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장 후보 조순(趙淳)이 하얀 눈썹을 휘날리며 연단에 섰다. 서울대 축제 마당이었다. 그가 젊은 표를 겨냥한 발언을 이어갔다. "나는 서울의 ''하얀 포청천'이 되겠습니다. 서울을 안전하고 살아 움직이는 도시로 만들겠습니다." 1995년 첫 민선 시장 선거가 코앞이었다. 그해는 대만서 만든 TV 드라마 '판관 포청천'이 크게 인기몰이를 했다. 포청천은 11세기 중국 송나라 수도 카이펑(開封)의 부윤(府尹)까지 지낸 청백리이자 판관이었다.

▶조순은 포청천 덕에 당선됐다. 포청천이 워낙 추상같은 관료의 표상이었고, 시장(市長) 격인 부윤을 지낸 점도 겹쳤다. 선거 때면 여러 후보가 '조순-포청천' 선거 전략을 벤치마킹했다. 그러나 포청천이 죄인 처형 때 썼다는 '개작두'란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너무 잔인했다. 그해 삼풍백화점이 무너지자 여론이 서울시를 꾸짖었다. 조순이 말했다. "포청천이 작두로 단죄하듯 한 번에 해결할 순 없다. 한약을 쓰듯 장기적 치유가 필요하다."

▶그 뒤 '포청천' 별명은 주로 체육계 심판들이 갖다 썼다. '그라운드의 포청천'이라고 불렀다. 집창촌 성매매 척결에 앞장섰던 여성 경찰서장에게는 '미아리 포청천'이란 별명이 붙었다. 공정거래위원장, 소비자원장도 포청천이라고 불러주길 은근히 바랐다. 전직 대통령의 비리를 파헤친 검사가 옷을 벗으면 일부에서 "'포청천 검사'가 드디어 떠난다"는 고별사를 읊었다. 올해 6·4 지방선거 때도 일부 후보가 포청천이란 말을 썼다.

▶2주 전 새정치연합 문희상 의원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포청천 얘기를 꺼냈다. "내 별명인 포청천처럼 공정한 전당대회를 준비하겠다." 며칠 뒤엔 "정당은 규율이 생명이다. 해당(害黨) 행위자는 개작두로 치겠다"고 했다. 비록 사석(私席)에서 한 말이지만 끔찍한 느낌을 줄 만큼 단호했다. "버릇없는 초·재선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는 말과 겹쳐 서슬이 퍼렜다. 엊그제 세월호특별법 합의가 성사되자 그의 '개작두 엄포'가 통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지금도 중국 허난성 카이펑에는 원조 포청천이 썼다는 형벌 기구가 그대로 남아 있다. 평민을 처벌할 때는 개작두, 귀족에겐 범작두, 왕족에겐 용작두를 썼다고 한다. 관광지가 된 당시 시 청사에 들어서면 돌에 새긴 글귀가 눈길을 끈다. '공생명(公生明)', 공정함이 밝음을 낳는다는 뜻이다. 많은 정치인·관료가 포청천을 닮겠다고 했지만 퇴임 뒤까지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없다. '포청천 문희상'이 자신의 별명 값을 해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