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코트 감독 '엑소더스 : 신들과 왕들(Exodus: Gods and Kings)'이 모처럼 두 눈을 즐겁게 해 줍니다. 1956년작인 세실 B.데밀 감독의 '십계(十戒)' 가 시각적 스펙터클로 당대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것과 똑같이, '엑소더스…'는 같은 성경 속 이야기를 리들리 스코트 식으로 다시 해석하고, 최첨단 디지털 시각 효과를 동원하여 웅장한 영상으로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 대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관람평이 없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드라마가 빈약하다'고 합니다. '고뇌하는 모세'만 부각시키려다 람세스, 조슈아 등 다른 인물들의 존재가 거의 부각되지 않았고 모세와 아내 십보라와의 사랑 이야기도 찾기 어렵다고 아쉬움을 표합니다. 어느 네티즌은 '중반까지 지루해서 못 견뎠다'고 합니다. 때론 우유부단한 이 영화 속 모세의 모습은 성서의 기술과 다르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일정 부분 합당한 지적들입니다. 그러나 경이로운 비주얼 등 '스펙터클 영화'로서의 성취를 종합적으로 감안한 평가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영화'라고 하여도, 그 스펙트럼은 다양합니다. 보는 사람의 온 정신을 빨아들이며 끝내 눈물을 쏟게 하는 감동의 드라마를 핵심으로 삼는 영화도 있고, 아름다운 음악이 차고 넘쳐 눈 감고 감상해도 많은 것을 건지는 영화도 있습니다.'엑소더스…'는 스크린 속에 큰 스케일로 재현한 수천 년 전 세상 속으로 잠시 빠져 들어 갔다가 나오는 영화라고 봅니다.
'엑소더스…'의 영상이 볼만하니 드라마가 시원찮아도 봐 주자는 게 아닙니다. 가지를 다 쳐내고 뼈대만 남긴 듯한 드라마도 감독의 과오라기 보다는 시각적 스펙터클을 상대적으로 더 부각시키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중요한 잣대는 '시간과 돈을 투자한 만큼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는 영화인가'입니다. '엑소더스…'는 충분히 볼 만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사촌 형제로 자랐지만 결국 적이 되어 버리는 모세(크리스천 베일)와 람세스(조엘 에저튼)의 대결이라는 구도를 유지합니다. 지옥같은 이스라엘 노예들 삶에 분노한 끝에 억압받던 40만 이스라엘 인들을 이끌고 자유를 찾아 홍해를 건너 탈출하는 모세의 위대한 발걸음을 재현합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성경 속 이야기, 게다가 이미 '십계'라는 추억의 명화(名畵)가 많은 사람들 마음 속에 남아있는 상황에서 다시 만든 '출애굽기' 영화라면, 이야기보다 영상에 집중하는 것은 자연스런 선택입니다.
감독은 "이집트 문화를 최대한 비슷하게,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모습으로 그려내고 싶었다" 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불가능'했으나 지금은 가능해진 최첨단 디지털 효과를 염두에 둔 말로 들립니다. 이 말 그대로 '엑소더스…'는 '십계'가 만들어질 때는 제대로 빚어낼수 없었던 장면들만 재현합니다.
초반부터 매우 디테일하게 재현하는 고대 국가 풍경의 완성도는 확실히 과거의 영화와는 선을 긋습니다. 황금을 덕지덕지 두른 듯 호사의 극을 달리는 이집트 권력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 시각 체험입니다.
게다가 '엑소더스…'는 어마어마한 고대 도시의 전경들을 눈높이로만 비추는 대신, 하늘 꼭대기를 날아가며 바라본 듯 수시로 부감 샷으로 훑어댑니다. 실존하는 왕국을 항공기로 촬영한 듯한 느낌마저 주는 웅장무비한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옛 '십계'에선 모세가 바닷물을 쩍 갈라지게 만들어 길을 내는 이른바 '모세의 기적'이 대표적 명장면이었지만 '엑소더스'의 압권은 클라이맥스에서 이어지는 끔찍한 재앙의 장면들입니다. 야훼가 이집트에 저주를 내려 빚어진 재앙들이 정말로 카메라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듯한 실감으로 객석을 덮칩니다.
거대한 악어들은 미치광이처럼 달려들어 사람을 물어뜯고, 시뻘겋게 변한 강물엔 물고기들이 허연 배를 내놓고 떠올라 죽습니다. 도시 전체에 수십 만~수백 만 마리의 개구리떼나, 메뚜기떼, 파리떼들이 달려들어 아비규환을 이룹니다. 돌덩이처럼 큰 우박이 쏟아집니다.
홍해를 건너는 장면도 이번엔 현실감 있게 바뀌었습니다. 바다 가운데에 마술처럼 골이 패이고 길이 쫙 열리는 식이 아니라, 썰물처럼 일시적으로 바닷물이 빠져나가고 수백 만 이스라엘 인들이 바다를 가로질러 이동합니다. 그리고 다시 거대한 밀물이 덮칩니다.
이런 장면들을 만들기 위해 1500개의 컴퓨터 그래픽 영상이 동원됐고 2000억원의 돈이 투입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돋보이는 건 돈보다는 시각적 상상력입니다. 이스라엘 인들을 쫓던 람세스의 군대가 산길 붕괴 사고로 고꾸라지고,수십 층 건물 높이의 바닷물이 군인들을 덮치는 장면들이 수천 년 전 세상에 카메라를 댄 듯 극사실적으로 표현됩니다.
이 영화 속 웅장한 장면들 중엔 수많은 생명체들이 꼬물대는 장면들이 유달리 많습니다. 수십 만 마리는 됨직한 개구리 떼가 도시를 덮쳐 살겠다고 발버둥치고, 다른 장면에서는 이스라엘 인들 수십 만 명이 개미떼 처럼 벌판을 가로지릅니다. 감독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바글바글 몸부림치는 동물 떼나 인간의 떼가 결국은 마찬가지 아니냐는 느낌도 줍니다.
'십계'가 그랬던 것처럼 '엑소더스…'는 시각적 놀라움을 빚어내는데 무게 중심을 둔 영화입니다. 1950년대~1960년대는 '십계' '벤허' '왕중왕' 등 고대를 배경으로 삼은 스펙터클한 영화들의 전성기였습니다. 오늘의 일상과 완전히 다른 까마득한 옛 세계를 스크린에 펼친 이런 영화들은, 자질구레한 일상에 찌든 모든 사람들에게 평범한 영화에서 맛보기 어려운 울림, 혹은 카타르시스를 안겼습니다. '엑소더스…'는 그런 스펙터클 무비의 디지털적 복원인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