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봄, 주대환(60)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는 세상과 담을 쌓고 칩거했다. 그는 집에서 논어만 읽었다. 한 자 한 자 되새기며 소리 내어 논어를 읽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옆에서 부인 이명희씨가 “왜 책을 읽으며 우느냐”고 핀잔을 줬다. 논어의 한 구절을 읽다가 드디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이 흘렀다. 그를 뒤흔든 건 논어 자한편(子罕篇) 28장에 나오는 12글자였다. ‘지자불혹(知者不惑), 인자불우(仁者不憂), 용자불구(勇者不懼)’.
지난 5월 19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자신의 공부방이자 사회민주주의연대 사랑방인 ‘북촌학당’에서 만난 주대환 대표는 이 12글자를 이렇게 풀이했다. “우(憂)는 먹고사는 문제, 가난에 대한 걱정입니다. 우가 현재에 대한 걱정이라면 구(懼)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람이 우와 구하면 혹(惑)하게 됩니다. 부질없는 시도를 하고 주변의 유혹에 빠지는 겁니다.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허우적거릴수록 더 어려움에 빠져드는 격이죠. 제가 항상 우와 구하다 혹하는 인간이라는 걸 솔직하게 알았습니다. 지자와 인자와 용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당시 그는 무척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권영길 전 민노당 대표의 지역구(경남 창원성산)를 이어받기 위해 민주통합당 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예상외의 패배를 당했다. 야권 단일 후보로 자신이 적격이라고 생각했다가 뼈아픈 패배를 당한 것이다. “망신이었고 창피했죠. 이미 선거를 세 번이나 치러본 사람이 주변에 혹해서 넘어간 겁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 일이고, 제가 당사자가 아니라면 말렸을 일인데…. 안 그래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판에 경선을 치르며 주변 가까운 사람들한테 빚까지 졌죠.”
주 대표는 자신을 뒤흔든 12자가 결국 공자의 자기성찰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공자 역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채 비주류로 평생을 떠돌면서 구와 우를 경계하고 혹하지 말자는 다짐을 한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제대로 뜻을 펼 때를 기다리자는 다짐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는 “그 구절을 공자의 자성으로, 나한테는 참회의 구절로 읽었다”고 했다.
공자와 감정이입이 된 그는 논어에 빠져들었고 논어를 읽으면서 느낀 감정과 생각들을 두서없이 페이스북에 올렸다. 친구들이 ‘재밌다’는 반응을 보이던 와중에 인터넷 매체인 미디어스(MediaUs)에서 제대로 연재를 해보자는 제안이 왔다. 그래서 시작한 게 논어를 자신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이었다. 1주일에 한 편씩 6개월간 연재를 하면서 논어 498장 중 3분의 1 정도의 분량을 24편의 주제로 재해석했다. 이렇게 연재한 그의 글은 지난 4월 초 ‘좌파 논어’(나무,나무)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책으로 나왔다.
책 제목에서 드러냈듯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좌파 지식인이다. 서울대 종교학과를 나온 그는 1970년대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 인천과 창원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2000년대 초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으로 일하며 좌파 정치세력의 핵심 역할을 했다. 민노당이 종북 논란에 휩싸인 것을 계기로 그는 민노당과 결별했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은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주사, 종북 같은 ‘엉터리 사회주의’와 결별하자 현실에서 선진적 사회민주주의를 구현하자는 열정이 남았다. 당을 이룰 만큼 세력은 규합하지 못했지만 연대라는 이름으로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그가 일부 좌파 지식인에게는 보수 반동으로 비쳐지는 유교의 경전에 왜 빠져들었을까. 그는 논어를 어떻게 좌파적으로 읽었을까.
그가 ‘좌파 논어’에서 강조하는 핵심은 논어를 관통하는 인(仁)의 새로운 해석이다. 그는 인을 좌파와 진보세력이 중시하는 ‘연대(solidarity)’로 해석한다. ‘지금 바로 대한민국에 인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제가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를 얘기하면 보통은 스웨덴이나 독일 등 선진국들이 완성한 체제를 부러워하며 우리와는 다른 먼 나라 얘기라고 치부합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도 우리 나름의 모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철학과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쪽 사람들은 천성이 사랑이 넘쳐서 많은 세금을 내면서 약자를 돕고, 우리는 천성이 비정해서 안 됩니까? 저는 사민주의의 바탕을 이루는 연대가 우리 동양사회에서는 인이라는 전통으로 뿌리박혀 있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은 공자 가르침의 핵심이고 논어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글자다. 그가 파악한 바로는 논어 498장 중 51장에서 인이 등장한다. 하지만 공자는 인을 분명히 개념 정의하지 않았고 다양한 문맥에서 썼다. ‘박애, 인류애, 인간애, 동포애, 형제애 등과 비슷한 말인가 하면 때로는 그런 것이 실천되고 있는, 즉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관용하고 양보하는 사회의 상태를 말하기도 하는 것 같다’(‘좌파 논어’)는 것이다. 그는 “더불어 같이 살자는 개념이 결국 연대 아니겠느냐”며 “공자는 인을 외부에서 주입해야 할 그 무엇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 씨앗이 있고 본성 속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예(藝)와 악(樂)의 가르침으로 기르고 드러내야 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공자는 왜 자신의 시대에 더불어 같이 사는 것의 중요성을 얘기했을까. 그는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 전통적인 봉건적 공동체가 무너지고 철기의 도입으로 생산력이 비약하면서 부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며 “공자는 무한경쟁과 불균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경제성장을 하기 위해 각개약진하며 정신없이 뛰어온 우리에게도 이제는 뒤처진 사람을 돌아보는 인, 즉 연대의 정신이 필요하다. 또 서구 민주주의가 추구해온 자유와 평등, 박애 혹는 연대 중에서 우리에게 특히 부족한 것이 바로 연대라고 한다.
“자유와 평등의 나라로서는 구대륙에서 대한민국만 한 나라가 없습니다. 신대륙에는 미국이 있죠. 우리는 나라가 쫄딱 망해 식민지를 거치며 양반들이 모두 추락했고 6·25 전쟁을 거치며 사회가 또다시 뒤집어졌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봉건시대 계급사회의 잔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왕후장상의 후손들입니다. 저만 봐도 낙동강가 누대의 빈농 집안이었지만 식민지를 거치며 자영농이 됐고 부농으로 성장해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대학에 보낼 정도가 됐습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기록하는 것도 더불어 같이 살자는 연대의식이 부족한 탓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각개약진하며 이룬 성장의 바탕에 깔린 자립과 자조의 정신 때문이기도 하다. “폐휴지를 줍는 노인들을 보면 알듯이 우리는 가난해도 남 탓을 하지 않고 열심히 삽니다. 그러다가 정 안 되면 자살하는 겁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됩니다. 뭔가 새로운 가치가 필요합니다. 더불어 같이 사는 연대만 추가되면 우리 사회는 또 한 단계 비약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일부 좌파 인사들이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라고 비난하는데 그건 잘못된 관점”이라며 “우리나라 좌파는 진짜 좌파가 아니다”고 비판했다. “우리나라 좌파의 목표는 자유·평등·박애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민족주의 정서에 기대어 반미·자주·친북 같은 것들을 기본 정서로 하고 있습니다.
자유·평등·박애를 추구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기본 정서에 다 묻혀버렸습니다. 제가 몸담았던 좌파 진영 사람들은 민족주의 정서에 거슬리는 얘기를 하면 감정적으로 확 반발하지만 진보의 가치와 진보적 정책에 대해 서로 이견이 있을 때는 그만큼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슴속에 있는 것은 피끓는 민족주의이고, 머릿속에 진보의 가치가 약간 있는 정도죠.”
그의 좌파 진영 비판은 공자가 인의 길로 제시한 예(禮)와 악(樂)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다. 그에 따르면 예는 인간관계에서 최선의 거리를 유지케 하는 수단이다. 인간들이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해 정해 놓은 규칙과 행동의 규범이라 할 수 있다. 또 악은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수단이다. 이러한 예악은 사(士), 지금의 지식인들에게는 더 없이 필요한 덕목이다.
“예가 없으면 사람끼리의 최선의 거리가 무너지고 너무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일을 반복합니다. 소인(小人)들의 분열상을 보이는 것이죠. 제가 경험한 진보좌파 운동에서도 예와 악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분열상이 반복됐죠. 내가 잘났고 똑똑하다는 의식들만 있었습니다.”
‘북촌학당’에서 세월을 낚고 있는 그는 공자가 결국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할까. 이와 관련 그는 공자의 주장은 이상적이었지만 행동은 현실적이었다고 강조했다. 천하의 패권을 다투기 시작한 전쟁의 시대에 더불어 살고 세금을 낮추라는 이상적인 주장을 폈지만, 권력을 잡아 뭔가를 해보고 싶어했고, 실제 많은 제자를 벼슬길에 넣었다. 그는 “공자의 제자들은 원만한 대인관계 등 조직생활에 잘 적응하고 훈련받은 사람들”이라며 “공자가 강조한 군자(君子)도 결국은 조직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예악으로 자신을 단련하며 서로 뭉쳐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간 공자의 제자들은 한나라에 이르면 유교를 강령으로 하는 집권세력이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좌파 논어’에서 이렇게 썼다. ‘공자는 흔히 정치가로서 실패하고 선생님, 교사로서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달리 보면 공자는 자기 개인이 권력을 잡지는 못했지만, 당(黨)을 만드는 데는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이 아닌가? 나는 평생 당(黨)을 만들고자 동분서주했지만 실패하였으니, 이제라도 그에게 무언가를 배워서 나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옳은 듯하다.’
논어에서 새로운 인생을 찾은 또 한 명의 좌파 지식인이 있다. 1988년 인천 5·3 사태 당시 주동으로 몰려 옥고를 치른 이우재(57) 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련) 집행국장. 그 역시 방황과 좌절의 시기에 논어에서 길을 찾았다. 그는 인천에서 학당을 열고 논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가 논어를 새롭게 만난 때는 1992년.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국내 운동권도 속절없이 내려앉던 시기였다. 당시 운동권 동지들 중 상당수는 정치로 떠나고 일부는 경실련과 참여연대 등 시민운동에서 새 길을 찾았지만 그는 세상에 대한 화를 삭이지 못하며 술로 날을 지샜다.
“내가 이끌던 조직을 해산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였습니다. 책장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논어를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죠. 그때 논어 첫 장인 학이편(學而篇) 세 번째 구절이 머리를 쳤습니다. ‘인부지이(人不知而) 불온(不溫)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으니 이 또한 군자 아닌가)’라니? 공자가 나보다 위대한 사람이 분명한데 그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이를 이겨내고 성인이 됐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상갓집 개 소리를 듣고 밥도 쫄쫄 굶어보고 온갖 수모를 겪었는데도 말이죠. 그러자 공자의 반도 안 되는 인간이 왜 세상에 앙앙불락하는가라는 부끄러움이 들었죠. 결국 이건 내가 나를 잡아먹는 게 아닌가, 결국 이게 자학이라고 생각하자 다른 건 몰라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군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논어를 제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5월 20일 서울 광화문의 커피숍에서 만나 이런 경험을 들려주던 그에게 전날 만난 주대환 대표가 논어를 접한 얘기를 전해주자 “논어는 진짜 인생이 꽉 막혔을 때 도움이 되는 고전”이라며 주 대표 말에 동의했다. 논어를 읽다 보면 갑자기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며 막힌 게 뚫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논어는 그의 삶의 태도도 변화시켰다. 수틀리면 술자리도 바로 뒤집어버리던 사나움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는 것이다.
“논어를 3~4년 읽자 주변에서 내가 바뀌었다고 해요. 지금은 마음에 안 들어도 성질도 안 내고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갑니다. 일진이 사납나 보다 생각하고 그냥 가버려요. 논어를 읽기 전에는 눈도 찢어진 게 사납고 독한 기가 가득했는데 지금은 그게 다 사라졌다네요.”
이후 그가 논어를 제대로 읽은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논어를 8년간 읽고 2000년 ‘논어 읽기’(21세기북스)라는 책을 내놓았다. 원고지 2800매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역저다. 주희의 ‘논어집주’ 등 온갖 고전적인 논어 주석을 인용하며 원문 번역에 충실하고자 애썼고 거기에 나름의 해석까지 가미했다. 그의 논어 읽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작년 말에는 ‘논어 읽기’ 증보판을 내놓았다. 이건 20년 이상 논어를 읽은 결과물로 “주석에 덜 휘둘리며 내 의견을 더 넣었다”고 한다. “논어는 나이가 먹을수록 이해가 되는 책입니다. 젊을 때는 그 나이만큼만 보이고 이해가 잘 되지 않다가 계속 읽으면 어느 순간 새롭게 이해되며 해석이 가미됩니다. 주희도 말년에 새롭게 터득한 내용을 가미하며 논어집주를 계속 고쳐나갔습니다.”
작년 증보판에서 새로움이 더해진 대목은, 예컨대 논어에서 가장 유명하지만 해석이 까다로운 안연편(顔淵篇)의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이란 구절이다. “기존 주석에서 이 구절 해석의 방점은 극기(사욕을 버리고 내 입장이나 주장만 관철시키지 말라는 의미)와 위인(인을 이룬다)에 있었습니다. 복례는 대부분 주석에서 대충 지나쳐 뭔가 빠져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첫 책에서 나는 예(禮)를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분수를 알고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복례를 조화로운 사회적 분업 관계로 돌아가자는 의미로 봤죠. 하지만 이번 증보판에서는 예를 조금 다르게 봤습니다. 남녀, 노소, 귀천과 같은 사람 사이의 다름과 차별성이라고 봤죠. 이와 대비하면 인(仁)은 같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한다는 의미이죠. 그럼 어떻게 다름이 같음이 될까요? 사람을 그때그때의 사회적 관계에 맞게 제대로 대해주면서 차별성과 특수성을 실현시키는 것이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한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20년 넘게 지속된 그의 논어 읽기는 그를 아예 훈장의 삶으로 인도했다. 그는 지금까지 논어를 20번 정도 가르쳤다. 일주일에 한 번, 열 달씩 걸려 처음부터 끝까지 논어 강독을 한 것이 20차례에 이른다는 것이다. 논어를 가르치는 훈장으로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강의를 하다가 후배들의 도움을 받아 아예 서당까지 차렸다. 고향인 인천의 한 오피스텔에 2009년 ‘온고제(溫故齊)’라는 서당을 열었다. 그는 이곳에서 동양고전을 가르치고 있다. 인터넷과 시민단체 등에서 그의 강의를 알고 찾아와 고전을 배운 제자들이 지금까지 70~80명가량 된다.
그는 사람들이 온고제를 찾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사이보그를 만든다고 할 정도로 물질문명이 발달했지만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고민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논리만 정교해졌을 뿐이지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죠. 고전은 왜 왔는지 모르지만 어디론가 끌려가는 한 번밖에 없는 이 소중한 삶을 스스로 내 의지로 살라고 가르칩니다. 돈과 명예가 사는 삶이 아니라 나를 찾아야 한다는 게 고전의 가르침입니다.”
그는 몇 년 전부터는 공자를 넘어 맹자로 나아갔다. 수년간 읽어나간 맹자도 2012년 ‘맹자 읽기’(21세기북스)라는 책으로 정리돼 나왔다. ‘논어 읽기’보다 더 두꺼운 900쪽이 넘는 분량이다. 주희를 비롯해 다산 정약용, 이토 진사이(伊藤仁齊·에도시대의 유학자) 등 다양한 주석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맹자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다.
그는 “논어는 운문이고 읽을수록 새로운 해석의 여지가 많지만 맹자는 산문이고 명확하다”며 “‘맹자 읽기’는 ‘논어 읽기’보다 증보판이 나올 가능성은 적을 것”이라고 했다. “예컨대 공자는 사람이 성선(性善)에 가깝다고는 봤지만 성선이라고 못 박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맹자는 분명히 성선이라고 못 박죠.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요순(堯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맹자는 이런 성선설을 통해 우리가 완벽한 사회를 만들 능력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에 따르면 공자와 맹자는 내세우는 핵심 개념도 좀 다르다. 공자는 인(仁)과 예(禮)를 강조했지만 맹자는 인과 의(義)를 앞세운다. 이는 두 사람이 처한 시대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에는 주(周)라는 국가가 형식적으로나마 남아 있었습니다. 때문에 공자는 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주례를 복구시키려고 했죠. 하지만 맹자의 전국시대 때는 이미 주는 붕괴되었습니다. 맹자는 인의의 정치를 펼쳐 혼란을 빨리 끝내고 누군가 천하를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공맹의 도(道)를 천착하고 있지만 그 역시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면서 사회주의에 자연스레 빠져들었다. 유신 시절인 1978년에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19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1988년에는 5·3 사태로 모두 세 번 구속되며 골수 운동권의 삶을 살았다.
“지금은 뒷방(노동당 지도위원이자 고문)에 앉아 후배들 밥이나 사주는 처지지만 아직도 신념과 열정이 남아있다”고 한다. “체제를 선택하라고 하면 현실적으로 난감한 문제는 있지만 사회주의는 추구할 가치는 된다고 봅니다. 빵을 똑같이 나눠 주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기계적 사회주의와 일당독재 등 소련과 중국이 실패한 원인을 찾아서 보완해 가져가야 할 과제라고 봅니다. 적어도 지금의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는 답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그에게 공맹의 도는 어떻게 해석될까. 그는 공자와 맹자를 자신들이 살던 시대상황에서는 위험한 주장을 편 혁명적 지식인으로 본다. “논어 계씨편(季氏篇)에 보면 ‘한 집안과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가난한 걸 근심하지 않고 균등하지 못한 걸 근심하며 인구가 적은 걸 근심하지 않고 화합하지 않는 걸 근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보면 빵을 키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나눠 주는 게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공자는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토지가 사유화되고 부가 특정 세력에 집중되며 벌어지는 부작용을 심각하게 봤습니다. 때문에 이(利)를 미워하며 사람끼리 그렇게 살면 안 된다,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 겁니다.”
공자의 인(仁)도 결국 ‘보듬고 함께 살자’ ‘서로 사랑하자’는 표현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더 심각한 뜻이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공자는 인을 이루는 방법을 서(恕)라고 했고, 그걸 기소불욕(其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이라는 구절로 표현했습니다.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맞아봐서 아프면 남도 때리지 말라는 것으로, 이건 당시의 계급사회에서 인간은 모두 똑같다는 혁명적인 주장입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요즘 공자의 핵심 사상이 인(仁)이 아닌 학(學)에 있다는 생각도 한다고 했다. 배움을 통해 누구나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누구나 가능성을 갖고 태어났다는 주장이야말로 공자 사상의 핵심이 아니냐는 생각이다. 그는 “논어의 시작이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이고, 자신이 성인이나 어진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배우는 사람(學人)이라는 건 인정하는 공자의 태도를 보면 학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맹자는 공자보다 더 위험한 주장을 편다. “맹자는 역성혁명을 일으킨 탕왕이나 무왕을 칭찬했습니다. 인의(仁義)를 해쳐 역성혁명의 대상이 된 권력자는 왕이 아니라 한 사내(一夫)에 불과하다고 했죠. 한 사내를 시해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권력자 입장에서는 섬뜩한 얘기로, 명나라 때 맹자가 금서가 된 이유입니다.”
그는 “맹자에는 현대적으로 음미할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고 강조한다. 맹자에는 주권 행사라는 현대적 의미의 민주(民主)는 없지만 민본(民本)과 민권(民權) 의식은 들어있다는 것이다. 특히 백성을 먹여살리는 것, 생업을 만들어주는 것(制民之産)이 정치의 제1과제라는 가르침은 청년 실업문제가 심각하고 비정규직이 넘치는 현실에서 음미할 대목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월호 참사를 보며 국민 모두가 아파하고 우는 것을 보면 맹자가 명확히 얘기한 성선설과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맞는 것 같다”며 “2500년 전의 공맹의 얘기가 모든 답을 줄 순 없지만 적어도 사회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공맹은 여러모로 유익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