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에 의한 성매매, 맨몸에 끓는 물을 들이붓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때리는 잔학성, 시신을 암매장한 뒤 신원을 못 알아보도록 얼굴을 태우고 시멘트를 바른 악마 같은 범행. 세상을 놀라게 한 김해의 여고생 윤모(16·고 1)양 피살 사건은 그러나 경찰이 초기에 확보한 단서를 적극적으로 확인했다면 막을 수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조선일보 취재 결과 경찰은 관할을 떠넘기느라 시간을 허비했고 나중에 살인 공범으로 붙잡힌 가해자들을 추적할 기회를 놓쳤다.
경찰과 관련자들에 따르면, 윤양이 "친구를 만난다"며 집을 나간 건 지난 3월 15일이었다. 윤양은 평소 쓰던 교통카드를 두고 나갔다. 단 한 번도 허락 없이 외박을 한 적 없는 딸이 들어오지 않자 아버지 윤모(50)씨는 가출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음 날 오후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 사건을 배정받은 김해중부경찰서 형사팀은 윤양의 마지막 통화 내역을 확인해 김모(24)씨를 의심했다.
윤양이 사라진 나흘 뒤인 3월 19일 윤씨의 집에서 컴퓨터 본체가 사라졌다. 윤양이 카카오톡을 할 때 쓰던 컴퓨터였다. 이웃들은 "처음 보는 남자들이 갖고 나갔다"고 했다. 아버지 윤씨는 도난 신고를 했다. 경찰은 윤씨 집 근처 CCTV에 마지막 통화자인 김씨가 찍힌 걸 확인했다. 김씨는 윤양을 살해하고 시신을 암매장한 일당과 한 패거리라는 것이 나중에 밝혀진다.
그는 경찰에 붙잡힌 뒤 "경찰이 카톡을 뒤져 우리를 찾을까 봐 컴퓨터를 훔쳤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그러나 도난 사건에 주목하지 않았고, 김씨를 적극적으로 추적하지 않았다.
3월 29일 오후 뜻밖에 윤양이 집으로 돌아왔다. 윤양은 아버지에게 강제 성매매, 감금, 학대 등에 대해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다시 가야 한다. 그 오빠 나쁜 사람 아니니 벌 받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했다. 이것도 김씨 등이 시킨 것이었다. 김씨는 경찰에서 "경찰이 수사하는 것 같아서 윤양을 보내 아버지를 안심시키려 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아버지 윤씨는 김해중부서 담당 형사에게 "내일 딸을 데리고 경찰서로 가겠다"고 말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는 다음 날인 3월 30일 딸을 데리고 평소 다니던 부산 연제구의 한 교회를 먼저 들렀다. 고등부에서 예배를 하던 윤양은 그러나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윤씨는 "딸이 화장을 한 또래 여학생들에게 불려 나가 같이 사라졌다"는 말을 지인에게서 들었다. 문제의 여학생들은 예배 3시간 전쯤부터 교회에서 윤양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윤양을 학대해 숨지게 한 것으로 밝혀진 여중생들이었다.
윤씨는 김해중부서 형사에게 "딸이 사라졌다. 강제 성매매를 당한 것 같다"고 알렸다. 형사는 그러나 "부산에서 사라졌으니 부산에서 신고하라"고 대답했다. 윤씨는 인근 부산연제경찰서에 문의했다. 연제서는 "수사를 해온 김해에 신고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윤씨는 다음 날인 3월 31일 김해중부서에 가 다시 신고했다. 신고 사실을 통보받은 윤양 담당 형사는 그러나 '범죄 혐의가 없다'고 말했다. 윤양 사건은 단순 가출 담당인 여성청소년계로 넘어갔다.
윤양이 사라졌던 교회 CCTV에는 가해 여학생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지만 경찰은 이를 12일 넘게 확인하지 않았다. 가해자들은 그사이 윤양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김해중부서 측은 4월 9일에야 부산연제서에 교회 CCTV 확인을 요청했고, 연제서는 다음 날 "우리는 얼굴을 모른다"고 답변했다. 4월 11일 아버지 윤씨의 친구가 교회를 찾아가 CCTV 화면을 캡처, 김해중부서 관계자에 전해줬다. 경찰이 화면에서 가해 여학생들을 확인한 것은 4월 12일이었다. 윤양이 맞아 숨진 지 이틀 뒤였다.
서울지역 한 경찰서 간부는 "윤양이 돌아온 후 성매매 강요와 학대 사실을 알렸고 다시 실종됐는데도 이를 첫 번째 실종과 마찬가지라고 판단한 것은 중대한 실수"라고 말했다.
윤양을 살해한 범인들은 다른 사건으로 대전 경찰에 붙잡혔고, 윤양 실종과 이들이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김해중부서는 김씨와 여중생 3명으로부터 자백을 받아냈다. 그리고 5월 2일 경남 창녕의 한 과수원에서 암매장된 윤양의 시신을 찾아냈다.
김해중부서 고위 관계자는 "김씨를 추적한 것도 강력 사건 용의자가 아니라 가출한 윤양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했던 것이다. 비상 상황이라고 봤다면 이렇게 수사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단순 가출 사건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 CCTV 확인이 늦어진 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