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면서 부모에게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은 아마 "말 잘 들어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어른 말씀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했어. 제발 말 좀 잘 들어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잔소리가 지겨워 슬쩍,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내빼려고 하면, 영락없이 또 말 잘 들으라는 당부가 들려온다.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나가서 일을 하면 모를까, 방구석에서 잠만 자고 있는데도 떡을 가져다줄 정도이니, 말을 잘 듣는 것은 우리의 인간관계에서 제일 강조되었던 덕목이었던 듯하다. '말을 잘 듣는다'의 정의를 내리자면, 자기보다 강한 사람의 판단에 잘 따르는 태도다. 독자적으로 선택하기보다는 어떤 권위적 존재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다. 복종하지 않았을 때 예상되는 처벌이나 손해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른들 말을 잘 들으면 진짜로 떡이 생길까? 꼭 그렇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더 해가 될 때도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연구팀은 아이들의 활동량을 높일 수 있는 공원환경 디자인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시설이 아니라 어른들의 행동에 있음을 발견했다. 부모나 보호자가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위험하니 조심해라. 떨어질 수 있으니 올라가지 마라." 이렇게 잔소리를 한 아이들은 활동량이 절반도 되지 않았고, 비만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부모나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은 활동량이 훨씬 많았고, 특히 활발한 친구들과 어울린 아이들은 운동량이 3.7배나 많았다. 당연히 비만도 적었다. 아이들에게는 좋은 시설보다 좋은 친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요즘 창조경제의 모델로 이스라엘이 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자녀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늘은 학교에서 어떤 질문을 했니?"라고 묻는다. 한국에서 학교란, '선생님 말을 잘 듣는 곳'이지만, 그들에게 학교는 '질문을 하러 가는 곳'이다.

학교에 대한 정의가 전혀 다르다. 학교는 주는 떡을 일방적으로 무상급식 받는 곳이 아니라, '내 떡을 만들러' 가는 곳이다. 그러므로 언제든 누구에게나 거침없이 질문을 하라고 배운다. 질문이 많으면 수업 진도에 방해된다고 눈총받고, 말 많으면 간첩이 되는 우리 풍토와는 크게 다르다.

말만 잘 들으면 가만히 있어도 떡이 생긴다고? 그렇다면 무엇하러 자기 주관을 가지겠는가? 그대로 답습하면 충분히 행복이 보장되는데, 왜 굳이 야단맞을 각오를 하면서 질문을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겠는가. 남의 말 잘 들으면 떡이 없어서 구걸하는 신세는 면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일 뿐이다. 전 세계 어디를 보아도 남의 말을 잘 듣는 것만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없다.

이왕 말을 잘 들으라고 할 요량이면, 얼마나 맛있는 떡이 생길지 듣는 사람이 받을 이익을 성의 있게 설명할 필요도 있다. 말을 듣지 않았을 때 받을 처벌과 손해를 너무 강조하면, '수동공격성'이 생길 수 있다. 수동공격성이란 힘에서 밀리니까 보는 앞에서는 뭐라 말을 못했지만 속에 쌓인 불만을 수동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 현상이다. 겉으로는 "네네" 해놓고 나중에 까먹은 척한다든지 일을 계속 미루는 등 골탕을 먹인다. 방어적이 되기 때문에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 이 지경이 되면 해결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어이쿠, 골치 아프다. 이쯤 되면 그냥 입은 다물고 지갑만 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갑이 얇으니 어쩐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