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9월 1일 새벽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을 명령했다. 독일군은 먼저 발트해 항구 '단치히 자유도시'에 포탄을 퍼부었다. 나치당 당수가 국제연맹 고등판무관 관저에 들이닥쳤다. "2시간을 주겠다. 도시를 떠나라." 폴란드계 우체국 직원들이 저항했다. 손에 쥔 무기는 권총 몇 자루, 경기관총 3정, 수류탄 서너 개가 고작이었다. 15시간을 버티다 대부분 붙잡혀 처형됐다. 폴란드군은 7일 만에 괴멸됐다. 1만명을 태운 피란선마저 발트해에 침몰했다.
▶단치히는 기구한 땅이다. 중세부터 주인이 엎치락뒤치락 바뀌다 1차 대전 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도시가 됐다. 폴란드가 항구·철도·우편을 쥐고 있었지만 주민 95%가 독일계였다. 한 영국 시인은 '슬라브인의 왕관에 박힌 독일제 진주'라고 불렀다. 히틀러는 폴란드에 단치히를 송두리째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문제는 주변 유럽국들의 태도였다. '차라리 단치히를 히틀러에게 넘겨주면 전쟁은 피할 수 있다'고 오판했다.
▶엊그제 폴란드 지성 19명이 유럽 신문 세 곳에 기고문 '왜 단치히를 위해 죽어야 하는가?'를 실었다. "서방 강국은 단치히의 파괴를 눈감으면 자국민은 구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결국 히틀러는 파리를 점령하고 런던에 폭탄을 쏟아붓지 않았는가." 목숨 걸고 단치히를 지키지 못한 9월 1일 2차 대전이 시작됐고 유럽이 짓밟혔다는 통한(痛恨)이다. 그들은 어떤 데자뷔(旣視感)를 느낀 걸까. 유럽 국가들이 그때 단치히를 포기했듯 지금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넘기면 다시 전쟁이 몰아친다고 본 걸까.
▶이번 주 EU는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나토 신속대응군 출동, 2018년 러시아월드컵 보이콧 같은 결기를 다지고 있다. 그러나 푸틴은 "맘만 먹으면 2주 안에 키예프를 점령할 수 있다"고 으름장이다. 어제 우크라이나는 휴전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크렘린궁은 양국 정상이 통화는 했지만 휴전은 아니라고 잡아뗀다. EU도 사정은 복잡하다. 프랑스는 러시아에 상륙함을 팔아야 하고, 독일은 러시아 가스가 끊기면 당장 올겨울이 춥다.
▶'왜 단치히를 위해 죽어야 하는가?' 실은 1939년 단치히 함락 전 이미 프랑스 정객이 신문에 썼던 글 제목이다. 폴란드 지성(知性)들은 그걸 패러디해 '왜 우크라이나를 위해 죽어야 하는가' 하고 묻는 셈이다. 귄터 그라스 소설 '양철북'은 2차 대전 단치히가 무대다. 주인공 소년의 아버지가 독일군과 싸우다 죽는다. 그라스가 말했다. "더 큰 폭력으로 되풀이하는 것, 역사는 그 같은 반복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