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인기사극(史劇) 《정도전》의 막바지 이야기는 조선 개국 후 정도전(鄭道傳·1342~1398)과 이방원(李芳遠)의 갈등, 그리고 제1차 왕자(王子)의 난(亂)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있다. 바로 이방원의 책사(策士) 하륜(河崙·1347~1416)이다.

정도전과 하륜은 모두 고려에 입사(入仕)해서 조선에서 정승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위정자(爲政者)로서 또 학자로서 대조적인 삶을 살았다. 조선시대 이정형(李廷馨)이 쓴 《동각잡기(東閣雜記)》라는 책을 보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李穡의 碑文이 불러온 파장

신묘년(태종11년)에 축맹헌이 국자조교(國子助敎·국자감의 한 벼슬) 진련(陳璉)이 지은 비명(碑銘)을 받아 역관(譯官) 편에 보내왔다. 그 글 중에 “공양왕이 즉위하니 집권자들은 이색이 자기들에 협조하지 않을 것을 꺼려서 계획적으로 탄핵하여 이색을 장단(長湍)으로 귀양 보냈다” 하는 등의 말이 있었다.

태종이 이것을 보고 “진련이 어떻게 이색이 행한 일을 알아서 이 일을 상세하게 썼겠는가? 옛날에 우리나라 사신이 복서(卜筮)로 인하여 중국과 틈을 낸 적이 있었는데, 역관은 어째서 사사로이 맹헌과 내통을 하였는가? 불러다가 문책하라”고 했다.

(좌측부터) 고려 말 사대부들의 스승이었던 이색, 정도전의 사주를 받은 황거정에 의해 타살된 이숭인,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하륜의 라이벌이었던 정도전

성석린(成石璘)은 “이색의 자손이 중국인과 사통(私通)한 것은 사실이니 그 죄를 다스리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그 말을 좇지 않았다.

간원(諫院·사간원)이 이색의 아들 종선(種善)에게 죄 주기를 청하자, 태종은 “종선은 자기 어버이를 돋보이게 하려 했을 뿐이다.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였다. 간원에서는 또 하륜과 권근에게 죄 주기를 청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비문에 ‘권력을 잡은 자들이 이색이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을 것을 꺼렸다’는 말이 있는데, 그 권력자들이란 게 대체 누구를 칭한 것이겠습니까? 비문에 또 쓰여 있기를 ‘경오(庚午) 5월에 윤이(尹彛)와 이초(李初)를 명나라에 보내 모함하여 이색 등 30인을 청주(淸州)에 귀양 보내고 장차 엄한 벌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니까 홀연히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관사가 다 침수(浸水)되어 문사관(問事官)이 나뭇가지에 올라가 간신히 화를 면하였고 청주의 부노(父老)들은 그것은 이색의 충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윤이와 이초가 이색에 대한 일들을 명나라에 고자질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도 명나라에 해명을 한 바 있는데, 어찌 우리가 모함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꾸며서 죄를 만들려 하였다는 것은 누굴 두고 한 말이겠습니까? 수재(水災)가 난 것이 과연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인 주공(周公)과 같은 덕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고 하겠습니까?

이종학·이숭인 살해 사건

비문에 ‘임신(壬申) 7월에 우리 상왕(上王·태조 이성계)이 즉위하자 이색을 꺼리는 자들이 이색을 짐짓 모함하여 극형(極刑)에 처하고자 하였다’ 하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신(臣)들은 생각하기를 태조께서는 본래 나라를 차지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고려 왕실을 바로 세우고 충성을 다한다는 것에 있었거늘 오히려 이색이 그 무리와 더불어 태조를 제거하려 모의해서 화가 미칠 뻔한 것인데 어찌 이색이 죄가 없는데 우리가 극형을 가하자 하였겠습니까?

청컨대 그의 무리인 하륜은 심문하여 법에 의해 죄를 다스리고 권근은 그의 관(棺)을 베고 집터는 못으로 만들고 가산(家産)은 몰수하여 후세에 경계가 되게 하소서.”

여기서 하륜은 무릇 네 번이나 글을 올려 변명하기를, “비문에 소위 이색을 꺼리는 자라는 것은 남은(南誾)과 정도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만일에 집권한 신하들의 음모가 모두 태조의 명령에서 나왔다고 하면 이종학을 목 매어 죽이고 이숭인(李崇仁) 등 6, 7명을 매질하여 죽인 일을 태조께서 몰랐겠습니까?” 했다.

태종은 “숭인과 종학의 사건은 나도 모르는 일이다. 태조께서는 성격이 곧고 명석한 분인데 창업한 초기에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하고 곧 사헌부(司憲府)에 “이숭인과 이종학을 죽인 실정을 캐내어 보고하라”고 명하였다.

사헌부에서는 “교서사(敎書使) 손흥종(孫興宗)과 체복사(體覆使) 황거정(黃居正)이 정도전과 남은의 지시를 받아, 손흥종은 이종학을 매질했는데 죽지 않아 목 매달아 죽이고, 황거정은 이숭인의 허리를 매질했는데 역시 죽지 않는 것을 보고 말 위에 가로실어 말을 달리게 해서 이웃 고을에 가 떨어져 죽게 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를 받은 태종은 황거정과 손흥종을 순금사(巡禁司)에 가둘 것을 명하면서 “흥종과 거정은 태조의 명을 좇지 않고 권신(權臣)들의 사주(使嗾)를 받아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 태조의 덕망을 더럽혔다. 마땅히 무거운 형벌로 다스리라”고 하였다.>

鄭道傳의 최후

정도전과 남은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다. 이들은 고려에서 벼슬살이하던 시절부터 남달리 뜻이 맞았다. 이들은 조선이 개국(開國)한 후 여러 왕자 중에서 계비(繼妃)인 강씨(康氏) 소생의 방석(芳碩)을 세자(世子)로 책봉하도록 해 '왕자의 난'을 야기했다.

고려 공양왕 때 정몽주(鄭夢周)의 작용으로 대간(臺諫)들이 정도전을 탄핵해 실각(失脚)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남은은 이들이 정도전을 죽일 것을 모의하여 죄를 일부러 씌워 감옥에다 가두었다고 보고 정도전을 구하려다가 실패하였다. 그 후 남은은 잠시 관직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고려에서 정3품 밀직부사(密直副使·비서실 차장)란 높은 관직에도 있었는데 고려를 등지고 정도전과 함께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모의했던 것이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잡아 죽이려고 행동에 나선 날, 정도전은 남은 첩(妾)의 집에 있었다. 정도전이 이곳에 있는 것을 안 방원은 군사를 데리고 몰려갔다. 정도전은 이웃집으로 달아났다. 그 집은 당시 판봉상(判奉常·나라의 제사와 높은 관직의 사람이나 공신들이 죽은 후 칭호인 시호를 제정하는 관청의 수장 벼슬) 민부(閔富)의 집이었다.

민부는 갑자기 숨어들어온 정도전을 보고 “배가 불룩하게 나온 사람이 우리 집에 왔다”고 소리쳤다. 이 말을 듣고 방원의 군사가 민부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방원은 “네가 이미 왕씨를 버리고 또 이씨를 저버리고자 하느냐?” 했다. 이에 정도전은 “만약에 나를 살려주신다면 힘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방원은 즉시 그를 베어 죽였다.

정도전의 아들 정유(鄭遊)와 정영(鄭泳)도 피살되었다. 남은도 다른 곳으로 달아나서 숨어 있다가 군사들에게 들켜 죽었다.

이 왕자의 난 때, 하륜은 방원을 도왔다. 하륜은 고려 공민왕조에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나갔다. 그의 과시(科試)에는 이인복(李仁復)이 지공거(知貢擧·과거시험의 수장), 이색이 동지공거(同知貢擧·과거시험의 부수장)였다.

이인복은 거유(巨儒) 백이정(白?正)에 배워 주자학(朱子學)에 밝았고 문장이 뛰어났다. 원나라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을 살기도 했다. 이인복은 우왕(禑王)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후에 이성계·정도전의 정적(政敵)이 된 이인임(李仁任)의 형이었다. 이인복은 하륜이 과시에 급제했을 때 인상을 보고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 예견해서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과 결혼하게 했다. 사실 그의 예견이 맞았는지 칭송받는 치적(治績)이 하륜에게 많았다.

하륜은 강직한 데가 있어서 간언(諫言)을 해야 할 때에는 곧잘 간언했다. 풍수에 밝았던 하륜은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鷄龍山) 일대로 천도(遷都)하기로 결심하고 공사를 진행할 때, 그곳이 적절치 않다고 홀로 역설해 결국 중단시켰다.

하륜은 정도전과 가깝지 않았지만, 정도전을 대신해 위험을 부담하기도 했다. 명나라가 조선이 올린 표문(表文)에 무례한 내용이 있다면서 그 책임자로 정도전을 지목해 소환을 요구했을 때, 하륜은 자진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의 오해를 풀었다.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이방원을 도왔다.

이방원의 策士

하륜은 정도전·남은·조준(趙浚) 등과는 달리 조선 개국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고려의 권문세족(權門勢族)이었던 이인임의 집안과 인척(姻戚)관계였고, 이색의 제자였던 그로서는 고려를 등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륜은 음양(陰陽), 의술(醫術), 지리(地理)에도 정통했다. 그는 《태조실록(太祖實錄)》을 편찬하였고, 권근과 함께 역사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집필하기도 했다.

하륜은 정도전처럼 권력욕을 강하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정도전 못지않은 지략가였다. 성종 때 학자 성현(成俔)의 《용재총화(傭齋叢話)》를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태종의 하인들이 하륜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태종께 아뢰었다. 태종은 돌아보지도 않고 집으로 가서 대문 앞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륜도 뒤따라 들어갔다.

여기서 태종은 비로소 ‘무슨 이유가 있어 따라왔겠지’ 하고 뒤돌아보며 물었다. 이에 하륜은 “왕자님의 일이 위험합니다. 잔을 엎지른 것은 장차 환란이 있어 미리 고할까 해서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군수 시절 여자 밝혀

태종은 그를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대책을 물어봤다. 하륜이 말했다.

“신은 왕명을 받고 지방에 가는 것이므로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는데 안산군수(安山郡守) 이숙번(李叔蕃)이 신덕왕후(神德王后·태조의 계비 강씨)의 능 정릉(貞陵)을 이장하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에 왔다고 하니 이 사람에게 큰일을 맡길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신도 진천(鎭川)에 가서 기다릴 것이므로 일이 만약 성사되면 신도 급히 불러주십시오.” 태종은 하륜의 말대로 이숙번을 불러 자신의 경우를 말하니 숙번은 대뜸 응하면서 “그런 일은 손바닥 뒤엎는 것보다 쉬운 일입니다”라고 했다.

거사일에 이숙번은 태종을 모시고 궁중의 하인들과 능을 이장할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군기감(軍器監·무기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관청)에서 갑옷과 병기를 탈취한 후 경복궁을 포위했다.

태종은 남문(南門) 밖에서 장막을 치고 그 가운데 앉았다. 그 아래에 다른 장막을 쳤는데, 그곳엔 하륜이 가운데 앉아 있었다. 하륜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가 그가 장차 정승이 될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하륜과 이숙번은 태종의 정사공신(定社功臣)이 되었다.>

조선 중기에 나온 권오(權鼇)의 저서 《해동잡록(海東雜錄)》에도 하륜에 얽힌 이야기가 나온다.

김주는 정사(定社)의 난(왕자의 난)에서 방석 왕자 편에 가담하여 심히 위급한 입장에 놓였다. 김주의 부인이 하륜이 탄 말 앞에 꿇어 앉아 “저는 김주의 처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륜에게 힘을 써서 남편을 구해달라는 청이었다. 이로 인해서 김주는 죽음을 면하였다.>

하륜은 우왕과 창왕(昌王), 공양왕의 폐립(廢立)에 간여하지 않았다. 공양왕 재위 원년(1389)에는 이숭인·권근과 함께 귀양을 가기도 했다. 당시는 이성계가 시중(侍中·국무총리)이었고, 정도전은 그 뒤를 받치는 실세(實勢)였다. 때문에 이인임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귀양을 간 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정도전에 관한 언급은 많지만, 하륜에 대한 언급은 그리 많지 않다. 《고려사》 열전(列傳)에서도 정도전에 대해서는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 반면, 하륜에 관한 것은 없다. 그만큼 정도전이 눈에 띄는 행적을 많이 남긴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서 정도전에 관한 기록은 일찍 끝났다. 그가 일찍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륜의 업적

반면에 하륜은 조선이 들어선 후에도 벼슬살이를 하면서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정종(定宗) 때는 정사공신에 올랐고, 태종 때는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올랐다. 정사공신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석을 제거한 것을, 좌명공신은 태종의 바로 위 형인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한 공을 말한다.

태종에 의해 중용된 하륜은 특히 왕권 강화에 힘썼다. 재상(宰相)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6조 직계제(六曹直啓制)를 도입하여 각 판서들의 권한을 강화했다. 정도전이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꿈꾸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저화(楮貨·지폐) 발행, 신문고(申聞鼓) 설치 등 민생 분야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또 명나라 영락제(永樂帝)가 즉위하자 등극사(登極使)로 가서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옴으로써 조선 건국에 대한 명나라의 승인을 마무리 지은 것도 하륜이었다.

하륜도 박식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박식을 굳이 권력을 잡는 데 활용하지 않았다. 단지 순리(順理)를 좇은 것뿐이었다.

왕조시대 역성혁명의 뒤에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 있기 마련이다. 개국을 위해서 이방원은 정도전의 의욕과 욕망에 협조하였다. 그리고 가깝게 지냈다. 그렇지만 그는 정도전의 지혜와 지략이 후일 칼날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비단 과거 왕조시대에만 토사구팽이 있는 게 아니다. 현세에서도 그런 일들이 우리 위정자들 주변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륜과 정도전의 인생역전은 오늘날 우리 위정자나 지식인들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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