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경주'를 봤다. 많은 사람에게 이 영화는 소유와 정기고의 노래 '썸'의 가사(요즘 따라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너)를 패러디해 말할 수도 있는 영화다. 홍상수 거인 듯 홍상수 거 아닌 홍상수 거 같은 영화(홍상수는 경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 '생활의 발견'을 만들었다). 영화를 만든 사람은 영화 '망종'과 '이리'의 감독 장률이다. 그는 중국 대도시의 변두리와 몽골 초원, 비극적 폭발 사고가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잊힌 도시 이리, 탈북자와 조선족의 경계인 두만강의 한 마을을 영화로 그렸다. 공간을 유독 예민하게 감각하는 이방인 눈에 비친 경주는 한밤중 '거대한 무덤'의 모습으로 그렇게 펼쳐진다.
영화는 경주에서 보낸 하루를 다룬다. 친한 형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한 베이징대 정치학과 교수 최현(박해일)은 7년 전 경주의 한 찻집에서 본 춘화(春畵)를 잊지 못해 충동적으로 경주에 간다. 그곳에서 옛 연인과 재회한 그는 남편의 의처증 때문에 빨리 가야 한다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씁쓸해진 마음을 추스르듯 그는 기억 속의 찻집 아리솔로 향한다. "7년 전 이 자리에 있던 춘화 못 봤나요?" 대뜸 야한 그림을 찾는 이 수상한 남자를 아리솔 주인 공윤희(신민아)는 변태로 여긴다.
그의 기억 속 춘화가 있던 아리솔의 주인은 옛날 그 여자가 아니다. 7년 전 선배들과 차를 마시며 바라보던 그림도 이젠 없다. 최현은 찻집을 나와 경주를 배회한다. 그리고 경주 시내에서 엉뚱한 관광 안내원과 사연이 많아 보이는 여자를 스치듯 지나간다. 다시 찻집 아리솔로 발을 돌린 그는 그곳에서 다시 윤희와 얘기를 시작한다. 별안간 비가 내린다. 풍경 소리가 아득히 들린다. 아리솔은 이때 천년 도시의 작은 낙원처럼 그들 앞에 놓여 있다.
그에게 마음을 연 윤희는 자기가 나가는 저녁 계 모임에 그를 데려간다. 경주의 한 술집에서 만나 술을 마시는 장면은 너무나 홍상수적이라 결국 홍상수적이라는 동어반복으로밖에 말할 수가 없는데, 그곳에는 '경주의 여신'이라는 아리솔의 주인 공윤희를 짝사랑하는 형사와 최현이 베이징대 교수라는 걸 알고 어떻게든 그에게 잘 보이려는 경주 모 대학의 교수, 그리고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익숙한 얼굴의 남자(류승완 감독이다!)가 모여 있다. 이 괴상한 술자리는 점점 더 기이하게 흘러가는데 그것은 송창식 노래 '고래사냥'의 가사처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어서 결국 이들은 고래를 잡으러 가는 것보다 더 황당한 짓을 한다. 술김에 '진입금지' 푯말이 붙어 있는 경주 천년 왕의 무덤 꼭대기를 뚜벅뚜벅 걸어서 올라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장률의 영화는 교수(유부남이다)가 과거의 연인(유부녀다)을 만나며 시작되는 홍상수의 영화와 비슷하게 시작되지만, 7년 전의 시간을 거슬러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끝난다. 이 영화 속 남녀는 황당한 모텔 활극을 보여주는 홍상수의 작품과 달리 남녀가 입을 맞추지도, 옷을 벗지도, 잠을 자지도 않는다. 그들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주인공들처럼 정적이고 고요하다.
"귀 만져봐도 돼요?"
영화 속 신민아의 이 대사를 듣고 좀 많이 웃었다. 자기 집에서 죽은 남편을 떠올리며 박해일을 바라보는 그 장면이 절대 웃길 리 없는데도 말이다. 이 장면은 내게 불멸의 사랑 영화 '봄날은 간다' 이영애의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대사를 떠오르게 했다. '경주'는 역시 사랑 영화다. 영화 속에서 교수로 등장하는 가수 백현진의 노래 제목처럼 '사랑', 사랑 말이다.
처음 경주에 갔을 때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건 무덤이었다. 경주 왕릉은 내가 알던 무덤이 아니었다. 커도 보통 큰 게 아니었다. 더 놀란 건 그 무덤 앞에서 소릴 지르며 배드민턴을 치거나 함께 김밥을 먹는 가족이 참 많다는 것이었다. 경주 사람들 마음속에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이 일상처럼 스며 있다는 건 내겐 충격적이었다. 이런 느낌은 꼭 나만의 것이 아니어서 영화 '경주'에 등장하는 밤의 대능원 모습이 꼭 영화 'ET'의 한 장면 같다고 묘사한 사람도 종종 보였다. 경주란 그런 도시다. 과거의 시간이 현재에 스며들어 사람들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곳, 그런 곳에서 천공의 별을 본다면 과거의 그림자가 아득하게 우릴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일 것이다.
그림을 그릴 줄 안다면 그때 내가 본 모습들을 연필로 스케치했을 것이다. 나는 그냥 경주가 좋아졌다. 경주 빵집이 눈에 밟힐 정도로 많은 것도 좋았고, 커다란 호수가 있는 것도 좋았고, 이런저런 골목이 많다는 것도 좋았다. 낮에도 좋았고 밤에는 더 좋았다. 밤의 대능원엔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기묘한 아우라가 있다.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신라 왕들의 무덤은 신비롭다 못해 처연함마저 주는데, 그곳을 걷다 보면 죽은 자가 산 자를 향해 어떤 말을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게 경주는 천년이 넘은 무덤 옆에서 아이가 뛰어놀고, 청춘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젊은 부부가 배드민턴을 치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죽음 앞에서도 삶은 움직이고, 무덤가에서도 뿌리 깊은 나무와 꽃이 자라나는 그 기막힌 모습 때문에 나는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늘 이 먼 도시까지 내려와, 상처 하나를 슬며시 내려놓고 갔던 것 같다. 친한 형의 죽음과 소원해진 아내 때문에 문득 이곳에 불시착한 최현처럼 말이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의 말에 깊게 베여 상처받았다면, 그 상처 때문에 숨 쉬기가 힘들어 걸을 수 없다면,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멍해진다면,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거리의 풍경이 돌연 멈춰 선다면,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너무나 자명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들끓는 대낮 도로에서 울음을 삼켰다면, 당신은 아마도 경주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 도시는 인간이 감당하기 가장 힘든 슬픔인 죽음마저도 자신의 일상으로 끌어안는 듯 풍경을 몸속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장률 감독 작품. 박해일, 신민아 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