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해적’ 이석훈 감독을 만난 건 이 영화가 파죽지세의 화제작 ‘명량’을 꺾고 600만 스코어를 기록하며 닷새째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던 26일 오후였다. 서울 논현동 JK필름 사무실에서 차기작 ‘히말라야’ 준비 작업으로 분주하던 그는 “안 믿어져요. 고생한 스태프들 때문에 하루만이라도 ‘명량’을 이겨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현실이 될 줄은 저도 몰랐어요”라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교회 오빠 같은 선량한 마스크와 달리 현장에선 ‘OK 사인’에 인색한 ‘한 번 더’ 감독으로 악명 높다고 하자 “그거야 다 영화를 위해서였죠.(웃음) 아무튼 저 때문에 고생한 배우, 스태프들과 투자사 롯데 그리고 ‘해적’을 선택해준 관객들에게 큰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마음”이라며 겸연쩍어 했다.

한양대에서 영화를 전공한 이석훈 감독은 “언론에서 저희 영화를 최약체라고 언급할 때마다 모든 게 저 때문인 것 같고, 제 부족함이 170억 영화를 말아먹는 건 아닐까 싶어 여러 번 악몽을 꿔야 했다”며 적잖았을 흥행 강박에 대한 마음고생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는 “10회차 넘어가기 전에 남길씨가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고, 한번은 대형 수조가 깨져 이대로 영화 접는 건 아닐까 싶은 위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며 습관적으로 집게손가락을 이용해 안경을 고쳐 썼다. 둘 다 배우와 스태프들이 호흡을 맞춰가던 촬영 초반, 경기도 남양주 세트장에서 벌어진 사고였다.

보통 주연 배우들이 타는 말은 훈련이 잘 돼있어 별도의 지시 없이는 뛰거나 구르지 않는데 심야에 조명 스트레스를 받은 말이 돌연 컨디션 난조를 보인 게 화근이었다. 김남길은 낙마 직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 할 만큼 극심한 고통과 전신 마비 증세를 보였고, 옆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던 30분간 이석훈 감독의 아드레날린 분비도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했다.

“순간 비슷한 사고로 장애를 입은 크리스토퍼 리브가 생각났어요. 제 현장에서 앞길 창창한 배우 한 명이 이대로 사라지는 건 아닌가 싶어 별의 별 해괴한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하늘이 도왔는지 골절이나 신경 조직이 파괴되는 일은 없었는데 며칠 뒤 다시 촬영장에 온 남길씨한테 도저히 말을 다시 타라고 못 하겠더라고요.”

수조 사건은 김남길이 입원했을 때 벌어졌다. 야외 수영장처럼 커다란 수조를 지어 손예진이 바다에서 불상을 건져 올리는 장면을 찍기로 했는데 촬영 당일 부실 공사로 한쪽 면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남양주종합촬영소가 상수원보호구역이라 몇 톤 규모의 물을 받아두는 일도 힘들었는데 사흘간 어렵게 모아놓은 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인근에 주차돼있던 자동차들이 쓸려갈 정도로 아찔한 사고였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촬영장을 향하던 손예진이 일찍 도착해 테스트 촬영이라도 했더라면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촬영 초반 두 사고가 결과적으로 예방접종이 됐어요. 짐벌 세트에선 더 위험천만한 장면이 많았는데 다들 안전사고에 각별히 유의하게 됐거든요. 극중 산적 떼들이 상어에 끌려가는 배에 타고 쾌속 질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배도 너무 작아 물 위에서 균형을 맞추는 게 여간 쉽지 않았어요. 하루하루가 저희들한테는 모험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해적’ 흥행의 일등공신으로 꼽히는 철봉 역 유해진 얘기가 나오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이 필요 없는 좋은 배우이자 현장에서 교과서 같은 선배였다”고 했다. 예고편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음파음파’ 대사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도 들을 수 있었다.

이 감독은 “음파음파 대사가 나오기 전까지 코미디 영화다운 센 거 한 방이 없어 고민이 많았던 게 사실”이라며 “완도에서 김원해 선배가 유해진 선배에게 아이디어를 줬고, 그걸 유해진 선배가 기가 막히게 살려주신 거였다. 음파음파 장면을 보면서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제작진이 코미디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막상 현장에선 웃겨도 나중에 보면 싱겁거나 별 거 아니라 편집하게 되는 경우도 많거든요. 너무 애드리브에 의존하면 시간 계산을 잘못해 오히려 함정에 빠질 수도 있고요. 그럴 땐 합의된 콘티와 대사로 먼저 찍어놓고 상황이 허락되면 현장 아이디어를 반영하는 식으로 영화를 채우는 게 정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윤제균 감독님도 이런 방법을 즐겨 쓰시더라고요.”

유해진의 인성을 가늠할 수 있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촬영 중반 무주에서 제작부원 한 명이 감독을 찾아가 집에 가겠다고 했단다. 중위로 전역한 지 한 달도 안 된, 열정 가득했던 스태프의 퇴사라 모두의 아쉬움이 곱절로 컸다. 이런 일을 처음 겪은 감독은 “이렇게 중간에 그만두면 후회하게 될 지 모른다”며 말렸고, 속마음을 나누던 두 사람은 결국 눈물까지 흘리게 됐다.

때마침 새벽 촬영을 마치고 조달환과 숙소로 향하던 유해진이 이 모습을 봤고, 자초지종을 물은 뒤 자기 방에서 얘기를 더 하자며 소주와 오징어를 사갔다고 한다. 유해진의 진심어린 조언과 설득으로 이 스태프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짐을 풀 수 있었다. 이경영 유해진 등 관록 있는 배우들 덕분에 ‘해적’은 언쟁 한번 없었고, 야반도주하는 스태프도 나오지 않았다.

이석훈 감독은 “예산과 시간에 쫓겨 영화를 찍다보면 상대방의 흉허물이 눈에 더 잘 들어오게 마련인데 우리 ‘해적’은 서로 양보하고 배려해주며 분위기가 더없이 좋았다. 좋은 사람들의 고운 결이 영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그걸 관객이 알아봐주신 게 아닐까 싶다”며 공을 돌리기도 했다. 은연중에 연출 실력이나 명장면을 슬쩍 소개하는 다른 감독들과 달랐다.

이 감독의 차기작 ‘히말라야’는 황정민을 비롯해 ‘댄싱퀸’ 멤버들이 다시 모여 만드는 영화다. 황정민이 “이석훈 감독 아니면 안 된다”고 제작자 윤제균을 설득했고, 이들은 도봉산에 이어 다음 달 지리산으로 전지훈련을 떠날 계획이다. 네팔 크랭크 인은 황정민의 ‘곡성’ 촬영이 끝나는 11월부터다.

“황정민 선배, 참 감사한 일이죠. 흔히 영화 한 편 끝내면 배우, 스태프들이 가족처럼 돈독해지거나 다신 안 보거나 둘 중 하나거든요.(웃음) 물론 현장 분위기가 안 좋았어도 영화가 흥행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웃고 보는 게 영화의 아이러니입니다. 저는 결과 못지않게 과정도 중시하는데 ‘해적’처럼 둘 다 좋으면 그야말로 인복이 있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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