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후반 천 상사가 인사계였다. 30년 세월 저쪽인데도 눈에 선하다. 사람 좋은 얼굴에 배가 불룩했다. 일 처리가 삐끗해 동생뻘 중대장한테 핀잔이라도 들은 날이면 "에이, 옷을 벗어야지" 하고 구시렁댔다. 이튿날이면 언제 그랬냐 싶게 막사 페치카를 살피고 다녔다. 부대 경례 구호가 '단결'이었다. 이등병은 "따안~ 겨얼!" 악을 썼다. 말년 병장은 인사계에게 "단결입니다~" 하고 느물거렸다. 천 상사는 "징그러워, 관둬" 하면서 잘도 받아줬다.

▶서툴기만 한 이등병 때도, 취직 걱정에 볼살 빠지던 말년 때도 천 상사가 곁에 있었다. 10시간 넘는 철야 행군을 하면 이등병부터 쓰러졌다. 덩치가 소만 한 황 병장이 이등병을 둘러업고 의무대까지 20리를 뛰었다. 대구에서 금은방 하다 입대한 배 일병이 군장을 뺏어 짊어졌다. 침상 끝에 얼어붙어 앉아 있으면 강 상병이 옆구리를 찔러 PX에 데려갔다. '원산폭격'에 '줄빳다'를 치던 시절이었다. 선임이 못되게 갉기도 했지만 때론 형 같았다.

▶육군이 병 계급을 넷에서 둘로 줄이려는 모양이다. 막내 이등병과 최고참 병장을 없애고 군 생활 내내 일병·상병으로 지내게 하는 안(案)을 내놓았다. 갖은 처방에도 병영이 시끄럽자 '계급 간소화' 방책을 들고 나왔다. 훈련소를 마치면 바로 일병이고 제대 날 비로소 병장을 달아준다. 우수한 상병을 뽑아 병장 겸 분대장을 삼는 건 별도다. 잘게 나뉜 계급을 둘로 좁혀 왜곡된 서열 문화를 고치겠다고 했다. 병사 계급을 손보는 게 60년 만이다.

▶중공군은 문화혁명 때, 소련 붉은군대는 공산혁명 때 계급을 아예 없앴다. "프롤레타리아는 군대도 뭉쳐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장군·사병 사이도 평등했다. 중공군은 1988년, 붉은군대는 1930년대 계급을 되살렸다. 이번엔 군 현대화를 내세웠다. 중공군 병은 상등병·열병(列兵) 둘만 뒀다. 북한군 병 계급도 50년대부터 상등병·전사 둘로 했다. 복무기간이 너무 길어 상등병끼리 5년 넘게 차이 나자 1998년 다시 넷으로 쪼갰다.

▶70년대 남성 듀엣 '하사와 병장'이 떠오른다. 병장은 하사와 어울려 보일 때도 있다. 병 시절엔 계급장에 '막대기' 하나 쌓는 게 얼마나 힘겹고 대견했는지 모른다. 병장이 대장보다 높은 '오성 장군'이라 뻐겼다. 육군의 취지는 알겠다. 서열을 없애 내무반 사고를 줄이자는 생각이다. 지금 군 현실은 조금 다르다. 입대가 한 달만 차이 져도 자기들끼리 상·하급자로 나눈다. 눈에 보이는 계급을 없앤다고 눈에 안 보이는 서열까지 사라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