 65세의 프란츠1세 황제는 귀여운 며느리에게 어떤 여성보다 더 큰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앞서 말했듯 소피는 자기 남편의 형 페르디난트1세가 마리아 안나 폰 사보이와 결혼하자 긴장했습니다. 혹시 아들이라도 태어나면 자기의 모든 고생이 수포로 돌아갈 판이었습니다. 소피는 모든 수단을 강구했습니다. 먼저 페르디난트1세의 시의(侍醫)들에게 달려가 그가 자식을 절대 낳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받은 뒤 당시 실권자 메테르니히와 결탁한 겁니다. 노회한 수상 메트레니히는 소피의 결의와 목표가 뭔지 금세 알아챘지요.

소피는 무능한 자기 남편에게 돌아갈 수도 있었던 황위를 빼앗아 장남에게 줍니다. 미래의 황제를 위해 소피는 무서운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수업은 주 50시간, 4개 언어에 군사훈련도 어린 아들에게 시켰습니다. 수상 메테르니히가 정한 방침에 따라 어린 프란츠 요제프 카를은 공병대에서 일하다 실신하기도 했지만 어머니 소피는 모든 수업시간에 엄격한 여 판사처럼 참석해 철학과 언어와 종교에 대한 지식을 집어넣었습니다.

하지만 이 집요했던 모성은 아들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지요. 큰아들 프란체 요제프1세의 아내와 시어머니 소피는 갈등을 겪었고 그 결과 며느리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암살당합니다. 아들은 평생 홀아비로 늙었지요. 소피의 둘째 아들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황제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대서양을 건넜지만 반도들에게 사형되고, 둘째 며느리 샤를롯데는 정신병자가 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맘먹는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녀의 말로였습니다.

벨베데레 궁전의 입구다. 이곳에는 클림트 등 유명화가의 작품들이 전시된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비엔나 오페라의 정면이다. 밤이 되면 오페라 주위에는 관람객들과 암표상으로 붐빈다.
비엔나 오페라의 내부 모습이다.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귀족들은 오페라를 즐기며 로맨스를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