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골수도(孟骨水道)의 관문인 전남 진도군 서거차도 주민 최환규(68)씨의 휴대폰으로 중년 남성이 전화를 걸어왔다. 세월호 참사 30일째였던 지난 15일이었다. "혹시 최환규 선생님이십니까? 세월호 사고 때 보살펴주신 학생의 아버집니다. 벌벌 떨고 있던 제 아이를 보살펴 주신 분이 선생님이라는 걸 알아내는 데 꼬박 한 달 걸렸습니다." 안산 단원고 나정훈(17)군의 아버지 나영진(53)씨였다.

4월 16일 안산에서 진도로 달려온 나영진씨는 진도체육관에서 아들을 발견하고는 눈물을 쏟았다. 세월호 침몰 당시 정훈이는 배 우현 난간을 잡고 있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고 했다. 다시 보니 정훈이는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섬에 들어갔다 왔다"고 했다. "해병대 아저씨 집에 있다 왔어요. 이 옷도 아저씨가 준 거예요. 라면도 끓여줘서 잘 있다 왔어요." 정훈이는 연고와 반창고 한 갑을 쥐고 있었다. "탈출할 때 손에 상처가 났는데 아저씨가 치료하고 준 것"이라고 했다. 정훈이는 구조자 60여명에 섞여 전남 행정선을 타고 사고 해역에서 가장 가까운 서거차도에 있다가 온 것이었다. 정훈이는 그곳이 서거차도라는 걸 몰랐다.

안산으로 돌아온 정훈이는 입원 1주일 만에 "이 슬리퍼 그때 해병대 아저씨한테 받은 건데…"라고 말했다. 나씨는 아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아들은 그 집을 '6남매가 있는 집' '아저씨가 해병대'라고만 기억했다. 두 마디를 단서 삼아 수소문한 나씨는 사고 한 달 만에야 최씨와 연락이 닿았던 것이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날. 서거차도 서거차도리(里) 마을 스피커에선 허학무 이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객선 침몰 사고 승객들이 우리 섬에 왔으니 집에 있는 이불과 수건을 챙겨서 부두로 와 주십시오!" 밭을 갈고 있던 최환규씨도 벌떡 일어섰다. 이불 다섯 채, 수건 10여장을 챙겨 부두로 뛰어갔다.

(사진 왼쪽)세월호 침몰 현장에서 구조된 학생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줬던 최환규·장수자씨 부부. (사진 오른쪽)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구조돼 서거차도 최환규씨 집에 머물던 남학생 12명의 이름. 최씨는 “학생들의 신원을 알아내려고 종이에 이름을 쓰라고 했는데 학생들이 추위와 충격 탓인지 글씨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고 했다.

월남 참전용사인 그는 "전쟁에도 나가봤지만 그곳이 정말 전쟁터였다"고 했다. 최씨는 물에 젖어 새파랗게 질린 학생들에게 이불을 감아주며 해경에게 소리쳤다. "여기로 온 애들은 우리가 돌볼 테니 사람 더 구하시오." 정훈이를 포함한 남학생 12명을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최씨는 부인(69)에게 전화했다. "보일러 미리 틀어 놔야겠어!" 부부는 젖은 옷을 입은 학생들에게 장롱에서 옷 5~6벌을 꺼내 입혔다.

노부부는 "속이 따뜻해야 진정된다"며 컵라면 13개를 사서 물을 끓였다. 어떤 학생들은 그러나 그것조차 넘기지 못했다. 차츰 안정을 찾은 학생들은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속보를 보고는 박수치며 좋아했다. 부모와 통화가 이뤄진 몇 명은 "살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최씨 부부는 집에 있던 슬리퍼와 신발을 맨발인 학생들에게 신겨 팽목항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때 우리 아이한테 입혀주신 옷 깨끗하게 빨고 다려서 개어 놓았습니다. 만나는 날 꼭 돌려드리겠습니다."(나씨)

"그런 건 안 돌려줘도 되고 아이들이 건강하면 그걸로 됐습니다."(최씨)

최씨는 "아이가 집 벽에 걸린 참전용사증을 보고 '해병대 아저씨'라고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TV 뉴스를 보니 우리 집사람 하늘색 티셔츠를 입은 아이가 팽목항에서 아버지와 포옹하는데 다행이다 싶었다"고 했다. 최씨는 12명 아이의 이름이 적힌 종이쪽지를 갖고 있다고 했다. "신원을 알기 위해 아이들보고 이름을 적어보라 했지요." 아이들은 그때까지도 손을 벌벌 떨었다고 한다.

안산의 나씨는 "애들이 금방 안정을 되찾은 건 두 분이 보살펴 주신 덕분"이라고 했다. 나씨는 다른 학부모와 함께 곧 서거차도를 찾아 주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