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작가 겸 건축가 (겸 배우 엄지원의 남편인) 오기사가 신간을 발표했다. 대단히 엉뚱하고 모호하며, 게임 같기도 한데 잠언이 연상되기도 하는 이 정체불명의 지도를 그는 어쩌다 그리게 되었나.
분초 단위로 시간을 쪼개 바쁜 삶을 사는 오기사(오영욱의 필명)와 어렵사리 인터뷰를 잡았다. 그게 일요일 낮 1시. 한창 신혼을 즐길 작가의 귀중한 점심시간을 뺏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너를 위해서라면 일요일엔 일을 하지 않겠다'면서요."(오영욱이 아내 엄지원에게 바친 프러포즈 에세이의 제목은 이다)라고 농담을 건네자 소년 같은 웃음으로 대신한다.(그는 자주 '헤헤' 하고 웃으며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새 책에 대한 기자의 소감을 아주 많이 궁금해했고, "처음 볼 땐 뭐지? 싶은데 읽을수록 곱씹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고 답하자 아이같이 기뻐했다. 이번 신간은 어떤 작가도 시도한 적 없는 오기사만의 독특한 지도그림책이다. 더불어 지난 5월 배우 엄지원과의 결혼 이후 발표하는 첫 책이기도 하다.
건축을 하듯 지어 올린 신간
오기사의 신간 는 기존에 그가 낸 몇 권의 여행기들과 확연히 다르다. 일단 대상이 되는 도시가 없고 멋들어진 마천루도 볼 수 없다. 다만 상상의 장소만이 존재하는데, 페이지별로 담긴 수십 개의 분절된 컷들(지도)이 모여 하나의 큰 지도를 이룬다. 일명 ‘인생의 지도’다. 그런데 독자는 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지도를 어쩐지 따라가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종착지에 다다른다. 길 찾기 놀이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자 했을 오기사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 책이 어떤 책이죠?”
"제목이 정말 거창하죠? 헤헤. 이 책은 제가 생각하고 있는 삶의 원칙이나 방식, 관념, 의식 등이 짬뽕처럼 다 섞여 있어요. 저 혼자 떠난 수많은 여행을 통해 느낀 것들 더하기, '누가 한 말이더라? 어쨌든 이런 말이 있었어' 하는 지구상의 많은 선지자들이 했던 말들 더하기, 결혼을 하면서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내로부터 영향 받은 부분들까지 다 섞여 있는 그런 책이에요."
그동안 바르셀로나, 로마, 상트페테르부르크 그리고 서울까지 각국의 도시를 배경으로 일러스트와 에세이를 써온 오기사에게 이번 책은 과장을 조금 보태 그만의 세계관이 집대성된 그림책이다. 비행기 안에서 떠오른 아이디어가 작은 발단이었다.
"비행기에서 책 를 읽는데 앞부분에 갈림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요.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그중 어느 길을 가더라도 결국 같은 곳에 도달하게 될 수도 있다, 뭐 그런 내용이거든요. 그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고, 항상 (어떤 길을 갈지) 고민하지만 그 고민 끝에 내린 길이 결국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걸 모티브로 그려보면 되겠다' 해서 그리기 시작했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에 적힌 '두 갈래의 똑같이 험하고 가파른 길이 봉우리에 이를 수도 있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는 거나, 금방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똑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해왔다'라는 두 문장이 오기사로 하여금 뚝딱뚝딱 지도를 만들게끔 부추겼다.
"일단 동그랗게 원을 그렸고, 한국 사람이니까 태극문양 느낌도 낼 겸 가운데로 물이 흐르게 했어요. 옛날에 하던 무슨 게임처럼 A로 갈지 B로 갈지 고를 수 있는 길을 냈고, 시작은 기왕이면 어딘지 모르는 공간에서 시작하면 좋겠어서 (동그란 땅덩이의) 중간 어디쯤을 시작점으로 잡았어요. 그다음 우리가 바다라고 생각했던 게 어떻게 보면 호수일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어서 큰 호수를 만들었고요. 부분, 부분 쪼개진 지면으로 볼 때는 (호수가 마치 바다처럼) 수평선밖에 안 보이는 거죠. 그런 신들을 하나하나 넣기 시작하면서 계획을 잡아갔어요."
설명도 어딘지 모호하다. 가상의 지도인 데다 그 지도가 인생과 결부된다니 모호한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도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무수한데 오기사는 굳이 왜 상상을 지면에 담으려고 한 걸까.
"저는 건축을 공부하면서 '어떻게 건축을 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답사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좋은 건축물, 공간들을 많이 보려고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갑자기 책을 내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됐거든요. 그런 제가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지도예요. 어릴 때부터 지도 보는 걸 좋아했고요. 사람들이 만들어온 흔적을 기호화시켜놓은 게 지도라면 그 지도를 보면서 제 여정을 만든 거죠. 근데 문득 '내 여정을 가상의 지도로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게 를 읽으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고요."
그렇게 만들어진 지도에는 도시처럼 구역이 나뉘어 있고 저마다의 지명이 붙어 있다. 그 지명은 고민, 쾌락, 인내, 거절, 사랑 등 수십 개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개념에는 '오기사식' 주석이 달려 있다.
ex1. 결혼: 결혼제도는 인류의 문명이 허약한 남자들과 자존적인 여자들에게 선사한 선물이다. 아주 강한 남자거나 극히 순정적인 여자가 아니라면 후회는 숙명으로 미뤄두고 일단 감사히 결혼식을 치른다.
ex2. 긍정: 긍정적인 사람에게도 나쁜 일은 종종 온다. 다만 긍정적인 사람에게만 좋은 일이 올 뿐이다.
"뭔가 되게 잘 짜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즉흥성의 기반에서 쓴 글이고 지도예요. 가령 집착 다음엔 왜 사랑으로 이어지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어요. 약간은 우연들이 가득한 상태에서 만든 거거든요. 세상이 되게 피곤하잖아요. 개인적인 일도 피곤하고 세상이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도 있고요. 그 안에서 '어떻게 하면 편하게 혹은 의미 있게 살 수 있을까? 나라면 이렇게 살아야지!'라고 했던 부분을 즉흥적으로 정리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정답은 아니죠."
그런 즉흥성 때문인지 가령 '미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명상원'이라든가 '무의식을 수술하는 종합병원', '아주 가끔 착륙하는 비행기를 구경하는 해변' 등의 모순적인 지역들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저는 무의식을 믿어요. 많은 유명한 건축물도 작가의 무의식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답사여행을 갔던 것도 그 때문이에요. 제가 이론을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주 감각적이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정말 감각 있는 사람들은 마치 동대문 건물(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DDP를 가리킨다) 지어 올리듯이 하지만 그건 제가 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고요. 그러다 택한 방법이 '세상의 좋은 공간들을 보자'였고 내가 몸으로 직접 세상의 좋은, 감동적인 공간들을 보고 나면 그게 나의 무의식에 내재되어 언젠가 선 하나를 긋더라도 자연스럽게 배어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했죠. 이 책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단숨에 써내려갔든 수년간 써온 글을 묶은 것이든 그건 별로 중요치 않아 보인다. 중요한 건 작가가 그간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의 총량이며, 그게 결국 무의식중에 작업물로 배출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기도 하니까. 그는 독자에게 이 애매하지만 알고 보면 꽤 매력적인 신간에 대해 어떤 반응을 기대하고 있을까.
"일단 아내를 제외하면 첫 독자였던 아버지가 딱 보시더니 '넌 도대체 무슨 욕을 먹으려고 이런 책을 만들었냐?'고 해주셨어요.(웃음) 책인데 읽을 수 있는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처럼 구체적인 대상지가 있어서 그림을 통해 거길 추억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 (잠시 생각하더니) 이게 작품이라고 하기엔 좀 어렵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걸 만들었어요. 여행을 다니다 보면 굳이 어떤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작가가 열심히 작업한 흔적을 모아놓은 건데 '이건 꼭 소장해야겠다!' 하는 느낌을 받는 책을 만나거든요. 그런 건 꼭 사고요. (이 책도) 그런 책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이거, 매번 지도 펴놓고 길 따라가고 그러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헤헤."
“아무래도 결혼은 참 잘한 것”
오기사는 이번 신간의 홍보를 위해 전에 없이 팔을 걷어붙였다. 신간 인세를 전부 ‘우연한 배낭여행’ 프로젝트에 보태기로 한 것. 여기서 ‘우연한 배낭여행’이란, 오기사가 지난여름 출범시킨(?) 배낭여행 프로젝트다. 이런저런 이유로 배낭여행의 기회를 갖기 힘든 젊은 친구들에게 배낭여행의 기회(경비와 동행)를 제공하자는 취지다. 그 역시 한 번의 해외여행이 얼마나 많은 사고 확장의 기회를 건네는지 너무도 잘 알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출발 일정을 기다리고 있다고. 물론 아이디어는 아내 엄지원과의 합작품이다.
(첫 책을 발간한) 2005년부터 꾸준히 블로그를 운영하는 걸 보면, 그도 꽤 바지런한 작가 중 한 명이다. 기록과 소통의 목적 외에도 신간 홍보에 블로그는 나름 유용하다.
"그러니까, 스스로 신이 난 거예요. 이 책이 안 팔리거나 안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건데, '나 지금까진 이렇게 해오다가 이번엔 이런 것도 해봤어'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뭐 그냥, 관심병자인가? 헤헤헤헤."
사실 이번 신간 수익금으로 받는 인세는 전부 '우연한 배낭여행'에 쓰일 예정이다. '우연한 배낭여행'은 올해 처음 오기사가 시도하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신혼여행 다녀오는 길에 아내와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일 하며 재미있게 잘 살 수 있을까, 이야기하다가 '자기가 가장 재밌어하는 일로 (남에게) 좋은 일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럼 NGO들에 돈을 기부하고 그런 걸 떠나서 극적으로 해보자, 그랬을 때 제가 가장 재밌어하는 일은 여행이거든요. 여행으로 세상의 단 한 명이라도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 인생은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했어요."
그전까지는 그림과 글로 여행의 즐거움을 공유했다면, 이번엔 한발 더 나아가 몸소 실천하겠다는 말이다. 짐작건대, 꾸준히 자원봉사를 다니는 것으로 알려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아내 엄지원의 영향이 있을 것 같다.
"여행을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서너 명의 젊은 친구들과 매년 같이 여행을 가기로 했어요. 사랑(좋은 일)의 가장 진솔한 표현방식이 자신에게 제일 아까운 걸 주는 거라고 했을 때, 저한텐 그게 돈과 시간이었거든요. 특히 시간이 그렇고요. 그럼 이 친구들에게 여행비 전체와 시간을 내어 같이 여행을 가자, 해서 저까지 5명이 내년 1월에 인도로 떠나게 됐어요. 물론 저는 지갑만 여는 사람이 되고 여행 계획은 그 친구들에게 다 맡겼죠."
1인당 비행기 티켓과 약 100만원의 경비 안에서 젊기에 가능한 1달간의 배낭여행이 시작된다.
"이걸 준비하는데 정말 행복한 거예요. '야, 이런 기분을 느낄 수도 있구나.' 그 친구들과 바로 이 자리에서 회의를 했거든요. 회의를 보고 있으면 정말 좌충우돌이에요. 때로는 한심한 얘기도 오가고요. 근데 그걸 지켜보는 게 정말 행복하더라고요. 물론 현실로 돌아와서 내년에도 후년에도 다른 친구들에게 여행을 시켜주려면 돈이 꽤 들겠죠. 아무래도 책이 잘 팔려야 해요."(웃음)
좀처럼 아내 엄지원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그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 이런 말이 돌아온다.
"어쨌든 이 아이디어('우연한 배낭여행')는 아내와의 대화에서 이루어졌는데, '아, 정말 결혼을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결코 평범하지 않은 두 직업군의 남녀가 얼마나 자주,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며 교감하는지 궁금하다.
"거의 (일과 관련된 대화는) 안 주고받아요. 지금 (아내가) 한창 영화 촬영 중이거든요. 촬영장에 한번 가보긴 했는데 대본도 저 없을 때 혼자 봐요. 물론 가끔 (일에 대해서) 얘기할 때가 있는데 매일같이 피드백을 주고받는 관계는 아닌 것 같아요. 저희는 일과 일상이 아주 분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붙어 있지도 않은 그런 상태거든요. 저 개인적으로는 많은 대화를 하는 것보다 짧지만 그 안에서 충분히 오고 가는 대화가 더 좋거든요. 그런 순간순간의 대화들에서 영감을 주는 일이 분명히 많이 있어요."
많은 시간 대화할 것 없이 찰나에 충분한 교감이 가능한 커플. 그래서 부부인가.
"아마 다음 달쯤 같이 베니스로 여행을 가려고 해요. 저는 그림을 그리고 아내는 책과 대본을 들고요. 베니스는 '내가 죽을 때까지 그보다 더 환상적인 도시가 생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도시예요. 2년에 1번 열리는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올해 한국관이 황금사자상을 받기도 했고요."
홀로 여행을 즐기던 한 남자의 곁에 이젠 평생의 반려자가 생겼다. 그렇다고 바깥으로 나돌던 삶의 패턴이 바뀌진 않을 것 않다고.
"(결혼하고 나서) 더 나가는 것 같아요. 노는 걸 너무 좋아해서, 헤헤. 일과도 좀 관련이 되어 있고요. 지난 2년 동안 1년에 3, 4개월 이상은 해외에 머물렀던 것 같아요. 횟수로 치면 매달 2, 3번 정도?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까 오후에 잠깐 산책을 하고 아내와 영화 을 보기로 했어요."
요즘은 아내와 한창 서핑을 즐긴다고 한다. 겨울에는 따뜻한 발리로 서핑 여행을 떠날 거라고. 하고 싶은 걸 좀 더 즐기려다 보니 2세 계획은 아직 없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오기사가 또 한 번 그 소년 같은 얼굴과 미소로 이렇게 말한다.
"제가 오늘 책 나오고 처음 하는 인터뷰인데요. 말하다 보니까 이 책은 정말 정체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헤헤. 기자님이 이 책에 의미를 부여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