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립박물관 관장이 개인 창고에 조선시대 지석(誌石) 500여점을 수년간 숨겨오다 경찰에 붙잡혔다. 지석은 묘에 묻힌 사람의 이름과 생년월일, 일대기 등을 기록해 무덤 앞에 묻는 판석(板石)으로 당대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史料)로 평가된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이 같은 혐의로 한국미술박물관 관장 권모(73)씨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경기도 성남에 있는 권씨의 창고에선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의 손자인 풍산군 이종린의 묘(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6호) 등 90여곳에서 도굴된 지석 558점이 발견됐다. 한국미술박물관은 1993년 서울 종로구에 개관해 현재 보물 2점과 서울시 지정 문화재 11점 등 문화재를 총 6000여점 소장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권씨는 2003년 6월부터 8월까지 문화재 매매업자들로부터 지석을 사들였다. 경찰은 지난 6월 '도난된 불교 문화재가 경매시장에 나왔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권씨의 수장고를 압수 수색하던 중 지석 500여점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지석은 묻힌 사람의 일대기와 시대상이 기록돼 있고 지석에 새겨진 내용과 서체를 보고 당대의 풍속사·서예사 등을 연구할 수 있어 전문가들 사이에서 일종의 '타임캡슐'로 불린다. 한국에서 발견된 지석 중에 최고(最古)는 지난 1971년 충남 공주 송산리 백제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발굴됐다.
이번에 회수된 지석을 감정한 유승민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은 "15세기부터 20세기 세기별로 지석이 모두 나와 조선의 500년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지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죽산 안씨 안복초(1382~1457)의 것으로 세조 3년(1457)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경찰은 "권씨는 수사기관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공소시효(10년)가 끝날 때까지 장물을 숨겨온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문화재는 오래될수록 그 가치가 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도굴된 문화재는 공소시효가 끝나면 유통되는 경우가 많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권씨는 "연구 목적으로 지석을 취득했다"며 "장물인지 몰랐다"고 혐의를 부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