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를 달아야지
“‘김미(gimme)’로 실패한 걸 김미로 다시 성공시켜보려고요.” 2005년 이종격투기 레스토랑 김미파이브로 단맛과 쓴맛을 모두 본 이상민이 근 10년 만에 재기를 꿈꾼다. ‘김미’라는 이름을 고집하는 이유는 또다시 실패란 없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한때 손대는 음반마다, 출범시키는 가수마다 성공시킨 룰라 이상민은 과장 조금 보태서 '음악의 신'이나 다름없었다. 샵과 컨츄리 꼬꼬, 샤크라 모두 그의 손을 거쳤고 나름 가요계를 평정했으니 말이다. 그런 그가 하향세를 걷기 시작한 건 2004년 시작한 레스토랑 사업 '김미파이브'가 제대로 망하면서부터다. 갖은 시련과 상처를 거듭한 그가 또 한 번 재기를 꿈꾼다.
요즘 하는 방송이 두 개죠?
올리브채널의 와 엠넷의 을 하고 있고, 곧 자동차 프로그램 시즌3에도 들어갑니다.
프로그램들은 어떻게 선별하는 편입니까?
저는 하고 싶은 프로그램, 저와 맞는 프로그램 위주로 하고 있어요. 또 그럴 수밖에 없고요. 방송을 직업으로 삼기엔 지금 제 환경이 여러 가지로…. 심적으로 부담이 없고 마음이 편해야 방송도 즐겁게 할 수 있는 건데, 아직까지는 (채무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남아 있거든요. 그래서 (방송을 많이) 소화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잘할 수 있고 저와 맞는 것 위주의 선에서 1~2개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 이상은 아직 생각을 못 해봤어요.
그래도 하는 방송마다 반응이 좋은 편이에요. 더 대중적으로 나가고 싶은 욕심이 있을 텐데요.
저도 이것저것 다 경험해보고 싶은데 그것도 제 욕심이니까요. 프로그램이 잘되게 양념 역할을 해줘야 되는데 자신 없으면 아예 못 한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예전에 에서 우승하고 나서 굉장히 많은 프로그램에서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는데 그때도 다 거절했어요. 제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프로그램 위주로 하려고요. 대본이 없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나 자동차, 음악 이 정도 포맷 안에서 소화할 수 있는 것들만 하고 있습니다.
2005년 이후에는 아무 사업도 하지 않았나요? (2004년 강남에 문을 연 '김미파이브'는 이종격투기를 외식 사업에 접목시킨 이색적인 레스토랑으로 당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이듬해 불미스러운 일로 문을 닫았고 대표이사 이상민에게 큰 빚을 안겼다.)
그 뒤로는 사업을 하지는 않았어요. 선배가 하는 사업을 옆에서 간간이 기획 면으로 도와준 적은 있지만 사업을 한 적은 없었어요. 쉽게 뭔가를 또 시도하기에는 뭐랄까… 용기가 나질 않았죠.
시련들이 많았기 때문이겠죠?
그렇죠. 그 여파를 극복하는 것만도 힘든 상황인데 거기다 또 사업까지 한다는 건….
언론에서 말하는 57억 원의 빚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건가요?
100% 다 해결됐다고 말할 수는 없고요. 지속적으로 정리해나가는 중이에요. 내년 상반기 정도가 되면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어요. 너무 어린 나이에 제대로 된 상식 없이 법인을 운영하다 보니까 제가 주 채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 굉장히 어렵게 타협점을 끌고 가면서 갚아나가는 중이죠.
지금은 소속사가 없죠?
없습니다.
기획사를 운영하거나 하지도 않습니까?
지금은 그런 게 없습니다. (기획사를 운영해볼) 기회가 한두 번 오기는 했었는데 때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결국 결말을 짓지 못하고 중도에 기획이 무산되고, 무산되고 그랬죠. 지금 가요계의 현실이 예전에 제가 음반을 제작하고 가수를 기획했을 때와는 많이 다르기도 하고요. 지금은 시스템이 완성되어 있지 않으면 실력이나 마케팅만으로는 승부를 걸 수가 없으니까요. 1차적인 단계(시스템적인 부분)부터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예전 방식으로 했다가는 또 실패할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원활하게 돌 수 있는 현금이 갖추어져 있어야 그걸 토대로 (회사 시스템을 만들고) 원래 제 분야였던 음반 제작을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 뒤로 미뤘습니다.
일찍 성공을 맛봤어요. 제작하는 음반마다 성공을 시켰고요. 가끔 그때가 생각나기도 하겠죠?
그렇죠. 음반 제작 일만 했다면 그렇게 큰 실패는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음반 외의 사업도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 게 실패의 요인이었던 것 같아요. 다른 분야에 대해 학습 효과가 없는 상태에서 마치 뭘 해도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때문에 이것저것 다 손을 댔어요. 음반 분야에서만 버텼다면 지금쯤 하나의 브랜드를 만들어서 제작사를 운영했을 수도 있는데, 타 분야에까지 자신감을 가졌다는 게 실패의 요인이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언젠가 음반 제작을 다시 할 생각이 있다는 건가요?
그건 평생 따라갈 수밖에 없는 직업인 것 같아요. 음반 제작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계속 제 머릿속에 음반을 제작하고 가수를 기획하는 것에 대한 생각들이 맴돌고 있는 걸 보면 '아, 이게 내 본업이었구나. 이 일을 해야겠구나. 언젠가 여건이 갖추어지면 이게 내 마지막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고는 있죠.
한창 룰라로 활동하던 때는 그룹이든 솔로든 음반이 소위 대박 나던 시절이었어요.
1990년대 당시에는 그랬죠. LP가 사라지고 CD가 도입되면서 음악 시장이 급성장했으니까요. 나이트클럽에 가도 90%가 가요를 틀어주던 시대였어요. 그래서 1990년대에는 어떤 댄스 가수든지 '백만 장 가수'가 많았고 댄스 가요가 굉장한 붐이었죠.
지금 가요계는 어떤 것 같나요? 아무래도 후배들이 하는 일이니까 관심을 갖고 지켜볼 텐데요.
지금은 우리 시대보다 훨씬 뛰어난 친구들이 많죠. 그리고 그렇게 뛰어난 친구들이 엄청난 노력을 해도 쉽게 성공하지 못하는 시장이 됐고요. 반대로 대한민국 스타가 곧 아시아 스타고 월드 스타로 인식되는 만큼, 열심히 노력해서 스타가 되면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예도 우리 때보다 더 많아진 것 같고요. 그리고 스마트 기기를 통해서 아주 쉽게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시장이 만들어졌다는 게 큰 장점이에요. 저 스스로도 생각의 기준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도 제작이라는 걸 예전에만 했었지, 최근에 한 적은 없으니까요. 예전의 제작자 마인드는 완전히 버려야 돼요. 우리 때보다 실력도 월등하고 노력도 많이 해야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가장 컸다"
모두가 알다시피 룰라는 '날개 잃은 천사', '천상유애', '100일째 만남', '3! 4!' 등 무수한 히트곡을 제조하며 1990년대를 평정한 대표 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룰라의 현재는 당시 이들을 사랑한 팬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년 멤버 신정환은 2011년 해외 원정 도박 파문 이후 자숙의 시간을 갖는 중이고, 고영욱은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2013년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묻지 않을 수 없는 멤버들의 근황을 물었다.
룰라 멤버들은 가끔 만나나요?
(김)지현이하고 (채)리나와 저, 셋은 라는 90년대 가수들이 하는 공연을 간간이 하고 있고요. 그외 멤버들은 만날 수가 없죠.
나머지 멤버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고영욱 씨는 이제 (출소하기까지) 13개월 남았고…. 신정환 씨 같은 경우는 자숙의 시간을 갖고 있는 상황이죠.
고영욱 씨에게는 종종 면회를 가나요?
가죠. 3일 전에도 갔다 왔고요.
어떻게 지내는 것 같아요?
잘 지내는 것 같아요. 생각보다.
아픈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할게요. 본인도 그랬고 예전 멤버들이 잘되지 못한 것들에 대해 화도 나고 속상할 것 같은데 어떤가요?
글쎄요. 저는 이제 사실 과거를 후회하는 시간은 지났고요. 후회하고 있을 때는 이미 늦었을 때인데 그걸 후회까지 한다면 저 스스로가 너무… (견디기 힘들 것 같아요). 실패와 낙오에는 차이가 있는데, 실패는 아직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낙오는 포기가 돼버리니까요. 별로 과거에 집착하거나 후회를 하고 있진 않아요. 가끔 '왜 그렇게까지 됐을까?'라는 푸념을 늘어놓는 경우는 있어요. 그런데 그걸 깊이 생각하고 싶진 않아요.
지금 마흔하나예요. 활동 기간이 20년이 넘는 데다 온갖 굴곡들을 겪은 것에 비해서는 젊은 나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짧은 시간에 겪을 걸 다 겪었다고는 생각해요. 지금은 오히려 그 부분에 대해 감사하고 있어요. 실패를 해도 1년이라도 더 젊었을 때 하게 해줘서 고맙고요. 앞으로 하는 일에 대한 자신감도 두 배, 세 배 더 강해졌고요.
이상민 씨를 보는 곱지 않은 시선들도 분명 있어요.
세상만사가 그런 것 같아요. 실패자를 향한 목소리는 당연히 부정적이고 성공한 사람들을 향한 목소리는 그와 반대거든요. 저 스스로에게도 말해요. '지금 이 위치에서 어떤 목소리를 듣길 바라냐. 네가 빨리 성공해야 (너를 향한 세상의) 목소리가 바뀐다.' '잘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는데 왜 못한 것만 가지고 그래'라고 얘기하기에는 지금 제 현실이 썩 녹록지 않아요. 어차피 성공하면 (사람들의 시선도) 다 바뀌게 되어 있다고 믿어요. 그러다 보니 빨리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자는 생각이 지배적이에요. 그래서 '멘탈'이 굉장히 강한 편이에요. 그래도 그런 소리를 들을 때 기분이 좋을 순 없죠. 다만 담아두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과거의 일들 중 가장 후회되는 것 하나만 고른다면 뭐가 있을까요?
아… 글쎄요.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가) 여러 상처가 있었지만 가장 깊은 상처는 사람이었어요. 금전적인 실패에도 억울함이 많았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이 오래가지 않았고, 돈이 있다가 없어서 생활이 바뀌었을 때도 불편하단 생각이 그렇게 오래 남진 않았는데, 정말 믿었고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배신인가요?
배신이라고 말하기는 유치하고요. (또 한 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인간이 느끼기에 너무 힘들 만큼의 결과를 낳고 남이 되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상처가 너무 커요. 저희 회사에 근본적으로 부도를 나게 했던 임원 2~3명이 있었어요. 제가 덜 갖더라도 그들의 어려운 부분을 충족시켜주려고 했고 가족처럼 대했었는데, 결국 자기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면 저 한 명 죽는 건 전혀 상관이 없었나 봐요. 어쩌면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사람에 대한 상처가 가장 컸어요. 그게 참 생각도 오래하게 만들었고요.
그 일로 사람에 대한 불신이 생기지는 않았나요?
불신이라기보다 그 후로 사람에 대한 공부를 굉장히 많이 하게 됐어요. 상대가 눈치채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사람의 행동, 생각 등을 유심히 연구하게 됐고요. 그리고 저 스스로 나름의 기준을 만들었어요.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이 사람은 나와 맞지 않는 사람, 나하고 일하면 안 될 사람, 내가 신뢰할 수 없는 사람', 그 기준에 적합하면 '이 사람은 나와 무슨 일을 해도 되는 사람'으로 판단했고요. 제가 에서 우승한 것도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상대를 파악하는 재주 때문이었어요. 이 사람은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 사람은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정말 똑똑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허당이다, 이런 것들을 빨리 파악할 수 있어서 결승에서 이길 수 있었어요. 제가 실패와 상처를 극복하고 사람 관계를 공부하지 않았다면 그 게임에서 절대 이기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는 안 받아요. 제 기준에서 벗어나면 아예 안 만나요.
'김미파이브' 이후 첫 사업, 7월에 오픈
7월에 오픈 예정인 애플리케이션 '김미(gimme)'는 이상민의 오랜만의 사업 출사표다. 한류 스타와 전 세계 팬들을 타깃으로 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게임을 접목해 수익을 창출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실패한 전작 '김미파이브'의 오명을 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물론 부담도 적지 않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어땠습니까? 문제아였을 것 같은데.(웃음)
뭐 일반적이지는 못했죠. 그 당시에 노는 걸 정말 좋아했고 공부를 너무 싫어했고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걸 좋아했고 음악을 정말 좋아했고요.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LP 구입하고 춤추러 다니던 시절이거든요. 어떻게 보면 일찍 뚜렷한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미래가 바뀐 것 같아요. 노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노는 게 나의 장점이니까 이걸 목표로 삼아 가수의 길로 가보자'라고 생각을 했었죠.
그런 결심이 언제부터 생겼나요?
춤을 정말 좋아해서 고등학교 졸업하고도 이태원에 '문나이트'라는 데를 드나들었어요. 거기서 실제 가수를 본 거죠. TV에서만 보던 가수나 유명한 댄서들이 춤을 추는 모습이 정말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이젠 나도 막연히 춤만 추러 올 게 아니라 뭔가 계발을 하고 저들처럼 가수로 성공을 해야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같이 할 멤버들을 찾으러 다니고 팀을 꾸려서 데모를 녹음하고 기획사에 오디션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죠.
중고등학교 때 춤추러 다니면 부모님이 많이 반대하셨을 것 같은데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께서 사실 많이 바쁘셨어요. 먹고살기 바쁘니까요. 처음엔 식당 운영도 하시다가 저 중학교 3학년 때부터는 보험회사에 취직하셔서 1, 2년 만에 보험왕도 하시고 영업소 소장까지 하시면서 거의 밖에서 일하느라 바쁘셨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가수 한다고 하면 '공부 안 하고 무슨 가수야!'가 아니라 아예 믿질 않으셨죠. 네가 하고 싶은 건 하되 뜬구름 잡지는 마라, 이런 눈초리에 가까웠죠.
요즘은 자기가 잘하는 걸 하는 게 훨씬 중요하고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해요. 그런데 부모나 아이 본인도 자기가 어떤 것에 소질이 있는지 발견하고 확신하기가 어렵잖아요. 이상민 씨는 확신이 있었나요?
다른 직업은 모르겠는데, 연예인이라는 직업은 본인이 스스로를 어느 정도 체크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스스로의 실력과 상황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면 절대 연예인으로 성공할 수 없어요. 저는 그때 연예인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걸 보면서 '나도 저 정도는 끼 부릴 수 있어. 나도 저 정도는 연습하면 충분히 할 수 있어'라는 첫 번째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뭐든 도전하고 몸으로 부딪칠 수 있었고요.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스타로) 만들어주겠지' 하면서 막연하게 스타가 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스타를 봤을 때 '저 정도는 나도 해'가 아니라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정도면 포기해야 되고요.
여전히 운동을 열심히 하나요? 한때 몸짱 사진도 찍었잖아요.
솔직히 요새는 운동을 거의 못 해요. 제 성격이 뭔가에 집중하면 그거 하나만 강하게 하는 편이에요. 그 당시에도 운동만 하고 다른 일은 거의 안 했어요. 내 몸이 너무 아저씨 같다는 생각도 들고, 죽기 전에 한번쯤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서 만들었어요. 지금은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거기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그래서 몸 관리도 거의 못 하고 있죠.
어떤 일을 준비하고 있나요?
한 1년 정도 준비한 애플리케이션(이하 앱) 사업이 있어요.
언제쯤 공개되나요?
7월 초에 발매하는데 조금 늦어질 수도 있어요. 원래 6월에 발매할 예정이었는데 이게 워낙 광범위한 앱이라.
어떤 종류의 앱이죠?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인데, 게임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 카카오톡하고 트위터를 합쳤다고 보시면 돼요. 카카오톡이 전화번호를 공유한 사람들끼리 게임을 하는 거라면, 이건 이 앱을 사용하는 스타를 팔로우한 전 세계 팬들이 그 앱 안에 탑재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만들었어요. 팬들끼리 게임을 하는 거죠. 스타들도 게임을 좋아하니까 게임을 하면서 자기 얘기를 트위터처럼 올릴 수 있고요. 기술적으로도 다른 SNS와 차별화를 한 게 많아요. 전 세계 번역기를 탑재해서 외국어로 안부를 전할 수 있고, 각국에 내 팬들이 몇 명까지 있는지도 알 수 있어요.
앱 이름은 뭔가요?
모든 기획사가 왜 그걸로 지었냐고 하면서 웃더라고요. '김미(gimme)'예요.
'김미파이브' 때의 이름과 같네요.
김미라고 하니까 처음 반응은 웃고 그다음엔 왜 김미냐고 물어봐요. 여러 가지 네이밍을 고민했는데, 김미라는 이름이 국내에서는 (실패한 김미파이브를 떠올리는) 그런 시선일 수도 있지만 전 세계를 기반으로 한 서비스인 만큼 해외에서는 입에 쉽게 붙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하나는 김미로 실패했던 걸 김미로 다시 성공시켜보겠다는 뜻이에요. 굉장히 큰 회사에서 개발을 했고, 1년 동안 준비했기 때문에 완성도도 높아요.
최근 몇 년간의 일 중 가장 규모가 큰 중요한 일이겠네요.
그렇죠. 사실 제가 음반에 다시 손대지 못했던 이유는 음반을 제작하는 순간 현실이 돼버리기 때문이에요. 친한 선배님들이 방송에 나오면 농담으로 '너도 계속 음반 제작했으면 빅3, 빅4 회사 대열에 끼지 않았겠느냐'라고 하세요. 근데 또다시 음반을 제작했다가 성공 못 하면 '너는 원래 안 되는 애'로 낙인찍히면서 잘될 가능성조차 사라지는 상황이 되잖아요. 반대로 성공하면 '역시 넌 기획력이 살아 있어'라는 시선을 받겠죠. 저한테는 굉장한 부담인 거죠. 실패해도 '실패했구나' 정도로 편하게 봐주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텐데, '거봐, 얘는 이제 안 돼'라는 시선이 저한테는 큰 부담이었어요. 사업적인 것도 그런 부담이 있지만 음반보단 작아요. 그렇지만 굉장히 심사숙고했고, 개발하고 준비한 기간은 1년이지만 생각은 3, 4년 전부터 했어요.
기대가 크겠군요. 잘될 것 같습니까?
저는 사실 잘될 것 같은데. 제가 계속 사업을 안 하고 있다가 심사숙고해서 준비한 사업이기도 하고…. 지금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다음 결혼, 평생 행복할 것"
언젠가는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그녀의 이름을 떼어버릴 수 있을까. 9년 열애 끝에 2004년 웨딩마치를 울린, 그리고 1년 만에 이혼한 탤런트 이혜영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2011년 새신부가 된 이혜영과 달리 이상민은 아직 싱글이다. 일과 사랑에 여유 있게 집중할 수 있는 그날, 멀지 않은 미래에 꼭 결혼할 생각이란다.
혼자 생활한 지 얼마나 됐나요?
꽤 됐죠. 한 8년.
혼자 생활하니까 어떻습니까?
장단점이 있죠. 후배들이 제일 관심 있게 물어보는 게 '형, 혼자 사니까 어때요?'예요. 혼자만의 삶을 편하고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건 장점이고, 반면에 적적함이라든지 외로움 같은 것들은 단점이고요. 그런데 사실 제 성격 자체가 잘 못 즐겨요. 여자친구가 있어도 마음 한구석이 외로운 성격이에요. 일에 대한 도전이나 욕심 때문에 생긴 병인 것 같기도 해요. 혼자 있을 때 (혼자라는) 그런 외로움보다는, 내 일에 대한 충족이나 불만 같은 것들에 깊이 빠져 있어요. 지금도 일에 대한 생각뿐이고 다른 건 전혀 없습니다.
집에서 혼자 즐기는 취미 같은 건 있나요?
그냥 음악 듣는 게 다예요. 그리고 생각보다 그럴 시간이 거의 없어요. 들어가면 자기 바쁘고 눈 뜨면 나가기 바쁘고.
결혼에 대한 생각도 있겠죠?
결혼은 분명 다시 해야죠. 일단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이 어느 정도 완성이 됐으면 해요. 그 일이 완성되면 그때는 정말 결혼을 해야죠. 일과 사랑을 균형 있게 할 수 있는 시기가 되면 꼭 하고 싶어요. 굳이 일을 많이 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있을 때요.
마지막으로 이혜영 씨에 대해 물을게요. 한번쯤은 생각날 것 같은데요.
전혀 할 얘기 없죠. 벌써 10년이 지났고, 바라는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너무 오래된 일이에요.
공연히 부딪치거나 한 적도 없나요?
희한하게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어요.
그래도 한 번은 생각나지 않겠습니까?
전혀요. 그때도(이혼하던 무렵) 생각하고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너무 한꺼번에 (안 좋은 일들이) 와서 정리하고 해결하는 데 모든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에. 그리고 10년이 지났는데 이제와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게 우스운 거죠.
결혼관이나 여성을 보는 가치관도 과거와 달라진 점들이 있겠죠.
그럼요. 사람은 직접 겪어봐야 가장 큰 공부가 되는 것 같아요. 이제는 결혼하면 정말 행복하게 평생을 살 수 있는 방법도 알 것 같아요.
막상 살아보면 잘 안 되지만요.(웃음)
하여간 결혼하게 되면 와이프 될 사람에게 누구보다 잘해줄 자신은 있어요. 저도 그 결혼을 아주 아름답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름의 인생 그래프가 만들어진 것 같아요. 하도 여러 일들을 겪고 극복하면서 여기까지 와서 그런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