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과 속이 다르다'는 게 배우에게는 칭찬일 수 있다. 짐작했던 이미지가 실제와 빗나갈 때의 쾌감이 바로 연기의 맛이니까. '패셔니스타' '워너비 스타일'로 각광받던 고준희가 '여배우'로 돌아왔다. 영화 은 19금 에로의 외피를 두른 성장담,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2006년 고현정과 고준희가 자매로 출연했던 드라마 (MBC)의 한 장면이다. 지하철을 탄 고준희는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누구지?" 극 중 모델 역할을 맡았던 그는 당시 무명 시절을 지나고 있었다. 용기를 내 다가온 학생, 고준희에게 묻는다. "혹시… 농구 선수 아니세요?" 고준희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니. 누나 배구 선수인데?!"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서는 학생과 씨익 하고 웃는 고준희의 모습. 자신을 몰라주는 세상에 주눅 들지 않고 도리어 농담을 던질 정도로 당당한 모습이 인상적이던 그는 신인 김은주였다. 고현정에 못지않은 존재감으로 주목받은 그는 안정적인 연기와 신선함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작품의 여운이 강해 이름도 김은주에서 고준희로 바꾸었다. 이 주목은 신인 김은주에게 행운이자 독이었다. 당시 역할이 모델이어서였는지 패션 관련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줄을 이었다. 배우로 인정받고, 연기로 승부하고 싶었던 그는 차라리 공백을 택한다.
대중이 바라는 역할과 스스로 가고 싶던 길이 부딪치던 시절, 질풍노도의 20대 초반을 지나며 그가 깨달은 한 가지는, '욕심을 부린다고 일이 풀리는 것이 아니니, 지금 주어진 일부터 즐겁게 하자'였다. 패션이나 헤어스타일로 주목받는 것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운동선수로 오해받을 만큼 큰 키도 장점으로 소화해냈다. 그렇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니 현장이 즐거워졌다. (tvN)부터 선보인 '고준희 단발머리'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고, '고준희 스타일'은 완판 아이템이 됐다. 그리고 찾아온 작품이 이었다. 안 그래도 (SBS)와 (SBS) 등 연달아 '쎈' 작품을 했던 터라 부드러운 작품을 하고 싶던 참이었다. 은 부드러울 뿐 아니라 뭉클했다.
의 시나리오에는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부딪혀 좌충우돌하는 우리의 청춘이 담겨 있었다. 에로영화만 270편을 찍은 박범수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던 그의 꿈은 이번 영화로 이루어졌다.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해 몸을 불사르며 달려온 배우 윤계상이 박범수 감독의 페르소나인 박정우 역을 맡았다. 그는 영화를 찍으면서 스스로 "치유받았다"고 했다. "(사람들의) 편견이 사실이 될까봐 두려웠다"는 고백에서는 박정우가 아닌 윤계상으로 울컥했다. 고준희도 마찬가지다. 잘나가던 아역 스타였지만 이제는 잊힌 배우인 정은수 역을 맡은 고준희는 은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 특히 정우와의 사랑과 톱스타라는 위치 사이에서 갈등할 때 그의 소속사 대표가 던진 "너 여배우가 되고 싶었던 거니, 여배우로 살고 싶었던 거니?"라는 질문은 두고두고 마음에 파문을 남겼다. 고준희는 처음엔 여배우가 되고 싶어 뛰어들었지만, 지금은 여배우로 사는 것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여배우가 되는 일과 여배우로 사는 일 사이에서
'배우'도 하나의 직업일 뿐 다른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겼지만, '여배우로 사는 것'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한 학생복 회사의 모델로 발탁되면서 연예계에 입문한 고준희는 20대가 되어서야 호된 사춘기를 앓았다. 작품은 하고 싶은데 원하는 역할은 들어오지 않고, 일은 하고 싶은데 일이 없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게 불안한 미래를 견디고 나니 작품 하나가 소중해지는 순간이 왔다. 평생 할 일인데 한 작품에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했다. 은 시나리오가 좋았기에 영화 를 마치고 1주일도 되지 않아 합류했다. 신인 박범수 감독의 입봉작으로 주요 소재 역시 '에로'지만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저는 오히려 남, 여의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꿈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좋았어요. 감독님이 에로 작품을 많이 찍으셨는데, 다른 장르를 찍었다면 고민했을 거예요. 작품 안에 감독님 이야기가 많이 녹아 있으니까 확실히 실감이 났어요. 에로영화 찍는다고 무시당할 때, 그래도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지 않느냐고 위로하는 윤계상씨에게 오정세씨가 "형은 꿈이 4대 보험이야?"라고 하는데, 이런 대사가 굉장히 현실적이잖아요. 게다가 감독님이 무척 순수하고 수줍음이 많으세요. 정우와 은수의 멜로가 아주 천천히 진행되는 것도 그런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직업은 에로 감독이지만 그의 멜로는 굉장히 순수한 거죠."
고준희가 맡은 정은수는 자칫 민폐 캐릭터로 보일 수 있는 역이다. 어릴 적 아역 스타로 잘나갔던 기억이 강해 "나 몰라요? 나 정은수예요"라고 물을 정도다. 전세 사기를 당했다는 이유로 남(극 중 박정우)의 집에 빌붙을 때나, 정우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정은수 캐스팅권'을 내밀 때도 망설임이 없다. 고준희는 은수가 좀 이상한 애이긴 하지만 이해가 된다고 했다. "아마 불안해서 더 당당했을 것"이라고.
"처음에 집에 들이닥칠 때는 계상이 오빠도 저도 '얘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너도 이상하니까) 평소 하던 대로 하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저도 스물다섯 전까지는 고민이 많았어요.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도 있었고요. 극 중 은수처럼 불안하고 외로운데 아닌 척, 괜찮은 척한 것 같아요. 본인은 알잖아요. 지금 상황을. 욕심을 부린다고 일이 풀리는 게 아닌데, 그걸 알면서도 '더 좋은 것'에 대한 욕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스물여섯부터는 좀 일을 즐기면서 다시 할 수 있었어요."
고준희가 스물여섯에 전환기를 맞았듯, 극 중 은수도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는다. 한 메이저 소속사에 캐스팅돼 단박에 톱스타가 된다. 그토록 꿈꾸던 '톱스타'였지만 감당해야 할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특히 에로 감독인 정우와의 사랑을 세상에 들켰을 때 은수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은수를 캐스팅한 소속사 대표가 묻는다. "너는 여배우가 되고 싶었던 거니, 여배우로 살고 싶었던 거니?"
"저도 스스로 되물어봤어요. 저는 여배우가 되고 싶었지, 살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사는 건 좀 힘들거든요. 사실 여배우도 다른 직업과 똑같고, 평소에는 똑같다고 생각해요. 대접받으려고 하면 좀 재수 없어져요(웃음). 직업이 화려할 뿐이죠. 평소에도 특권을 누리려고 하면 안 되죠. 여배우도 방송 안 할 때는 비슷하거든요."
고준희가 이런 태도를 갖게 된 데는 대선배들과 작업했던 영향이 크다. 데뷔작이나 다름없던 는 고현정과, 다음 작품인 는 이미연과 함께 했다. 당시 이 아우라 큰 배우들과 함께 호흡을 맞췄던 경험은 고준희의 연기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다.
"현장에서는 막내였고, 늘 배우는 입장이었어요. 선배들이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고 정말 잘해주셨어요. 저로서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죠. 현장에서 그분들이 하는 걸 보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익히게 돼요. 작품을 대하는 태도나 기운을요."
특히 는 아이돌에서 배우로 변신한 윤계상의 첫 주연 작품이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윤계상은 스물아홉이었고 고준희는 스물둘이었다. 풋풋한 신인으로 만났던 두 사람은 작품이 끝난 뒤 막역한 사이가 됐다. 서로 친한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내다 의 주인공으로 만났다.
"윤계상씨는 친한 오빠로 보면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배우로서는 전작이 워낙 센 작품들이라 이번에 밝은 작품을 하니까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오정세씨나 달환씨처럼 동료 배우들의 밝은 에너지에도 영향을 많이 받고요. 에서는 저희 둘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말랑말랑하게 만나서 좋죠. 서로 아는 게 많고 친하니까 편해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서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뒤늦게 합류했는데도 오빠가 워낙 많이 배려해줘서 바로 적응했어요. 그런 점이 많이 고맙죠."
와 사이는 윤계상과 고준희라는 배우가 '연기자'로 거듭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이었다. 대중은 윤계상을 여전히 '아이돌 출신'으로 봤고, 고준희를 '스타일 좋은 신인'으로 불렀다. 이런 수식 없이 오롯이 '배우'로 불리는 것이 두 사람에게는 숙제였다. 윤계상에게는 영화 가 지나갔고, 고준희에게는 드라마 그리고 와 이 지나갔다. 그렇게 혹독한 시간이 지난 후 숙제를 마친 두 사람이 만났다.
"처음에는 꼭 '연기파'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패션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지도 않았죠. 연기로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스타일 온(style ON)에서 패션에 대한 프로그램을 하면서 바뀌었어요. 이제는 대중이 나한테 원하는 게 뭔지를 알고, 내가 좋아하는 걸 즐기면서 하는 법도 알게 됐어요. 작품을 할 때 너무 많이 고민하지 않으려고 해요.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작품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아무리 고민해도 관객들이 어디에서 반응할지는 몰라요. 도 그런 것 같아요. 기대치가 낮다 보니 막상 보면 괜찮거든요(웃음)."
고민하면 얼굴만 까매져요, 대신 밥을 두 공기 먹죠
그럼에도 여전히 고민은 있다. 고준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단발머리'가 아니라 작품이었으면 하는 소망. 그 작품이 일지, 차기작으로 준비 중인 임상수 감독의 일지 모르지만 일단 부딪쳐보는 거다.
"혼자 힘들어하는 것보다는 빨리 잊고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게 맞아요. 혼자 끙끙대면 얼굴만 까매져요(웃음).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감사하며 일하려고 해요. 대표작에 대한 갈망은 있죠. 패션이나 스타일에 대한 관심도 감사하지만 가수는 히트곡이 있고, 배우는 대표작이 있어야 하니까요."
지금까지 고준희가 보여준 모습은 '화려하고 당당한 모습'이 많았다. 부잣집에서 자랐지만 정의감이 넘치는 캐릭터가 나 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와 부터는 조금씩 다른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결혼에 대한 고민과 미래에 대한 고민, 그 또래 여성들이 할 법한 이야기들이 고준희를 통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작품을 고를 때 제 모습이 조금이라도 담겨 있어야 선택하게 되는 거 같아요. 예전에는 외모 콤플렉스도 있었어요. 근데 좀 내려놨어요. 이제 와 키를 줄일 수도 없고, 도시적인 이미지를 버릴 수도 없으니까요. 화려한 캐릭터라도 잘해내자고 생각했죠.
그러다 보니 조금씩 새로운 역할들이 주어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뭇 여성이 고준희를 떠올릴 때 가장 궁금한 점은 '몸매 관리법'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티셔츠 하나만 입었음에도 화보 같은 몸매를 보여준다. '물을 많이 마셔요'나 '잠을 많이 자요' 같은 '여배우 관리법(?)' 말고 진짜 비결을 물어보니 "밥을 많이 먹어요"라고 한다.
"저는 못 먹으면 화가 나요.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러고 있나 싶어서요. 밥을 잘 먹어요. 대신 치즈케이크, 피자, 파스타 이런 건 참아요. 한 달 참으면 생각이 안 나요. 이번에 끝나고 치즈케이크를 한번 먹었더니 돌이킬 수가 없더라고요(웃음). 근데 밀가루를 먹으면 속이 안 좋아요, 밥을 두 공기 먹는 게 나아요. 한식은 살이 안 쪄요. 근데 밥 먹고 빙수 먹고 라테 마시니까 문제죠. 디저트 먹을 바엔 차라리 밥을 두 공기 드세요."
의 박범수 감독은 이번 영화의 시사회에서 처음으로 부모님을 영화관에 모실 수 있었다. 박범수 감독의 부모님이 아들의 첫 입봉작을 관람하던 그 자리에는 고준희의 부모님도 있었다. 그의 부모님도 처음에는 딸의 연예계 진출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인시절 밖에서 힘든 일을 겪어도 집에서는 내색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배우 고준희'를 인정하다 못해 '꼼꼼하게 모니터링'해주는 아버지와 요즘은 집에서 '맘놓고 투정 부리는' 딸로 바뀌었다.
"아버지가 공군 출신에 파일럿이셨어요. 보수적이신 데다 비행 중에 연예인을 보시면 '연예인은 머릿결부터가 다르다(?)'며 말리셨어요. 아무래도 연예계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도 많이 듣다 보니까 딸은 그냥 '무난하게 살기를' 바라셨죠. 그래서 집에서는 힘든 티를 못 냈어요. 어릴 때는 '그만 두고 시집가라'고 하실까봐 찬물로 세수하면서 울었어요. 오히려 요즘 투정을 좀 하죠. 그때보다 제 통장 잔고가 바뀌었거든요(웃음). 시사회 오면 두 분이 무척 좋아하세요. 아빠는 많이 지적하세요. 그때 좀 아쉬웠다, 예쁜 척하지 마라 그런 이야기도 하시고요. 그럼 제가 '저 이쁜 척 안 했어요. 원래 이뻐요' 그러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