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타계한 우칭위안(吳淸源) 九단은 엄지손가락이 다른 손가락들과 반대 방향으로 휘어 있다. 양쪽 손이 모두 그렇다. 어린 시절부터 합본(合本)한 무거운 바둑책을 들고 하루 종일 기보를 놓아본 탓이다. 손이 저려오면 다른 손으로 바꿔 들어가며 그런 식으로 평생을 공부했다. 식사와 취침 시간 외엔 자세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칭위안은 입버릇처럼 "천재란 없다"고 말해왔다.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켜 천재라고 할 때면 "그저 남들보다 공을 좀 더 들였을 뿐"이라고 답하곤 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이 세계를 석권할 때도 "한국 기사들이 더 열심히 노력한 결과"란 분석으로 일관했다. 당시 천하를 석권하던 이창호에게만은 '천재' 소리를 이끌어내려던 한국 기자들의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우칭위안은 100세가 된 올해 초 제38기 기성전 도전기 현장을 찾아 주변을 놀라게 했다. 우칭위안 왼쪽은 기성 이야마, 오른쪽은 도전자 야마시타.

우칭위안의 동문 사제(師弟)인 조훈현(61) 九단이 전해주는 에피소드도 고인의 노력과 집중력을 엿보게 한다. 우칭위안이 어디를 가나 바둑에만 골몰하자 스승 세고에(瀨越憲作)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른 제자들에게 우칭위안을 데리고 야구 관람을 하고 오라고 지시했다. 우칭위안은 그러나 운동장 안에서도 그라운드 아닌 하늘만 쳐다봤다. 그곳에서도 바둑 수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

한국 바둑의 개척자로 지금은 고인이 된 조남철(1923~2006) 九단은 우칭위안의 신포석과 관련해 "주역(周易)에 대한 깊은 공부의 소산"이라고 했다. 조 九단이 생전 펴냈던 회고록 '바둑에 살다'에도 우칭위안과의 일화가 나온다.

"해방 전 내가 일본기원에 적(籍)을 두고 있을 때부터 우칭위안은 같은 이국인이란 이유로 나에게 잘 대해줬다. 64년 초 그의 시골집을 찾아가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한 적이 있었다. 그날 그의 노모는 '양쯔강 범람 때 갓 태어난 우칭위안을 궤짝 위에 올려놓고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는데 천행으로 살아남았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우칭위안의 투철한 실험 정신은 그가 19세였던 1933년 슈사이(秀哉)의 환갑 기념 대국 때 사건으로 대표된다. 당시 바둑계 최고 어른을 맞아 우칭위안은 대담하게도 삼삼(3三)·화점·천원으로 이어지는 포진을 들고나왔다. 슈사이가 "무례한 행동"이라고 격노하면서 우칭위안은 한동안 고초를 치러야 했다. 김인(71) 九단은 "우칭위안 선생은 '○○류'라는 분류를 초월한 한 시대의 혁명가였다. 나도 젊었을 때 선생의 기보가 최고의 교과서였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한동안 우칭위안의 제자 생활을 했던 여제(女帝) 루이나이웨이(芮乃偉·50)는 스승에 대해 "선생님은 굉장히 철저하면서도 자상한 분"이라고 말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