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DB

"대체 기준이 무엇입니까."

저소득층 아동 교육을 지원하는 A단체 사무국장의 푸념이다. 그는 벌써 2년 넘게 사단법인 설립을 놓고 복지부와 실랑이 중이다. 현행법상 비영리법인을 설립하려면 복지부, 교육부, 외교부 등 주무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가 요건이 법에 명시돼있지 않아, 비영리법인 설립 여부는 각 주무관청의 주관적인 판단에 좌우돼왔다. A단체 사무국장은 "복지부에서 처음엔 사단법인 자격이 된다고 해서 직원을 뽑고, 사무실을 마련하고, 창립총회를 하는 등 준비를 모두 마쳤는데, 담당자가 바뀌면서 갑자기 사단법인 허가를 내줄 수 없다더라"면서 "단체 소유의 버스가 있으니 재단법인으로 신청하라는데, 이 역시 허가를 받을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말했다. 그는 "명확한 규정 없이 재량에 맡기다보니, 설립 허가권이 각 부처별 '권력'처럼 인식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A단체처럼 비영리법인 설립이 주무관청의 재량에 좌우되는 문제가 해소될 전망이다. 법무부는 지난달 17일, 해당 관청의 허가 없이도 비영리법인을 세울 수 있도록 하는 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현행 민법은 학술·종교·자선 등 비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단 또는 재단은 주무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법인을 세울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개정안에 따르면 ▲3인 이상의 사원 ▲법률에 따라 작성된 정관 ▲다른 법인과 동일하지 않은 명칭 등 필요한 요건을 갖추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누구든지 비영리법인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있게 된다(민법 개정안 32조). 주무관청의 허가는 불필요하다. 법무부 법무심의관실 관계자는 "비영리법인 설립을 '허가주의'로 규정한 현행 민법은 50년대 만들어진 구법(舊法)"이라면서 "그동안 법인 설립에 주무관청이 과도하게 개입해 헌법상 기본권인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고, 기부문화를 저해해왔다"고 설명했다. 개정안은 오는 28일 입법예고 기간이 끝나는 대로 국회 법사위를 거쳐 시행될 예정이다. 33개 부처는 개정안에 맞게 법인 관련 규칙들을 정비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개정안을 적극 찬성하는 분위기다. 윤철홍 숭실대 법학과 교수(한국민사법학회장)는 "일본·독일 등은 영리기업처럼 비영리법인도 일정 요건만 갖추면 인가 등 행정처분도 필요없이 당연히 설립되는 '준칙주의'로 바뀐 지 오래다"면서 "우리나라는 부처마다 주관적으로 허가권을 남용하다보니, 법인 설립하려는 이들이 부처별 '허가 쇼핑'을 하는 폐해까지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염형국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상임이사는 "장애인차별금지법 통과에 큰 역할을 한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역시 복지부에서 특별한 사유 없이 법인 설립을 불허해서 민간단체로 활동하고 있다"면서 "이번 개정안은 비영리법인 설립은 물론 민간 기부문화를 좌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변화"라고 평가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개인·기업의 기부문화 역시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동안 주무관청의 허가를 받은 비영리법인이 아니면 지정기부금단체로 신청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정기부금단체는 기부하는 개인, 기업 모두에게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할 수 있다. 이에 그동안 허가를 받지 못해 임의단체로 활동해온 곳들이 속속 비영리법인 인가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기부 문화를 확산하려면 지정기부금단체 허가권을 쥔 기재부의 벽이 낮아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염형국 공감 상임이사는 "지정기부금단체 인정 역시 기재부의 재량에 맡겨져 있는 데다가 절차가 까다로워서, 기업에 기부금 영수증을 끊어줄 수 있는 단체가 몇몇 법인에 한정돼 있는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편, 몇몇 부처에선 개정안이 시행되면 '비영리법인이 난립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 윤철홍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오히려 임의단체로 활동하던 곳들이 정식 법인이 되고 법의 규율과 감시를 받게 되면서, 자금 흐름이 투명해지고 신뢰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철희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교수는 "처음엔 비영리법인이 난립할 순 있지만, 이를 모니터링하는 기관도 생겨날 것이고, 이는 기부문화가 성숙돼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예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