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동부의 창이공항에서 차를 타고 중앙 도심 쪽으로 40분을 달려가자 낮은 언덕 위에 마치 나무에서 뻗어나온 가지처럼 공중 회랑(回廊)으로 연결된 빌딩들이 나타났다. 입구에는 생명과학도시라는 뜻을 지닌 '바이오폴리스(biopolis)'란 표지석이 서 있었다.

올해로 설립 11주년을 맞는 바이오폴리스는 전 세계 바이오산업 연구의 '최전선'이다. 글로벌 10대 제약사 중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스위스 노바티스, 미국 머크·애보트가 이곳에 연구소를 두고 있다. 총 면적 34만㎡의 바이오폴리스에는 이들을 포함해 유명 바이오기업 38개와 정부 연구소 10개가 입주해 있다. 도시 국가인 싱가포르 안에 또 다른 과학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글로벌 바이오 연구의 최전선 '바이오폴리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싱가포르 경제의 핵심은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전자산업이었다. 산업별 매출에서 전자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당시 51%나 됐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와 중국의 도약으로 싱가포르 반도체 산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싱가포르가 찾은 새로운 성장 동력은 바이오산업이었다. 그 첫 단계가 2003년 과거 영국군 주둔기지에 문을 연 바이오폴리스다. 이곳은 우리나라 대덕연구단지와 마찬가지로 정부 주도로 설립됐다. 하지만 연구의 상업화 성과가 더딘 대덕과 달리 바이오폴리스는 기초연구에서 임상시험, 생산에 이르는 바이오산업의 전(全)주기를 완성했다.

현재 바이오폴리스 서쪽에 마련된 투어스메디컬파크에는 GSK와 머크, 노바티스, 화이자 등 25개 글로벌 제약사들의 생산공장이 들어서 있다. 연구단지가 연구 차원에 그치지 않고 제조업 발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싱가포르 경제에서 차지하는 바이오산업의 비중(부가가치 기준)은 2000년 10%에 불과했으나 2012년에는 26%로 뛰어올랐다. 싱가포르 전 산업 중 단연 1위다.

비결은 무엇일까. 싱가포르 과학기술청 바이오의약연구위원회 벤저민 시트(Seet) 위원장은 "싱가포르는 작은 나라여서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을 육성해야 했다"며 "산업기반이 부족한 상태에서 최선의 선택은 외국 기업 연구소의 유치였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의 생명과학 연구단지‘바이오폴리스’에서 한 연구원이 생명과학 실험을 하고 있다(왼쪽). 바이오폴리스는 정부가 지원하는 첨단 연구 인프라와 우수한 연구 인력 덕분에 GSK, 노바티스 등 세계적인 제약·바이오 기업 38개사의 연구소를 유치했다. 연구단지의 각 건물은 공중 회랑으로 연결돼 연구원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다(오른쪽).

공용시설 많아 몸만 와도 연구 가능

싱가포르는 중국·일본·인도 등 거대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기업 연구소로는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고 있다. 다른 공산품과 달리 의약품은 인종과 민족에 따라 효능이 달리 나타난다. 따라서 메이저 시장과 가까운 곳에 연구소를 두는 것이 유리하다. 싱가포르는 아시아 주요 국가는 물론이고 미국·유럽으로 가기도 편한 항공 교통의 요충지다. 게다가 영어 공용화 정책에 힘입어 의사소통이 편리한 것도 장점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요인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바이오폴리스의 최대 강점은 첨단 연구 인프라와 우수 인력이다. 바이오폴리스에 있는 영상 실험실에 들어서자 연구원들이 입은 가운에 달린 회사 마크가 제각각이었다. 입주 기업들을 위해 싱가포르 정부가 제공한 공동실험실이기 때문. 바이오 연구에 필수적인 동물실험실, 유전자 해독장비도 공용으로 제공돼 저렴한 비용을 내고 사용할 수 있다. 연구소마다 비싼 장비를 들여놓을 필요가 없으니 설립 및 운영 비용이 확 줄어든다. 바이오폴리스가 해외 업체들에 "전원만 꽂으면 된다(Plug & play)"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몸만 오면 연구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바이오폴리스에는 2500여명의 연구원이 일하고 있다. 절반은 싱가포르 현지인이다. 정부는 바이오폴리스 설립과 더불어 과학 전공자에게 8~9년간 장기 해외 유학을 지원했다. 학위를 딴 후에는 귀국해 5~6년간 근무한다는 조건으로 우수 인력을 육성한 것. 이들 중 상당수가 바이오폴리스에 일터를 잡았다. 또 싱가포르국립대(NUS)는 2006년 미 듀크대와 공동으로 의학대학원을 설립, 의대 졸업생이 25% 증가했다. 바이오 연구 인력을 확보하기가 그만큼 쉬워진 것이다.

연구의 개방성도 중요하다. 바이오폴리스 곳곳에서는 다양한 인종의 연구원들이 열띤 토론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노화방지 화장품 연구를 진행하는 아모레퍼시픽 싱가포르연구소의 심범 박사는 "공용 연구실과 세미나실, 식당, 카페에서 다른 업체 연구원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바이오폴리스는 연구 영역을 의약품에서 화장품과 식품으로 확대하고 있다. 세계 1위의 화장품 업체인 로레알이 2012년, 생활용품 업체 유니레버도 2013년 이곳에 연구소를 세웠다. 식품업체 다농, 네슬레 연구소도 이곳에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바이오폴리스 성공을 발판으로 바로 옆에 IT융합산업 중심의 연구단지 퓨저노폴리스(Fusinopolis)와 방송 등 미디어산업 중심의 미디어폴리스(Mediapolis)도 건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