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 때 이순신 장군이 적을 빠른 물살 속으로 끌어들이는 유인책과 포격(砲擊)전술로 승리했다면, 영화 '명량'의 김한민 감독은 '선택과 집중의 미학'으로 흥행 성공을 이뤘다고 생각합니다. 즉, 장군과 관련된 숱한 사실 중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가장 재미있고 의미있는 것들만 과감하게 추려낸 뒤, 역사의 순간을 공들여 재현함으로써 볼만한 대중영화가 된 것입니다.
며칠 전엔 대통령까지 '명량'을 관람했습니다.이제 '국민 영화'에 오를 기세입니다. 사회적 분위기 등 영화 외적인 변수들도 흥행을 돕고 있다는 분석도 많습니다. 세월호 참사 등 국가적 난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 현실이 장군의 남성적 리더십을 커다란 그리움으로 돌아보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실제로 영화의 여러 대목에 힘주어 넣은 이순신(최민식)의 대사들은 지금 우리들에게 각별한 울림을 안깁니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야 한다'는 그의 지론,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말리는 아들에게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忠)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순신 같은 지도자가 오늘엔 왜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명량'의 흥행에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매력이 큰 견인차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요. 어느 논객은 '명량은 솔직히 졸작'이라며 '흥행은 영화의 인기라기보다 이순신 장군의 인기로 해석해야 할듯'이라고 말했다는데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돈 내고 입장권 사서 영화 본 수 많은 한국 관객들이 바보입니까? 완성도 불문하고 이순신을 다뤘기에 보러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모두들 소문과 정보로 각자 판단을 하고 영화관으로 달려갑니다.
'명량'에서 오히려 주목해야 할 점은 쉽지 않은 소재를 재미있게 만든 감각입니다. 뛰어난 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 시대가 그리워할 인물을 소재로 택한 것, 둘째는 그 엄숙한 소재를 '따분하지 않은 영화'로 빚어낸 능란한 솜씨입니다.사실 대중영화 소재로 이순신 만큼 어려운 인물도 별로 없다고 봅니다. 건국 이래 이 분 만큼 여러차례 영화·연극· TV드라마 등으로 극화된 인물도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한 편의 이순신 영화를 잘못 만들었다가 자칫하면 하품나는 사극에 그치기 십상이니까요.
감독은 영리한 전략을 택했습니다. '선택과 집중'입니다. 이 영화는 이순신에 관해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던 많은 사실들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거북선, 원균과의 갈등 같은 건 영화 초반 단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초스피드로 요약한 뒤 그걸로 끝입니다.'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있는' 충무공도 영화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순신 하면 해전에서 학(鶴)의 날개처럼 전함들을 펼쳤다는 '학익진(鶴翼陣)'이 유명한데 '명량'에서는 구경할 수 없습니다. 대신 '명량'의 이순신은 '일자진(一字陣)'을 펼칠 뿐입니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던 그의 드라마틱한 최후도 '명량'에는 없습니다.
익숙한 것들을 솎아낸 자리에 이 영화는 '명량대첩'이라는, 이순신 최악의 투쟁을 가득 채워 넣었습니다.전투의 드라마틱한 디테일을 자세히 펼쳐내며, 그 과정에서 빛난 감동적이고 놀라운 리더십을 부각합니다.
'명량'에서 '선택과 집중의 미학'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부분은 해상 전투 장면입니다. 무려 1시간이 넘도록 상세히 묘사하며 한국영화 속 전투 장면 묘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고 있습니다. 상업영화에서 단일 전투 장면을 이토록 길게 묘사한다는 것은 모험적인 시도입니다. 치고받고 싸우는 활극이 아무리 오락성이 있다 해도, 1시간이 넘도록 계속 싸우는 영화는 많지 않습니다. 지루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량'은 그 긴 해전을 보면서 계속 집중하게 됩니다.해전의 양상들을 다채롭게 펼쳐내며 단조로움을 깨고 있기 때문입니다. 액션 게임의 스테이지가 바뀌듯, 전투의 단계가 계속 변화합니다. 우리 수군의 함포(艦砲)대 왜군의 조총이 서로 한참 맞붙더니, 이어 저격병과 화살의 대결이 나옵니다. 그 후엔 백병전이 벌어져 아수라장이 됩니다. '충파(沖破·배를 부딪쳐 적함을 부수는 것)'도 볼거리를 선사합니다.
전쟁사 전문가들은 당시 백병전이나 '충파'가 있었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며 고증상의 오류를 지적하지만, 1시간이 넘는 전투 신을 계속 지켜보게 만드는 시나리오와 다채로운 카메라 워크 등 솜씨는 인정해 줄만 합니다. '흔히 해 오던 대로' 영화를 찍는 대신, 리스크를 감수해 가면서 영화적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태도가 '명량'을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진부한 것들을 피해 간 '명량'을 보면서, 1994년 한국영화의 흥행 기록을 깬 임권택 감독의 판소리 소재 영화 '서편제'를 떠올려 봅니다. 이 영화가 취했던 태도 역시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었습니다. 흔히 판소리 수련의 세계를 말할 때마다 폭포수를 이기도록 발성 연습을 하거나, 허리에 광목천을 감고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 똥을 먹는 소리꾼 이야기들이 회자됩니다. 이런 에피소드들이 '서편제'에는 없습니다. 우연히 그렇게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임 감독은 "진부한 영화가 되지 않도록 제작 초기부터 상투적 에피소드들은 넣지 않기로 정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 감각이 있었기에 판소리라는 쉽지 않은 소재로 영화를 성공시켰던 것이죠. '서편제' 개봉 후 뒤이어 선보여 '아류작'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으며 흥행·비평 양면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또 한 편의 판소리 영화가 '서편제'가 배제했던 상투적 판소리 수련 모습들을 모두 집어넣었다는 사실은 음미할 만합니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영화와 관습에 안주하는 영화의 차이는 적지 않을 것입니다. '명량'의 성공을 보며 영화적 새로움은 대중영화에서도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