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들에게 에르메스는 프랑스 최고급 브랜드의 대명사다. 눈 돌려 국내 미술계로 가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에르메스는 2000년부터 15년째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제정해 한국 작가를 지원하고 있다. 그간 김범·서도호·박찬경·구정아·김성환 등 현재 한국 예술계를 이끌어 가는 스타 작가들을 배출하면서 '이중섭 미술상' 등과 함께 국내 주요 미술상으로 자리 잡았다.
"'미술상' 자체가 우리의 해외 문화 후원을 상징하는 말로 통용돼요. 파리 사무실에서도 '프리(prix·상을 뜻하는 프랑스 단어)'라고 안 불러요. 전 직원이 한국 발음으로 '미술상(Missulsang)'이라고 말하죠." 18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2014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개막식 참석차 방한한 카트린 츠키니스〈사진〉에르메스재단 이사가 웃으며 말했다. '미술상'이라는 세 음절 한국어를 '안녕하세요'보다 먼저 배운 듯 자연스레 발음했다. 미술상을 비롯해 에르메스의 모든 문화 후원을 담당하는 에르메스 재단의 실무 총괄 책임자다.
에르메스 재단이 미술상을 제정해 작가를 지원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일본 도쿄, 싱가포르, 스위스 베른, 벨기에 브뤼셀 매장에서 갤러리를 운영할 뿐이다. 그는 "1997년 에르메스가 한국에 진출할 당시 신세대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국 현대 미술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미술상을 제정했다"며 "매년 베니스 비엔날레 같은 주요 국제 전시는 빠지지 않고 가는데 한국 작가들의 활약이 점점 커지고 있어 뿌듯하다"고 했다.
이 미술상은 중견 작가보다 젊은 작가 발굴에 초점을 둔다. 츠키니스 이사는 "에르메스 재단은 유명 미술 작품을 한 점도 사들이지 않았다"며 "신진 작가가 창의적인 작품으로 사회에 참신한 영향을 줄 수 있도록 돕는 게 우리 역할이라 믿는다"고 했다.
재단은 이런 취지를 더욱 살리기 위해 내년부터 수상자 선정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기존에는 최종 후보 3팀을 선발한 뒤 전시를 거쳐 한 명을 최종 선정, 상금(2000만원)과 상패를 줬다. 이날 시작된 '2014 미술상 전시'에는 슬기와 민, 장민승, 여다함 등 후보 작가 3팀의 작품이 전시됐다. 내년 2월 이 가운데 수상자가 결정된다.
츠키니스 이사는 "내년부터는 수상자 1명을 바로 선발해, 파리에서 4개월 동안 레지던스(예술가 작업실 입주)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기회를 주고,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프랑스 현지 예술가가 멘토가 돼 곁에서 도움을 줄 계획"이라고 했다.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주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세계를 접해서 더 멀리 뻗어갈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어요. 여러 요리를 맛봐야 풍부한 미감을 기를 수 있듯이."
재단의 임무가 에르메스가 가진 호화·사치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럭셔리 최고봉, 상류사회 전유물 같지요? 그런데 아세요? 1만1000여명 에르메스 직원 중 50%가 장인(匠人)입니다. 에르메스는 1837년 '훌륭한 오브제(물건)'를 만들자는 일념에서 시작했어요. 그 정신이 우리의 예술 후원으로 이어지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