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저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야, 꼭 완주해서 결혼 허락받을게. 사랑한다."
26일 오후 2시 45분. 춘천마라톤 결승점을 8㎞가량 남겨둔 '마(魔)의 34㎞ 지점'에 마련된 '자유 발언대'에 이정재(28)씨가 올랐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바로 그 시각 결승점 대형 화면에 이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자친구 오하나(28)씨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이씨는 마라톤을 한 번도 뛰어본 적이 없다. 그런 그가 올해 춘천마라톤에 참가한 까닭은 오씨와의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서다.
"자네, 내 딸과 결혼하고 싶은가. 그럼 춘마 풀코스를 완주하게."
지난해 10월, 충북 제천의 여자 친구 본가를 찾은 이씨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예비 장인 오병조(67)씨가 결혼 승낙 조건으로 '춘마 풀코스 완주'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42.195㎞ 마라톤 풀코스는커녕 10㎞조차 달려본 적이 없는 이씨였다. 하나밖에 없는 무남독녀 외동딸을 끝까지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인지 증명하라는 이야기였다.
이씨의 도전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경기도 고양시의 주점에서 일하는 그는 오후 3시에 출근해 다음 날 새벽 5시 퇴근한다. 불규칙한 생활이었지만 5시간만 자고 일어나 일산 호수 공원 코스를 뛰었다.
"처음엔 1㎞도 어려웠어요. '하나랑 결혼하겠다'는 생각에 뛰고 또 뛰다 보니 그게 3㎞가 되고 5㎞가 됐습니다." 하나씨는 주말마다 자전거를 타고 함께 공원을 달렸다. '사랑의 마라톤' 연습이 그렇게 1년. 이씨의 최고 기록은 20㎞까지 늘었다. 180㎝ 키에 85㎏이던 몸무게는 10㎏이 줄었다.
지난해 봄 이씨를 처음 만났던 하나씨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꿋꿋하게 삶을 지켜나가는 듬직함에 반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신부전증을 앓는 아버지와 소아마비(지체장애 2급)에 걸린 어머니 슬하에서 장남으로 자랐다. 공고를 졸업하고 전문대에 진학한 이씨는 학비를 벌어보겠다며 호프집·음식점·편의점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힘들게 모은 돈은 대부분 병원비로 들어갔다. 대학을 자퇴하고 생활 전선에 나섰다. 생계 곤란 사유로 군대도 못 갔다. 2008년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홀어머니를 모시며 다섯 살 터울의 남동생 학비를 댔다. 남동생은 최근 4년제 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예비 장인 오씨에겐 사실 속뜻이 있었다. 10여년 전 큰 사기를 당했던 오씨는 그때부터 마라톤을 시작했다. 지금은 풀코스 완주 경험만 수십 번이다. "뛰다 보니 인생이 살아지더군. 조선일보 춘마가 내가 처음으로 완주한 풀코스야. 허허. 그래서 시켰지."
오후 4시쯤. 결승점을 2㎞쯤 앞두고 예비 사위의 첫 마라톤 도전에 마음이 놓이지 않던 오씨가 나타났다. 4시 25분. 예비 장인과 사위가 나란히 결승선을 통과했다. 7시간 19분에 걸친 '장가가기 마라톤' 대장정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예비 사위에게 오씨가 말했다. "결혼 오케이. 내년 춘마는 우리 같이 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