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 리스트'가 한창 유행할 때, 누군가의 질문에 인생에서 '버킷 리스트' 같은 걸 만들지 않는 게 내 목표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인생에 '버킷 리스트'가 없다는 건 하고 싶은 일을 해보지 않아서 생기는 후회 같은 게 없는 삶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하지 않아서 생기는 후회보단 해보고 나서 하는 후회가 훨씬 더 짧다는 걸 알게 된 탓도 있다. 살아온 날을 떠올려보면, 가보지 않아서, 해보지 않아서, 고백하지 않아서 생기는 후회는 언제나 마음에 훨씬 더 깊은 상처를 만들었다. 갔기 때문에, 시도했기 때문에, 고백했기 때문에 받는 상처는 어느새 자기 합리화가 끝난 상태로 봉인되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고 말이다.
이 말은 아마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게 되는 것' 같은 제목의 책 마지막 장쯤에 담길 내용일 것이다. 그저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약간 쌓이면서 생긴 지혜라고 해둬도 좋겠다. 그래서 언젠가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갔던 후배가 한 말을 듣고도 나는 내 오래된 꿈을 접진 않았다.
"너무 단조롭고 작은 마을이에요. 빨간 머리 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심심한 마을. '그린 게이블(Green Gables·초록 지붕이 특징인 앤의 집)'을 실제로 보면 그냥 그린 게이블이라는 걸 알게 돼요."
여행 전문 기자이기도 한 후배는 긴 비행 끝에 어렵게 도착한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느낀 당혹감을 짧게 설명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파리를 꿈꾸며 갔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개똥이 즐비한 그곳에 도착한 후 쇼크를 받는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금세 생각을 바꾸었다. 중요한 건 역시 앤의 고향을 방문한다는 그 사실 하나라고 말이다. 나는 초록색 지붕 집의 앤을 정말로 좋아한 아이였다는 그 사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원작 소설 '빨간 머리 앤'의 원제는 '초록색 지붕 집의 앤(Anne of Green Gables)'이다.
내게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란 사실을 알려준 건 광고 속 '에이스 침대'였지만 침대는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준 건 '빨간 머리 앤', 앤 셜리였다. 그녀는 초록색 지붕 집에서 멀리 벚나무들을 바라보며 꿈꾸는 듯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침대는 잠만 자는 곳이 아니에요. 침대는 꿈을 꾸는 곳이기도 해요."
나는 앤이 마릴라 아줌마에게, 매튜 아저씨에게, 친구인 다이애나에게 했던 많은 말을 기억한다. 그래서 억울하고 힘든 날 밤에는 "엘리지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지네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같은 말을 기억하며 억지로 힘을 내기도 했다. 어릴 때 텔레비전을 켜면 나왔던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내 사춘기는 이 소녀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애니메이션 '빨간 머리 앤: 그린 게이블로 가는 길'의 극장판을 보러 갔던 날, 나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그 시절의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앤의 나이와 똑같은 열한 살로 말이다. 극장에는 내 또래 여자가 유달리 많았다. 아마도 그들 역시 자신만의 '앤'을 추억하느라 극장을 찾았을 것이다. 그래서 '앤'의 목소리로 영원히 기억하는 성우 '정경애'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성우의 목소리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제 다시는 내가 기억하는 앤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 성우 정경애가 대한항공 괌 추락 사고로 두 아이와 함께 사망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고 나서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련한 슬픔을 느끼곤 했다(성우였던 남편 역시 그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하지만 삶이란 죽음을 감당하면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어른의 사랑이 이별을 감당하면서 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앞일을 생각하는 건 즐거운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 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하지 않는다. 비행기가 뜨지 않으면 추락할 일도 없다. 시도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이별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앤과 마찬가지로 나는 실망하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꿈꾸고 기대하고, 너무 좋아서, 혹은 너무 싫어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괴로운 세상 속에 아직은 살고 싶다. 내게 일어나는 많은 일을 체험하며 깊어지고 있다. 그래서 열한 살이었던 그때나, 마흔 살이 된 지금에도, 사고뭉치인 '앤'이 사랑스럽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빨간 머리 앤: 그린 게이블로 가는 길'은 농사일을 거들어 줄 남자아이를 원했던 남매가 실수로 보내진 여자아이 앤과 함께 지내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모았다. 앤은 기대에 부풀었다가 자신이 '실수'로 잘못 배달된 짐처럼 필요 없는 존재란 사실에 절망하지만 결국 절망을 딛고 마음을 다잡는다. 어쩌면 90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소녀는 '다시 한 번 버려진다는 것'이란 이름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다시 새 가족과 함께한다는 것'이란 이름의 환한 세상으로 나온다. 고아원으로 자기를 돌려보내려 한다는 걸 알고도 앤은 마릴라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소녀였다.
"전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어요. 책에선 이럴 때일수록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라고 했거든요.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고아원으로 돌아간다는 우울한 생각은 버리고 마음껏 즐길래요. 와! 벌써 들장미가 피었네! 예쁘다! 쟨 장미로 태어난 게 자랑스러울 것 같아요."
마릴라는 앤의 이런 순수하고 긍정적인 마음에 감동하여 그녀를 양녀로 맞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앤이 시간의 비밀을 알고 있는 소녀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이것이 앤이 내게 알려준 가장 큰 교훈이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슬펐던 과거나,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이곳, 이 시간, 이 순간을!
●빨간 머리 앤: 그린 게이블로 가는 길―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다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낸 50부작 TV애니메이션의 극장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