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통일 독일제국 탄생이 선포되었다. 안톤 폰 베르너의 '독일 제국의 선포'는 이 장면을 영웅적으로 그려냈다. 1885년 비스마르크(1815~1898)의 70회 생일 기념으로 그린 이 그림에는 독일 통일 주역이 모두 등장한다. 화면 왼편 휘장 아래 당당하게 서 있는 사람이 프러시아 황제 빌헬름 1세이고, 화면 중앙에 흰옷을 입은 사람이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이다. 그 옆은 여러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참모총장 몰트케이다.

1871년의 통일 독일제국 선포는 비스마르크가 정치적으로 오래 노력한 결과물이었다. 1862년 총리로 임명된 그는 현실적 통일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통일에 대한 열망은 높았지만, 방식에는 이견이 있었다.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를 포함하는 '대독일주의'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지역 내에서 자기들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강대해지고 있는 프러시아를 견제하고 있었다.

안톤 폰 베르너의 1885년작 ‘독일 제국의 선포’. 화면 가운데 흰옷을 입은 사람이 비스마르크다.

비스마르크는 서두르지 않았다. 1840년대에 이미 독일은 정치적 분열 상태에서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지속적 발전을 위한 통합 시장의 형성이 요구되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런 요구를 정치로 풀어나갔다. 현실 정치가인 비스마르크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계획인 '소독일주의'를 택했다.

우선 1866년 정치적 통일체인 북독일 연방을 발족하고 다음 해에는 관세동맹으로 남부 독일 국가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였다. 비스마르크는 통일을 위해서는 우선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에 맞설 수 있는 강국이 되어야 하며, 어쩌면 양국 간 충돌도 불가피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통일 준비 작업으로 국내적으로는 몰트케 장군 등과 함께 프로이센 군 전력을 강화했다. 국외적으로는 주변 강대국인 러시아와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벌일지도 모를 '형제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다양한 외교전을 펼쳤다.

사실 통일 독일이라는 새로운 강대국의 출현을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특히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는 독일이 계속 분열된 약체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와 관련된 프랑스의 태도를 교묘하게 왜곡해서 결국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발발 두 달도 안 돼 독일은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보란 듯이 프랑스의 심장 베르사유 궁에서 통일 독일제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는 법. 통일 이후에도 계속되는 비스마르크의 독단적 행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결국 젊은 황제 빌헬름 2세와 겪은 갈등으로 그는 1890년 총리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의 외교술은 기본적으로 개인적 네트워크에 의한 복잡한 밀실 조약에 따라 발휘된 것이었다. 특히 비스마르크는 삼제동맹(1873), 재보장조약(1887) 등 여러 장치를 통해서 오스트리아를 자기편으로 묶으면서 러시아와 프랑스가 가까워지는 것을 방해해왔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물러나면서 복잡하고 위험한 동맹 체제는 흔들리게 되고, 러시아와 프랑스는 우호적 관계를 맺게 된다. 러시아-프랑스-영국 대 독일-오스트리아의 1차대전 구도는 비스마르크 때 이미 씨가 뿌려진 것이다. 1차대전 전까지 외교는 모두 비공식적 밀실 정치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채 각국이 1차대전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후에 밀실 정치와 대규모 전쟁을 방지하려는 노력이 국제연맹 창립 제안으로 표현되었다.

양면적 평가를 받는 비스마르크는 1990년 동·서독이 재통일되면서 독일제국을 통일시킨 현실 정치가로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19세기 통일의 기억은 20세기에도 유효했으리라. 비스마르크에게 통일은 꿈이 아니라 현실 정치에서 풀어야 할 구체적 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