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투자은행인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을 시발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도 벌써 6년이 지났다. 전 세계적으로 1930년대의 대공황이 다시 도래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할 정도로 당시의 상황은 매우 엄중하였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나라도 당시 커다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환율이 급등하고 주가가 반 토막 났으며 외환보유액도 2008년 3월부터 11월 사이에 약 6백억 달러가 감소하였다. 우리나라 경제는 2008년 10월 30일 한미 통화스왑 체결로 미국의 보호막이 드리워진 이후에야 겨우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김학렬(金學烈) 전 한국은행 국제협력실장이 쓴 ‘‘금융강국’ 신기루’(학민사)는 먼저 한국경제가 2008~2009년에 외환위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된 원인이 뉴욕 발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통념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그 논거로 당시 모든 신흥시장국들이 우리나라처럼 환율 급등 등의 어려움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는 객관적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각국 환율의 최고치를 2008년 8월말 환율과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원화의 절하율은 31.3%에 달하였으나 싱가포르,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상당수의 신흥시장국들은 통화 절하율이 10% 이내에 그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경제가 2008~2009년에 이들 신흥시장국들과 달리 크나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이 책은 그 원인으로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공통적으로 추진하였던 금융강국 정책을 지목하고 이들 정책이 당시 한국경제에 미친 영향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사실상 2008~2009년 한국경제가 겪었던 위기의 원인을 본격적으로 천착한 최초의 책이다. 미국의 시각에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다룬 여타 책들과 차별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꼭 같이 연 7%의 성장률 목표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은 높은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신성장동력의 확보가 긴요하였다. 이때 일부 경제 관료들과 관변 경제학자들은 금융산업이야말로 한국 경제의 신성장동력임을 설파하였으며 두 대통령도 이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정부는 집권 초인 2003년부터 동북아 금융허브 전략을 강도 높게 추진하였으며 5년 후 집권한 이명박 정부도 이를 계승하여 금융중심지 정책을 야심차게 추진하였다. 금융강국 건설을 위한 정부의 정책을 금융계가 적극 수용하여 활발한 영업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첫째, 정부는 금융기관들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대형화 시책을 추진하였으며 은행들은 대형화를 위해 치열한 자산경쟁을 벌였다. 금융감독 당국이 직접 나서서 대형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대형화가 되지 못하면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에 따라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몸집을 불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인수합병에 나서는 한편 필사적으로 대출경쟁을 벌였다. 이 책은 당시 은행들이 몸집을 불리기 위해 벌였던 치열한 영업대전과 이를 진두지휘한 당시 은행장들의 저돌적인 면모를 박진감 넘치게 파노라마처럼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책 읽는 재미를 배가시켜주고 있다. 은행들의 자산경쟁에 주도되어 국내 은행들의 총자산은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연평균 10.4%씩 증가하여 같은 기간중 우리나라 명목 GDP의 연평균 성장률 6.1%를 크게 웃돌았다.

우리나라 은행들이 수년간 외형 확대경쟁에 몰두해온 결과 은행들은 비정상적인 자금운용 및 취약한 자금조달구조를 지니게 되었는데 그 성적표는 바로 은행들의 예대율 급등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예금은행의 예대율은 2002년의 92.1%에서 2007년에는 135.5%로 급등하였다. 은행들은 예금으로 조달하지 못한 부족한 대출재원을 CD 및 은행채 등 시장성 수신에 의존함에 따라 은행의 자금조달 구조가 매우 취약하게 되었다. 이처럼 국내 은행들의 예대율이 오랫동안 100%를 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융감독 당국은 금융강국 건설을 위해 규제완화에 몰두한 나머지 사실상 수수방관하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둘째, 국내은행들이 원화대출 부문에서 전개하였던 자산경쟁은 2006년부터 외화영업 부문으로 확대되었다. 은행들은 총자산 증대를 위해 조선업체 등 수출업체와 자산운용업체가 발행한 선물환 매입을 확대하는 한편 외화대출을 늘리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은행들은 선물환 매입에 상응한 외환포지션 조정을 위해 해외에서 단기 외화자금을 차입한 후 이를 외환시장에서 처분하여 원화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은행들의 선물환 매입은 결과적으로 총자산 증대에 기여하는 효과가 있었다.

2007년 11월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이 선물환 취급 규모가 큰 6개 은행을 대상으로 '선물환시장 수급 불균형'에 대한 공동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은행들이 수출기업들로 하여금 선물환을 매도하도록 집요하게 펼쳤던 유인 작전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곧 은행들은 외환수수료 증대 및 시장점유율 확대 등을 위하여 2006년 1월부터 2007년 9월까지 업체 방문 및 연수·세미나 개최 등을 통해 마케팅을 강화하였다. 이 기간 중 조사대상 6개 은행은 총 2,453개 업체를 평균 4.4회 방문하여 2007년 환율이 800원대 중반까지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하루 속히 선물환 매도를 통해 환위험을 헤지할 것을 유인하였다.

은행들이 조선업체 등 수출업체와 자산운용사 등이 매도한 대규모의 선물환을 매입하고 이에 따른 외환포지션 조정을 위해 해외에서 단기 외자를 도입함에 따라 단기외채가 급증하였다. 2006~2007년중 우리나라 외채는 총 1,720억 달러 증가하였는데, 이 중에서 조선업체 및 자산운용사들의 선물환 순매도와 관련되어 늘어난 외채가 1,060억 달러에 달하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국제금융계에서는 국내은행들의 높은 예대율 문제와 우리나라의 과다한 단기외채 문제를 한국경제의 양대 아킬레스건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셋째, 정부는 우리나라를 자산운용업에 특화된 금융허브로 만들기 위해 2005년 7월 1일 한국투자공사(KIC)를 설립하였다. 설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KIC는 정부가 외환보유액을 헐어 넘겨준 외화자금 20억 달러로 메릴린치 지분투자에 나섰다가 투자원금의 절반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메릴린치에 대한 부실투자는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는 조급증이 빚은 결과이자 재경부가 서둘러 동북아 금융허브 전략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불상사였다. 재경부장관이 위원장으로 있는 동북아 금융허브위원회는 KIC가 대체투자에 나설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KIC가 대체투자에 나설 것을 결정하였고 KIC는 기관의 활로를 찾기 위해 이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KIC의 메릴린치에 대한 투자 실패가 결과적으로 한국이 외환보유액의 수익성 증대에 혈안이 되어 있으며 이를 위해서라면 위험한 투자에 기꺼이 나설 수 있는 나라라는 인상을 국제금융계에 심는 데에 기여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국제금융계의 인식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국내외에서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공식적으로 한국 정부가 발표하는 것만큼 온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낳게 하는 불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넷째, 이명박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산업은행을 세계 유수의 투자은행으로 육성한다는 목표를 수립하고 이를 추진하였다. 2008년 산업은행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여파로 위기에 봉착한 리먼 브러더스를 인수하려고 통 크게 달려들다가 막판에 가서야 당국에 의해 제지당하였다. 산업은행의 리먼 브러더스 인수 시도는 당시 이명박 정부가 출범 초부터 글로벌 투자은행을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전력투구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책은 국내자료는 물론 미국에서 공개된 리먼 브러더스 측의 자료들을 통해 이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이명박 정부가 리먼 브러더스 서울지점 대표를 산업은행장으로 임명한 인사도 산업은행의 리먼 브러더스 인수를 염두에 두고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기획된 것임을 고발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KIC의 메릴린치 지분 투자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의 리먼 브러더스 인수 시도는 모두 동북아 금융허브 구축 및 ‘글로벌 플레이어’급 금융기관의 출현이라는 정부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기업이 동원된 대표적인 사례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2008년 파산한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 건물 앞에서 미국민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밖에도 이 책은 금융강국 건설을 위한 정책 추진과정에서 금융감독 당국이 규제완화에 치우친 나머지 금융기관 건전성 감독에 실패하였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금융감독 당국은 다른 나라 금융기관들의 지점 및 사무소가 우리나라에 둥지를 많이 틀게 하려면 금융 규제가 선진국 수준으로 완화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규제완화를 위해 전력투구하였다. 거의 매년 정기적으로 금융감독원이 실시하여 오던 대형 금융기관들에 대한 종합검사 주기도 2~3년으로 바꿨을 정도였다. 이 책은 당시 금융 감독당국의 수장이 한국의 감독 규제수준에 대해 ‘금융기관들을 가볍게 툭 건드리는 정도(light touch regulation)’로 낮아진 결과, “영국 등 금융허브 국가의 규제수준에 근접해 가고 있다”고 자랑하기까지 했던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이 책은 재경부가 2007년 1월 15일 발표한 '기업의 대외진출 촉진과 해외투자 확대 방안'이 당초 의도했던 정책 효과는 거두지 못한 채 외채 증대를 초래하였음을 비판하고 있다. 이 조치로 국내 거주자들이 투자신탁 및 투자회사가 설정한 해외 주식형 펀드에 투자할 경우 양도차익에 대해 3년간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됨에 따라 해외 증권투자가 급증하였다. 더욱이 이에 맞추어 자산운용사들이 환 헤지가 포함된 투자상품을 주로 판매함에 따라 자산운용사들의 선물환 순매도액이 큰 폭으로 늘어났으며 이는 단기 외채의 급증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해외포트폴리오 투자 활성화 조치는 정책 타이밍 면에서도 적합하지 않았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경상수지 흑자폭이 감소하고 있었고 비외채성 자금인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이 대거 유출되고 있었던 데다 자본수지 흑자의 대부분은 외채성 자금인 외국인 국내채권투자 및 단기외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더욱이 정부는 외국자본의 유입에 대응하는 방안으로서 국내 거주자의 해외투자 촉진 정책이 갖는 한계를 사전에 감지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이 책은 그 논거로 2008년 9월 리먼 사태 이후 우리나라에서 외국 자본이 유출될 때 우리나라 국민들의 해외 주식투자 자금은 전 세계적인 주가 폭락 때문에 회수되기 어려웠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에는 저자가 30년 이상 재직한 한국은행에서의 실무 경험과 대학에서의 연구, 강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딱딱한 경제 이야기이지만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차분하고 생생하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나가는 것이 장점이다. 따라서 이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이 책을 따라 읽어가노라면 국민 누구나 꼭 알아둬야 할 정부 정책들을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무언가에 홀려 ‘금융강국 대한민국’의 신기루를 좇았던 허망한 꿈과 가혹한 현실에 대해서도 냉철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난 후 더욱 궁금해지는 것은 후진적인 한국의 금융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이 책의 저자는 시간이 다소 걸릴지라도 금융산업이 자생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정부와 온 국민이 기다려 줄 줄 아는 지혜가 긴요하며 우선 금융기관이 전문적인 금융인들에 의해서 경영될 수 있도록 고질적인 낙하산 인사 관행이 없어져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최근 전개되었던 국민은행 사태와 관련해서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라고 하겠다. 아울러 금융산업도 엄연히 서비스산업이므로 산업정책 차원에서 육성해 나가야 할 필요성이 있지만 금융산업의 특수성과 우리나라가 기축 통화국이 아닌 데에서 오는 태생적 한계(original sin)를 충분히 감안하는 섬세함이 있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자 소개
김학렬(金學烈) 연세대 객원교수 ky1611@naver.com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8~2008년 한국은행에서 근무하면서 조사제1부 국제수지과장, 워싱턴 주재원, 금융경제연구소 수석연구역 등을 거쳐 비서실장, 국제협력실장, 경제교육센터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국은행 재직 중 청와대 경제비서실 행정관으로 1년간 파견 근무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객원교수로 학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서울여대, 성균관대, 서울시립대 등에 출강한 바 있다.
저서로는 '금리전쟁'(2009년, 학민사 간)과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역량"(1998년,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소) 등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