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동물의 털 말리기에 이용할 경우 화재 위험이 있습니다.' 새로 산 헤어드라이어나 선풍기 제품설명서에 적혀 있는 경고문이 아니다. 음식을 데워 먹는 LG전자 전자레인지 사용설명서에 명시된 문구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이뿐 아니다. LG전자 에어컨 사용설명서에는 '에어컨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지 마세요. 배탈의 원인이 됩니다'고 적혀 있고, 삼성전자 노트북 사용설명서는 '노트북 위에 양초를 올려놓지 마세요'라고 경고한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여길 만한 내용에 대해 정색하며 '경고'해 소비자들을 당황하게 하는 '황당 매뉴얼'이 늘고 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삼성전자의 냉장고 사용설명서에 대한 기사에서 "제품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면 새로운 방법일 수 있지만 '크크크'라는 반응밖에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자업계 관계자들은 "단순히 호기심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고와 분쟁 방지 차원에서 마련한 것"이라고 말한다.

◇소송 대비 위해 '황당 매뉴얼' 생겨

'김치냉장고에 학술 재료(의약·화학약품)를 넣지 마세요!' 동부대우전자는 몇년 전 냉장고 제품설명서에 이런 경고문을 추가했다. 먹던 약, 쓰던 화장품, 실험실 시약 등을 냉장고에 넣는 사람들 때문이다. 채경아 동부대우전자 홍보부장은 "2년 전 논문 재료로 쓸 식자재를 김치냉장고에 넣었는데 변질되었다며 배상을 요구하는 고객이 찾아오기도 했다"며 "이 경고문을 미리 넣어 둔 덕분에 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전자제품 사용설명서에 황당 매뉴얼이 들어가기 시작한 건 2002년 '제조물책임(PL)법' 시행 이후다. 이 법은 제품의 결함으로 인해 발생한 사고에 대한 피해를 제조사가 책임지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조 업체의 책임을 묻기가 수월해지자 배상을 요구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한국소비자보호원에 따르면 최근 제품의 품질이나 안전 문제로 피해를 보았다며 상담을 요청한 사람이 연평균 7만여명으로, 법 도입 이전(연평균 3만2000여건)보다 배 이상 늘었다.

이런 매뉴얼은 확인되지 않은 괴담이나 불의의 사고 등을 통해 보완되기도 한다. 몇년 전 '미국의 한 할머니가 털을 말리기 위해 고양이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는데 고양이가 죽는 바람에 전자레인지 회사가 수백만 달러를 배상했다. 고양이를 전자레인지에 넣으면 안 된다고 고지(告知)하지 않은 책임을 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는 미국의 한 로스쿨 교수가 제조물책임법을 설명하기 위해 가상으로 만든 사례지만, 한국에서는 이 일이 실제 일어났던 일로 알려졌다. 레바논, 미국, 영국 등에서는 실제로 고양이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작동한 엽기적인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전자제품 업체들은 이런 일들로 소송에 휘말리는 것에 대비해 제품설명서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동물을 (전자레인지에) 넣지 마시오.' 사례별 조항을 추가하다 보니 제품설명서가 책만큼 두꺼워졌다. 한 회사의 냉장고 사용설명서는 55쪽으로 웬만한 소책자 분량이고, 3D TV 설명서는 소설책 분량인 197쪽에 달한다.

제조물책임법을 악용해 기업들부터 돈을 뜯어내려는 블랙컨슈머도 기승을 부렸다. 지난해 법원은 휴대전화 배터리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고장 낸 뒤 "휴대전화 배터리가 폭발했다"며 보상을 요구한 소비자에게 1500만원 벌금을 선고했다. 나주영 LG전자 홍보팀 차장은 "전자레인지 제품설명서에 휴대전화 배터리를 넣으면 안 된다는 점을 명시했기 때문에 블랙컨슈머의 '꼼수'에 말려들지 않았다"고 했다. 기업들은 이런 소송에 대비해 제조물 배상 책임보험에 들기도 한다. 법 시행 첫해인 2002년 1만2383개였던 제조물 배상 책임보험 가입 회사가 10년 만에 2만9831개로 배 이상 늘었다(보험개발원).

◇'화장실 솔로 몸을 닦지 마시오.'

미국 미시간에 있는 소송오용감시센터는 매년 '올해의 황당 소비자 경고문'을 뽑는 콘테스트를 연다. 올해 14회째인 이 대회에서 휴대전화 배터리 충전기에 붙은 경고 문구가 1위를 차지했다. '배터리 충전기에서 아이를 떼어내시오.' 이 콘테스트에서 지금까지 뽑힌 경고문들은 더 기가 막히다. 섭씨 538도 열을 내는 권총 모양 열풍기에 '이 공구를 헤어드라이어로 사용하지 마시오'라는 경고가 붙어 있었다. 화장실 변기 청소용 솔에는 '몸을 닦는 데 쓰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부엌칼에는 '절대로 떨어지는 칼을 잡으려 시도하지 마시오'가 적혀 있다. 지도가 그려진 칵테일용 종이 냅킨에는 '주의: 항해에 이용하지 마시오'라는 문구까지 등장했다.

미국 NBC는 "거액의 소비자 피해 배상 소송이 많기 때문에 기업들은 '미리 경고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소송당할 수 있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거나 혹은 우스꽝스러운 경고문이 넘쳐난다"고 분석했다.

1960년대부터 이 제도가 시행된 미국에서는 관련 소송 액수가 수백~수천만 달러를 넘는 경우도 많다. 상대적으로 소송을 제기하기 쉬운 구조인 데다가 이를 통해 먹고사는 변호사가 많은 것도 한몫했다. 업계에서는 "이런 소송에 대비하다 보니 '이 세상 모든 일'에 '경고'를 해야 하는 지경이 됐다"는 불평도 나온다. 로버트 도리고 존스 미시간 소송오용감시센터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법원에서 막무가내로 제조사의 사고 책임을 묻는 소송들을 기각하면 제품에 붙는 황당한 경고문들도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했다.

김정석 삼성전자 홍보부장은 "우리나라도 제조물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사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며 "전자제품 관련 사고가 일어나거나 배상 책임을 묻는 판결이 나오면 이를 분석해 제품설명서를 보완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