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따, 고것이 참말로 다 오해랑께요.” 입맛 열면 거짓부렁에 딸(연민정)을 위해서라면 유괴·갈취 등 나쁜 짓 마다않는 밉상 할매였다. 지난 5일 시청률 35%를 기록하며 막장 행보의 화려한 막을 내린 MBC ‘왔다! 장보리’의 도보리 엄마, 황영희. 드라마에서 단연 ‘미친 존재감’을 뽐낸 이 목포 여자의 첫 마디는 이랬다. “저, 실물이 더 나아요.”
'오해'가 맞았다. 원래 얼굴은 새하얀 쪽에 가깝다. 걸걸하고 추레한 배역 탓에 그는 분장실에서 가장 어두운 밤색 파운데이션을 두 번, 세 번 얼굴에 펴 발랐다. "매끈하게 바르면 오히려 섹시해보이거든요. 섀도로 음영을 만들고 얼룩덜룩하게 발랐어요. 얼굴이 원체 하얘 놔서." 몰입하면 할수록 자연스레 얼굴이 극 중 인물처럼 늙어갔다. 후반부엔 분장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원일기' 일용 엄니 이래 40대가 할머니 연기한 건 내가 처음일 것"이라며 좋아한다. 그는 마흔다섯이다. 채시라보다 한 살 적다.
1993년 연극배우로 데뷔했다. 모성애 강한 엄마·할머니 역할을 주로 맡았다. 2011년 MBC '내 마음이 들리니'에선 억척 닭집 아줌마, 2008년 연극 '민들레 바람 되어'에선 꼬부랑 할매 역할이었다. 30대 때였다. 오해 마시라. 그는 미혼이다. "결혼도 출산도 안 해보고 연기가 되느냐는 얘길 많이 들어요. 근데 꼭 살인을 해봐야 살인자 역할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는 "오히려 경험이 없으니 모성을 객관적으로 보게 됐다"고 했다. "연기자는 연기를 하는 거니까요."
김자옥처럼 되고 싶었던 목포 정명여고 2학년 황영희는 그러나 깨닫고 말았다. "솔직히 TV용 얼굴은 아니죠." 1993년 상경해 극단 '성좌'에 들어갔다. 공연이 끝나면 "고향이 전라도냐"는 얘길 자주 들었다. "슬펐어요. 일상어는 괜찮은데 문어체에선 사투리 억양이 고쳐지질 않았거든요." 그러다 1998년 연출가 박근형을 만났다. "자꾸 고치려 하지 말라고 응원해 줬어요. 전라도·경상도 사투리 쓰는 공연에도 많이 올랐죠." 연극 '목란언니'에선 평양 사투리도 썼다. "사투리는 제 개성이에요. 보세요, 이걸로 떴잖아요."
그는 사투리계의 은둔 고수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방송·영화 제작진이 그를 '사투리 코치'로 모셔간다. 신애라·고수·김유정도 그의 손을 거쳤고, 서울말로 쓰인 시나리오를 사투리로 고쳐주기도 했다. "지난달엔 나홍진 감독 영화 '곡성' 조감독한테 연락이 왔어요. 드라마 찍느라 시간이 없어 응하진 못했지만요."
종영과 동시에 그는 MBC 수목극 ‘미스터 백’ 촬영에 들어갔다. 12월엔 6년 만에 연극 ‘민들레 바람 되어’ 무대에도 다시 오른다. 통신사 CF 제안도 받았다. 20년 무명의 설움이 한 방에 날아갔다. “솔직히 노후 걱정이 되긴 했지만, 무명이라고 속상하진 않았어요. 제 꿈은 연기자였고, 연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는 막장 드라마든 뭐든 가리지 않고 많이 찍고 싶다고 했다. “언제든 길에서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사람들, 그 사람들 얘기가 좋아요. 그리고 드라마 속에선 가족도 신랑도 생기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