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에 수백년치 달력이 담겨 있는 편리한 세상이 오면서 달력이 불과 몇년 새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예전 연말에는 기업과 대학, 관공서와 은행이 배포하는 달력이 마냥 반가웠지만, 요즘은 굳이 무료 달력을 찾을 것도 없이 1000원짜리 한장이면 어디서든 벽걸이 달력 구입이 가능하다. 꼭 같은 달력이 러시아 대륙 동쪽 끝이자 일본 홋카이도 바로 위의 작은 섬 사할린에선 눈물겹도록 소중한 존재가 된다. 일제강점기 15만 조선사람이 강제 징용된 이곳에는 한국인들보다 더 한국의 옛 문화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사할린 한인 3만명, 특히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태어난 한인 1세대 1000여명이 4대째 음력(陰曆)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음력이 담긴 한국의 달력은 이들에겐 한민족 고유의 관혼상제와 농사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끈이다.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20세 때 이곳으로 강제 동원된 김윤덕(91) 할아버지는 "어머니 제사, 아내 제사, 내 생일 모두 음력으로 평생 지내왔을 뿐 아니라 초복에는 배추를 심고, 중복에는 무를 심는 농사법도 부모님에게 다 음력에 맞춰 배워왔다"고 말했다.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엄순자(75) 할머니도 "집 지을때 좋은 날을 계산하고, 윤달이 있을땐 화장실 수리하는 것을 시어머니가 알려주셨다"며 "우리 모두 죽고 나면 지금 아이들은 음력 안 보는 사람도 많겠지만 우리 민족이라면 음력은 꼭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지난 1월 16일 지구촌동포연대에서 보내준 ‘2014 사할린 한인을 위한 달력’을 받고 사할린의 한인들이 기뻐하고 있다. 이 달력에는 양력과 함께 음력이 표기돼 있으며, 러시아어로 한국 명절과 기념일 등이 적혀 있다.

음력을 사용하지 않는 러시아 사회 속에서 사할린 한인들은 힘겹게 음력을 지켜왔다. 역법(曆法)을 아는 노인들이 종이에 손수 달력을 그리면, 젊은 사람들이 이를 베껴서 사용했다. 수제 달력은 1세대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면서 사라졌다. 지금은 사할린 내 유일한 한글신문인 새고려신문에서 해마다 첫 발행 신문에 게재하는 열두달치 음력 날짜가 음력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정보다. 김 할아버지는 "이 신문을 오려서 붙여두고 1년 내내 보면서 음력을 챙기지만 신문은 크기가 너무 작고 몇달 지나면 너덜너덜해져 알아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이웃 누군가가 고국에 갈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한국 달력을 부탁한다. 2006년부터 매년 한 번씩 사할린 한인들을 방문해 생필품 지원 등의 사업을 벌이고 있는 지구촌동포연대도 가장 먼저 받은 부탁이 '달력'이었다. 지구촌동포연대 이은영(37) 간사는 "처음엔 그 흔한 달력이 왜 필요하신가 싶었는데 사연을 알고 그 다음 해 달력을 가져가자 어르신들이 쌀이나 생필품보다 달력을 훨씬 좋아하시더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달력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기업이나 관공서에서 달력을 얻거나, 인터넷을 통해 한 부씩 기부받아 항공 수화물로 가져갔다. 그러나 무게 제한 때문에 한 사람이 50부밖에 가져갈 수 없었고, 매번 달력을 구걸하는 것도 일이었다.

2013년부터 직접 달력을 만들기로 했다. 러시아 달력을 기본으로 음력 표기를 더했다. 사진작가 임재천씨가 한국의 방방곡곡을 다니며 찍은 고국의 풍경을 페이지마다 담았다. 글씨는 굵고 크게 하고, 우리 문화를 잘 모르는 3·4세도 사용할 수 있게 우리의 명절, 국경일 기념일 등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넣었다. 첫해에는 시민 1300명이, 두 번째 해에는 시민 2600명이 성금을 냈다. 부족한 금액은 재외동포재단과 아시아나가 후원했다.

지난해 달력 1000부를 처음 제작했고, 올해도 1500부를 만들었다. 지난 1월 달력을 만들어 보낸 뒤, 사할린 노인정을 방문했을 때다. 어르신들은 "얼마나 이쁘게 만들었는지, 한국에서 이런 거 해서 보내줬다고 러시아 친구들에게 자랑했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이 간사는 "그동안 타지에서 소수민족으로 설움을 받고 산 이들에겐 이 달력이 고국에서 주는 선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4일 배송을 시작한 2015년 달력은 지난 8일 사할린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