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 승리의 최대 미스터리는 철쇄(鐵鎖·쇠사슬) 설치 여부이다. 10배가 넘는 대규모의 일본 해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울돌목에 흐르는 조류였다고 한다면, 이 조류를 이순신이 어떻게 이용했단 말인가? 이 부분에 대해 두 가지로 의견이 나뉜다. 하나는 해협 양쪽에 쇠사슬을 설치해 급류에 떠내려 오다시피 하는 일본 배들이 이 쇠사슬에 걸려 엎어지고 부닥치면서 난파당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철쇄 설치가 후대에 만들어진 근거 없는 무용담이라고 보는 설이다. 후자가 현재 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다. 전자를 대표하는 기록이 이중환이 쓴 '택지리(擇里志·1751)'다. 여기에 쇠사슬을 설치했다는 이야기가 처음 나오고,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1799)'에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1548~1618)가 철쇄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일본 측에서는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 '정한역일한사적(征韓役日韓史蹟)' 등의 자료에서 철쇄를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철쇄가 설치돼 있었다는 쪽의 편을 들고 싶다. 울돌목의 가장 좁은 해협의 거리는 294m고 급류 시속은 11노트, 즉 시속 20㎞다. 여기에다 쇠사슬을 걸어 놓으면 급류에 떠내려온 일본 배들은 쇠줄에 걸려 넘어져 전복되고, 뒤에 따라오는 배들은 앞에서 전복되는 광경을 보면서도 뒤로 후퇴가 불가능하다. 서로 부닥치고 깨지면서 수장되는 것이다.
필자가 명량해전에서 죽은 일본 해적의 후손들을 몇 년 전 만나 "왜 졌느냐?"고 질문하니까 "로프 작전 때문에 당했다"는 대답을 들은 적이 있다.
신안군 섬에 사는 향토사학자 이야기로는 섬과 섬 사이 좁은 해협에 줄을 걸어놓고 지나가는 배를 사냥하는 방법을 '배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완도, 진도 그리고 신안군 일대에는 1000개가 넘는 많은 섬이 밀집돼 있다. 해상왕 장보고가 죽은 이후에는 그 잔존 세력이 이 지역에서 해적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 해적들이 일찍부터 '배널이' 방법을 이용해 개성, 한양으로 곡식을 싣고 올라가던 조운선(漕運船)들을 가끔 털었다는 것이다. 울돌목의 철쇄는 '배널이'의 확대판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