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면 인터뷰에 앞서 이성미에 대한 편견이 없지 않았다. 한 성격 하는 연예인, 까칠하고 깐깐할 것 같다는 절반의 단정을 지었던 것도 사실이다. 브런치토크를 마친 지금, 그녀에 대한 인상을 조금은 수정해야겠다. 나긋나긋한 말투 속에 숨겨진 카리스마, 그러니까 ‘작은 거인’이라는 그녀를 향한 세간의 별명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다 이 동네 사시는 분들이에요?(이날 브런치토크는 목동에 위치한 한 레스토랑에서 진행됐다.)

전 상암에서 왔어요.

아이고, 좋은 동네 사시네.

전 목동이요.

목동 아줌마들 세다고 소문났던데…. (좌중 웃음)

실제로 보니 피부가 정말 고와요.

고마워요. 한 꺼풀 씌우고 나와서 그런가 봐요.

아무래도 의학의 도움이 있겠죠?

저는 의학의 도움을 별로 안 좋아해요. 그냥 가끔 경락 받아요. 오십견이 오기 시작해서 어깨가 너무 아프거든요. 피부는 원래 좋은 것 같아요. 그래도 마사지는 가끔 받아요. 목욕탕에서 아줌마들이 해주시는 거요.

대중목욕탕을 간다고요?!

저 다니는 목욕탕은 때 미는 아줌마들이 30년을 한결같이 그 자리에 계세요. 되게 조그만 목욕탕이에요. 사실 목욕탕 가는 게 제일 부끄럽잖아요. 특히 저희(연예인) 같은 경우에는요. 그래서 쭉 그 목욕탕에 다녀요.

정말 목욕탕에 가는군요.

때도 밀어요. 심지어 때도 많이 나와요.(웃음)

데뷔 때나 지금이나 몸매가 여전한 것 같아요.

조금 빠졌어요. 데뷔할 때보다 좀 빠졌고, 아프고 나서 좀 빠졌고요.(이성미는 2013년 1월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뭘 잘 안 먹어요. 까다롭게 안 먹는 게 많아요. 남들 다 먹는 사골도 안 먹고 도가니도 안 먹고 닭발도 안 먹고 닭도 안 먹고.

그럼 뭘 먹어요?

청국장. 콩 종류 좋아해요. 후추 엄청 좋아하고요. 모든 음식을 후추에다 찍어 먹어요. 진짜 맛있어요. 안 맵고 시원해요. 칼칼해요.

근데 후추가 몸에 안 좋다고도 하잖아요.

이 나이에 뭐 얼마나 오래 살겠다고. (좌중 웃음) 나쁘지 않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또 제 몸에는 맞는 것 같아요. 딴 건 안 먹어도 후추는 많이 먹어요.

아들과 남편, 깊고 깊은 갈등이 완만해지기까지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2002년, 이성미는 세 아이와 함께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유증이 가장 컸고, 그다음 변곡점이 필요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을 필두로 다섯 살, 14개월 두 딸이 엄마를 따랐다. 물리적인 거리만큼 마음도 멀어진 남편, 등 돌린 아들과의 지난한 갈등의 시작이었다.

아이들과 캐나다로 떠난 뒤 7년 만인 2009년에 한국에 돌아왔어요. 어떤 점이 가장 적응이 안 되던가요?

백화점에 갔는데 난 완전 촌사람인 거야. 너무 화려하고 번쩍번쩍해서 낯설었죠. 캐나다는 이렇게 건물이 높지도 않고 밤이 화려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저는 밤이 밤이었으면 좋겠다는 사람이에요. 옛날에 통행금지 있던 시절처럼 밤 10시 되면 집구석으로 들어가는 문화가 익숙해요. 그런 부분은 옛날이 그립죠.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아이들과 아빠 사이에 약간의 어색함도 있었을 것 같아요.

어색했죠. 사실 7년을 떨어져 살면서 이혼 생각을 여러 번 했어요. 그러다 몇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이혼은 안 되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날 가증스러운 제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저는 돈을 버는 사람이니까 '내가 다 하고 있잖아. 당신은 하는 게 뭐가 있어?'라는 입장으로만 남편을 바라봤던 거예요. 남편의 입장은 한 번도 생각지 않고 제 생각만 한 거죠. 그러니까 남편이 무슨 얘기를 해도 무시하고 하대했었어요. '내가 남편을 남편으로서 존경하는 게 아니라 저 인간은 없어져도 돼, 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구나. 아이들에게 철저하게 아빠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구나'라는 걸 그때야 알게 됐죠.

아이들에게는 곁에 있는 엄마의 존재만 있었던 거네요.

캐나다에서 그렇게 떨어져 지내니까 애들이 아빠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어느 날 한국에 왔는데 문틈 새로 쭈그리고 자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봤어요. 너무 안됐더라고요. 내가 이 자리(부모로서의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고 저 사람은 끄트머리에 겨우 붙어 있구나.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한국으로 돌아오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남편의 반응이?

"왜 와?" 그래요. (좌중 웃음) 부부가 이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했어요. 처음 왔을 땐 정말 낯설었어요. 제가 밥을 차려놓으면 (남편이)  먹으면서도 불편해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심지어 아이들에게도 식사할 때 아빠 자리에 먼저 수저 놓는 것부터 다 다시 가르쳤어요. 그렇게 아빠를 아빠로서 대접하기 시작하니까 (남편이) 그간 웅크렸던 어깨를 조금씩 펴고 있어요. 근데 너무 폈어, 요새. (좌중 웃음)

캐나다에 갔다 오길 잘한 것 같나요?

저는 갔다 오길 잘했어요. 제 인생에서 많은 걸 얻어가지고 왔어요. 일단 부부는 떨어져 살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게 가장 큰 수확인 것 같아요. 남편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로 했어요.

캐나다에 처음 갈 때 첫째 아들이 막 사춘기에 접어들 시기였어요. 아빠가 부재한 상황에서 아빠 노릇까지 하려면 강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걔가 나를 누르려고 하니까요. 지가 날 낳은 줄 알아요. (좌중 웃음) ‘내가 널 낳았다, 이놈아!’ 하면서 키웠죠.

저도 아들 키우는데, 똑같아요.

아들 키우는 엄마들이 좀 세죠?

셀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욕은 조금만 해요.(웃음)

저는 욕 완전히 끊었어요. 끊고 나니까 욕을 안 하고도 살 수 있구나 (라는 걸 알았죠). 그 후로 많은 게 달라졌어요. 일단 아들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아들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이제는 아들이 '부끄럽지만 이 세상에서 엄마 같은 사람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해요. 그래서 (캐나다에서의) 이 7년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갑자기 변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그전까지는 매일이 전쟁이었어요. 정말 못 살겠더라고요. 사춘기 아이들 맨날 게임하죠, 지 맘대로 하죠, 엄마가 얘기하면 눈 아래로 깔죠, 무슨 얘기 하려고 하면 방으로 휙 들어가버리죠. 내가 왜 저런 놈을 낳아서 이 고생을 하나? 이런 생각 들잖아요. 맨날 잔소리했어요. 아들이 '내가 알아서 해!' 하면 '야 이 새끼야, 네가 알아서 하는데 그따위로 살아?!' 하고 욕을 퍼붓고는 새벽에 기도하러 가서 울고 그랬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집에 늦게 들어왔어요. 제가 뒤통수에 대고 '야 이 새끼야, 너는 인간 말종이야! 쓰레기 같은 새끼야!' 그랬어요. 근데 순간 '네 아들, 네가 말한 대로 만들어줄까?'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미친개가 되어 죽어 있는 아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어요. 너무 두려웠어요. 그다음부터는 절대 욕을 안 해요.

변한 엄마를 보고 아들의 반응이 어떻던가요?

엄마가 갑자기 욕을 안 하니까 애들이 먼저 무서워하더라고요. 그리고 공부를 하기 시작해요. (좌중 웃음) 나중에 저희 딸이 오빠 공부하는 것 처음 봤다며 신기해하더라고요. 그렇게 저희 집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내가 엄마니까 내 말대로 따라와'라는 식의 주입은 오히려 아이들과 부딪치는 길이라는 걸 알았죠.

지금은 전혀 주입하지 않나요?

아이들을 닦달하지 않아요. 너희는 너희 자체로 귀하고 충분히 사랑받을 만하다, 엄마는 너희 때문에 행복하고 너희도 무슨 일을 하든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해줘요.

지금 행복하길 바라

자녀 교육은 세상 모든 엄마들의 아니, 한국 엄마들의 최대 화젯거리다. 이성미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건 딱 한 가지, 지금 이 순간 아이가 느끼는 행복이다.

요즘 방송에 연예인 2세들 많이 나오잖아요. 세 아이 중 한 명쯤은 끼 있는 자녀가 있을 것 같은데 어때요?

없어요. 저는 저희 아들이 '엄마, 나 연예인 하면 엄마가 좀 도와줄 거야?' 물으면 '네가 알아서 해' 하고 답해요.

반대하진 않나요?

반대도 찬성도 안 해요. 다만 스스로 성공해야지 '우리 엄마 누구예요' 하면 손해 보고 시작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엄마보다 잘나가려면 엄마의 배로 연습하고 배로 노력해야 하는데 엄마를 등에 업고 가려고 하면 이쪽 길은 애초에 틀려먹었다, 그랬더니 더러워서 안 한대요.(웃음) 근데 더러워도 꼭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요. 도전하는 건 꼭 가르쳐요. '잘못하건 잘하건 자신이 있건 없건 부딪쳐봐라. 넘어지면 일어나면 되고 잘못하면 다시 생각하면 되지, 무섭고 두려워서 안 가는 건 옳지 않다.' 저는 일단 부딪치고 보거든요. 저희 애들이 그런 적이 있어요. 엄마는 웃으면서 다 한다, '얘들아, 캐나다 가자' 하더니 무슨 동네 이사 가듯이 이민을 간다고요. (좌중 웃음) 제 성향이 그래요. 지르는 스타일이에요.

딸 키우는 건 어때요? 지난번에 잠깐 방송에 나온 거 보니까 참 예쁘고 귀엽던데요.

딸들은 거저 키워요. 다른 애들보다 살이 좀 쪘어요.

그 나이에는 토실토실한 게 예뻐요.

평범한 아이로 살아주는 게 제일 행복한 것 같아요. 애들이 '엄마, 나 앞으로 뭐 할까?' 물으면 '남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돼라'고 해요. 물질적인 게 아니라 마음으로라도 누가 넘어져 있으면 손잡아주고, 지나가다 힘든 사람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말라고요.

한국으로 올 때 아이들이 반대하진 않았나요? 달라진 교육환경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고요.

다시 한국 온다고 할 때 주변 사람들이 많이 반대했어요. 캐나다가 좋은 환경이기도 하고 왜 하필 애들 사춘기에 데려가느냐고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 데려오는 대신 들어주기로 한 조건이 외국인 학교에 보내는 거였어요. 그 대신 학원이고 뭐고 아무 것도 못해주겠다, 했죠.

그럼 정말 학원 안 보내요?

안 보내요. (방과 후) 3시 반 이후에는 백수예요. 숙제하고 저들 할 일 하고 그래요. 지금은 방학이라 집에서 요리 배우고 살림하는 것 배우고 그래요.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다 보면 자녀 교육에 평정심을 가지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돼요. 누구는 좋은 대학 갔다더라, 소리 들으면 안 그러려고 해도 조바심이 나고 속이 상해요.

누구 자식은 어떻더라, 라는 부모의 말을 들으면 애들은 이미 주눅이 들어요. 근데 애들은 엄마 머리를 닮더라고요. (좌중 웃음) 그래서 저는 애들한테 공부하라고 얘기를 못 해요.

자녀들에게 어떤 식으로 조언을 해주나요?

저희 딸이 빵 굽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딸한테 그랬어요. '네가 빵을 좋아하면 빵으로 성공해도 돼. 나중에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공부해. 근데 그땐 아마 머리가 굉장히 딱딱해져 있을 거야. 공부는 지금 하는 게 맞는데, 네가 지금 정말 요리를 하고 싶다면 그쪽에 먼저 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 좋은 직장 들어가고 돈 많이 버는 게 아니라 지금 네가 행복한 것, 그거 하나만 붙들고 가라' 그랬더니 딸이 '엄마, 나 정말 행복해' 그러더라고요. 그럼 그걸로 됐다고 했어요.

엄마로서 정말 성공한 인생을 살았네요.

근데 어떤 엄마들은 '10년 뒤에 저 애가 어떻게 살지 봐야지' 그래요. (좌중 웃음)

한때는 아들과 갈등의 골이 깊었던 엄마였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같은 엄마가 됐어요. 가장 중요한 비결이 뭔가요?

아이들하고 얘기를 많이 해요. 하루 종일 수다를 떨어요. 사춘기 되니까 아들이 말을 안 하더라고요. 그때도 제가 꼭 한 게 하나 있어요. 편지를 쓰는 거예요. 저는 아들이 3살 때부터 시간 날 때마다 편지를 썼어요. 노트의 한쪽은 내 면, 다른 쪽은 아들 면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요. 근데 사춘기가 되니까 (아들이 제 글에) 답을 안 하더라고요. 그래도 계속 썼어요. 한 달에 한 번이든 두 달에 한 번이든 시간 날 때마다요.

결국 아들이 답을 했나요?

어느 날 아들에게 이만큼 답이 왔어요. 엄마가 그동안 날 기다려줘서 고맙다면서요. 그 편지 보고 사실 울컥했어요. 그때 알았죠. '아, 기다리는 거구나.' 솔직히 우리는 '야! 엄마가 편지 썼는데 보고 답장도 안 하고 네가 사람이냐!' 이럴 수 있잖아요. 근데 기다리니까 언젠가 답이 오더라고요. 사랑은 기다리는 거구나, 깨달았죠.

아이들과 그렇게 친한 엄마일 수 있다는 게 부럽네요.

저는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와의 추억이 없어요. 그래서 아이들한테 우리 엄마가 어떤 엄마였는지 기본적인 그림은 그려놔야겠구나, 늘 생각했어요. 좋은 기억을 남겨주고 싶은 거죠. 그래서 애들하고 취미생활을 많이 해요. 영화 자주 보러 가고, 막내는 빵을 잘 구워서 집에 가면 그렇게 빵을 구워놔요. 그럼 맛있게 먹고요.

나이 든다는 것은

작은 체구의 이성미가 발산하는 오라는 상당하다. 시작부터 좌중을 압도하더니 인터뷰 말미에는 독자들 모두 그녀의 여동생이 된 듯 귀를 기울이며 조언을 구한다. 심지어 갱년기 선배로서의 조언까지도 말이다.

건강은 좀 괜찮아졌나요?

건강은, 그냥 가요. 아파도 하루 사는 거고 안 아파도 하루 사는 거라.

긍정적인 편인가 봐요.

네. 아프면 제 안에 갇히더라고요. '난 이렇게 아픈데 왜 아무도 안 도와주지?' 하고 꽂혀요. 그래서 전 그거 떼어버렸어요. 안 그러면 모든 게 슬프고 힘들거든요. 거기서 벗어나니까 오히려 안 아픈 사람보다 더 에너지가 생겨요. '그래, 괜찮아' 하고요. 물론 체력은 확실히 떨어져요. 그래서 유산균하고 비타민은 챙겨 먹어요.

살다 보면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은데 주로 어떻게 해소하나요?

저는 스트레스를 참 안 받는 성격이에요. 어렸을 때는 받았어요. 조그마니까 무시당하는 것에 상처가 있었는데, 신앙을 갖고 나서 굉장히 긍정적이 됐어요. 사람을 이해하면 관점이 바뀌어요. 나한테 스트레스 주는 사람이 있으면 ‘이유가 있을 거야’, ‘저 사람은 나랑 달라’ 하고 생각해요. 그럼 아무렇지도 않아요.

50대 중반이니 이제 갱년기가 올 나이잖아요. 갱년기를 앞두고 있거나 겪고 있는 동년배 주부들에게 팁을 주신다면요?

재수 없겠지만, 갱년기가 안 왔어요. (좌중 웃음) 아직 더웠다 추웠다 하는 것도 없고 감정기복도 나쁘지 않고요. 그냥 넘어가는 사람도 있대요. (노)사연 언니랑 같이 라디오 하거든요. 언니가 “너 같은 애가 제일 재수 없어!” 그래요. (좌중 웃음) 그럼 저는 “난 센 걸로(암) 왔잖아” 하고요. 제가 한국 나이로 쉰여섯인데, 걱정 안 해요. 어차피 누구나 겪는 일이고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이면 되고요.

어머, 부럽다! 저는 갱년기가 왔어요. 노안도 왔고요.

저도 그래요. 문자도 왜 이렇게 헛짓을 하는지 몰라. 어떨 때는 '언니 나 바빠'를 '언니 나빠' 이렇게 써요. (좌중 웃음)

이성미 하면 떠오르는 멤버들이 있어요. 박미선, 이경실 씨 등등.

제가 오래된 사람이라 주위에 다 오래된 것들만 있어요.(웃음) 모임이 있었어요. 제가 캐나다 가면서 깨졌는데, 그전까지 한 15년 모였나? 밥 먹자고 10명 정도 모이기 시작한 게 그렇게 됐죠.

최근에 환갑을 맞은 이홍렬 씨도 그중 한 명이고요.

저보다 나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제가 유일하게 '홍렬아!' 부를 수 있는 사람. (좌중 웃음)

한번 친구가 되면 쭉 가는 스타일인가 봐요.

지금은 사람들이 (친분을 맺을 때 상대의) 조건 같은 걸 보잖아요. 저희 때는 저 사람이 나랑 마음이 맞으면 그냥 쭉 갔어요. 근데 그렇게 친구 된 사람들이 지금 다 잘됐어요. 저희 계원이 노사연, 박미선, 신형원, 양희은, 이수만, 이홍렬, 전유성, 조영남, 주병진이에요. 같이 늙어가는 거죠. 귀 안 들려서 딴소리하고 그런 나이예요. (좌중 웃음)

나이 들어가는 것, 그렇게 나쁘지 않죠?

사람들이 가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데, 저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다시 돌아가서 개고생하고 싶지도 않고.(웃음) 나이 들어간다는 게 좋은 거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지금 흘러가는 세월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자는 생각?

맞아요. 나이 먹는 것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 나이엔 살아내는 거더라고요. 하루하루 살아내자, 매일 아침 다짐해요. 이런 표현이 좀 조심스러운데, 잘 죽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우리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사는데 누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준비해라.' 전 그 말이 되게 가슴에 와 닿았어요. 이제 인생 반 살았으니 나머지 반은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게 제 목표예요. 그리고 관은 제일 싼 걸로 해달라고 그랬어요. 근데 관은 세일도 안 해. (좌중 웃음)

방송 일을 안 했다면 지금쯤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요?

사업했을 것 같아요. 옛날에는 고아원과 양로원을 같이 짓고 싶었어요. 근데 아버지 일이 망하면서 스튜어디스로 꿈을 바꿨어요. 그리고 중2 때 바로 접었죠. '손님, 뭐 드시겠어요?' 묻는데 얼굴이 안 보이면 안 되잖아요. (좌중 웃음) 그리고 나서 성우를 꿈꾸기도 했는데, 지금은 사업하고 싶어요. 할 마음도 있고요. 북한에서 선교하고 싶은 마음이 굉장히 커요.

이렇게 대화해보니 카리스마가 굉장해요.

저는 웃으면서 사고 치는 스타일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그러세요. "너는 집에선 이렇게 조용한 애가 어떻게 신문에 이름 나오는 것만 내가 보냐." (좌중 웃음) 학교 다닐 때도 되게 얌전하고 안 나서는 편이었는데 조용히 사고 친 적은 있었죠. 학교를 한 달이나 안 나가서 선생님이 데리러 왔었으니까요. 고집이 세요. 한다는 건 반드시 하고 남 얘기 잘 안 듣고요. 근데 그런 걸 딸들이 닮았더라고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웃음)

[- 더 많은 기사는 여성조선 8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