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빠서 도저히 벌초할 시간이 없어요. 벌초 대신 해줄 수 있나요?"
서울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모(49)씨는 추석이 다가오자 급히 '벌초 대행업체'를 찾았다. 김씨는 "작년까지는 친척 중 한 사람이 직접 벌초를 했지만 올해부터는 관리할 사람이 없어졌다"며 "조상 묘를 방치하는 불효(不孝)를 저지를 순 없어 업체를 찾았다"고 했다. 김씨 전화 한 통으로 충남 공주에 있는 묘 6기에 벌초 전문가 3명이 투입됐다. 업체 측은 이틀에 걸쳐 말끔히 벌초를 끝내고 김씨의 휴대전화로 벌초 '인증사진'을 보냈다. 벌초 전 모습과 벌초 후 모습을 '비포 앤드 애프터'로 찍은 것이다.
사무실에서 휴대전화로 사진을 받아 본 김씨는 "작년에 직접 꼬박 사흘 걸려 벌초하느라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업체에 맡기니 잡초와 나무까지 말끔히 정리돼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김씨는 "생각보다 죄책감이 들진 않는다"며 "이렇게라도 벌초를 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추석을 2주 앞두고 '벌초 대행업체'가 대목을 맞았다. "바쁜 자식 대신 조상묘 좀 봐 달라" "올해는 못 찾아뵐 것 같으니 벌초를 대신 해달라"는 주문 전화가 쉴 새 없이 걸려오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성업 중인 벌초 대행업체는 500여 곳. 이들은 "내 집안 선친을 섬기는 마음으로 벌초하겠다"는 문구를 내걸고 바쁜 후손들 대신 조상 묘를 다듬고 있다.
비용은 묘지 10평 기준으로 6만~8만원 선. 벌초 대행업체에 전화로 예약하고 선금을 입금하면 예초기 등 전문 장비를 갖춘 인부 2명이 바로 투입된다. 가족이 동행할 필요도 없다. 한 벌초 대행업체는 "주소만 대면 다 알아서 찾아간다"며 "산소를 찾기 어려운 경우에는 초행 때만 동행하면 다음부터는 알아서 해준다"고 말했다. 묘를 잘 찾지 못하면 묘 주변 경치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 그곳이 의뢰자의 조상 묘가 맞는지 확인하기도 한다.
벌초 대행은 10여 년 전부터 있었지만 최근 3년 사이 부쩍 예약 전화가 늘었다는 것이 업체 설명이다. 한 업체는 "10년 전에는 추석을 앞두고 하루 2~3건 예약이 왔다면 최근 3년 사이에는 예약 전화가 하루 30통씩 걸려온다"고 했다. 3년째 벌초 대행업체를 이용하는 사업가 송모(61)씨는 "100만원에 가까운 벌초 비용은 친척 10여 명이 십시일반 모아 낸다"며 "적지 않은 돈이지만 조상 묘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불효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했다.
대행업체를 통해 벌초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다. 형제 친척이 모여 우애를 다지고 조상을 생각할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삼형제 중 장남으로 20년째 직접 벌초하는 이성희(55)씨는 "벌초는 어떤 의식 같은 것이고 조상을 찾아뵙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라며 "업체에 맡긴다는 게 상상이 안 된다"고 했다. 대구에 사는 이씨는 매번 지인에게서 예초기와 낫을 빌려 경북 경산과 김천에 있는 조상 묘를 벌초한다. 그는 "고생스럽다는 생각보다는 '추석 때 아니면 언제 조상을 찾아뵙겠느냐'는 생각이 크다"고 했다.
전남 해남에 있는 조상 묘를 손수 돌보는 이모(52)씨는 "벌초가 힘들다며 대행업체에 맡기자는 아들에게 '상놈'이라고 꾸짖었다"며 "벌초라는 전통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