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해서 사설 '정다산(丁茶山·다산 정약용)의 위대한 업적'을 썼다. 작은 제목은 '99주년 기일에 즈음하여'이다. 오전 9시 회사에 갈 때 정위당(鄭爲堂·위당 정인보)을 방문해 다산 실학의 대강(大綱)을 듣고 와서 사설을 썼다."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이자 언론인 문일평(文一平·1888~1939) 선생이 남긴 1934년 9월 9일자 일기의 한 구절이다. 이 일기의 '회사'는 조선일보다. 이전 해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영입된 선생은 1931년 신간회 해산 등 일제의 정치적 탄압이 노골화하는 상황에서도, 문화와 학술을 통한 실천적 민족주의 운동을 고심했다.

(사진 왼쪽부터)문일평, 안재홍, 정인보.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 위당 정인보 등과 학문적 교류 끝에 1934년 9월 8일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정약용 서거 99주기 강연회'가 열렸다. 예상 밖의 청중이 몰려드는 바람에 주최 측은 급기야 '장내 정리비' 명목으로 10전을 받았다. 그래도 청중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날은 일제의 끈질긴 동화(同化) 정책에 맞서 우리 고유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학 운동'의 탄생일로 꼽힌다.

'조선학 운동' 80주년을 맞아 안재홍과 정인보, 문일평과 백남운 등 조선학 운동을 이끌었던 인사들의 업적과 문제의식을 재조명하는 학술 행사가 열린다. 19일 오후 2시 고려대 서관(문과대학) 317호에서 열리는 제8회 민세(民世)학술대회다.

류시현 광주교대 교수는 '1930년대 문일평의 조선학과 한국사 서술'에서 "당시 정인보·안재홍·문일평 등 조선 역사 문화 연구자는 정약용 연구를 통해서 일제의 관학(官學) 연구에 대응하고, 동시에 근대적 학문 방법론을 공유하고자 했다"고 분석했다. 김인식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는 '1930년대 안재홍의 조선학론'에서 "안재홍에게 실학자 정약용은 좁게는 '조선학'을 연구하는 전범(典範)이며, 넓게는 인생의 사표이자 '롤 모델'이었다"고 평했다. 김 교수는 "안재홍은 정약용에게서 자신의 정치 이상을 발견했고, 자신의 정치 이상을 정약용에게 반사·투영시켜 표현했다"고 했다.

이준식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조선학 운동과 백남운의 사회사 인식'에서 당시 사회주의 진영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혔던 백남운이 예외적으로 조선학 운동에 뛰어든 이유를 분석했다. 이 교수는 "조선 후기 이후 자본주의의 맹아(萌芽) 문제로 고민하던 백남운은 그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정인보의 도움으로 실학과 정약용에 주목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평했다.

최광식 고려대 교수는 기조 발제에서 "'세계 문화에 조선의 색(色)을 짜 넣는 것'이라는 안재홍의 조선학 정의는 21세기 세계화의 시대에도 한국학 진흥과 발전에 유효한 가치"라고 말했다. 이황직 숙명여대 교수는 '김태준의 조선학 구상과 한계', 최선웅 순천대 연구교수는 '정인보의 동아일보를 통한 조선학운동 전개'를 각각 발표한다. 학술대회는 민세안재홍기념사업회와 한국인물사연구회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평택시·조선일보사·우리역사연구재단이 후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