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스물셋 새신랑과 열아홉 새신부가 서울 종로구 누하동 'ㅁ' 자 모양 기와집(86㎡·26평)에 헌책방을 차렸다. 이름은 '대오서점'.

그 뒤 63년, 서울은 변했다. 이 집은 그대로다. 문 열 때나 지금이나 네모난 안마당을 중심으로 가게 한 칸, 부엌 한 칸, 살림방 세 칸이 오밀조밀 어깨를 맞대고 있다. 변한 건 딱 하나. 작년 12월부터 책 대신 차(茶)를 판다. 1대 주인장 조대식(1929~1997) 할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부인 권오남(82) 할머니가 꾸려오던 가게를 막내딸 조정원(52)씨와 외손자 장재훈(20)씨가 이어받았다.

조정원씨는 "가게를 어떻게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가족회의 끝에 내가 나서게 됐다"고 했다. 혼자선 엄두가 안 나, 미국에서 음대 다니던 아들에게 "어차피 군대도 가야 하니 들어와 도와달라"고 했다. 아들이 군말 없이 따랐다. 그는 일곱 살 때까지 대오서점 안마당에서 놀며 외할머니 손에 자란 청년이다.

서울 누하동 서촌에서 63년간 헌책방 명맥을 이어온 대오서점이 문을 닫았다. 대신 헌책방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북카페로 태어났다. 3대를 이어 대오서점을 지킨 할머니와 딸, 손자가 한자리에 섰다.

이 집은 수년 전부터 '서촌(西村)의 명소'로 떴다.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헌책방이라고 소문나, 주말마다 사람들이 찾아와 디카로 찍고 블로그에 띄웠다. 작년엔 KBS 드라마 '상어'에 등장했다. 드라마 초반 남주인공이 명화 도록(圖錄)을 사러 들른 책방이 여기다.

명소가 됐다고 가게가 유지되는 건 아니다. 여러 해 전부터 매출은 '0원'에 가까웠다. 오래된 집이라 수도든 보일러든 한 번 고장 나면 목돈이 들어갔다. 가족들이 카페를 연 건 '가게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해서다.

카페가 된 뒤에도 이 집 풍경은 여전하다. 해묵은 책 수천 권이 골목에 면한 헌책방을 천장까지 꽉 채웠다. 안쪽 살림집 툇마루와 시렁에도 옛날 책이 빼곡하다. 안방 아랫목, 얌전하게 손때 탄 오동나무장은 권 할머니가 시집올 때 시어머니가 짜준 것이다.

세탁기·다리미가 흔해지기 전, 권 할머니는 안마당 평상에 다듬잇돌을 놓고 시어머니(작고)와 마주 앉아 아홉 식구 빨래를 방망이로 두들겼다. 그 돌도 그대로다. 다듬이질할 줄 아는 동네 할머니들이 얼마 전 이 집에 모여 '다듬이질 대회'를 했다. "난타 공연 절루 가라였어요."(딸 조씨)

권 할머니가 "영감님 가신 뒤론 돈 벌려고 책방을 했다기보다, 차마 닫을 수 없어 매일 열었다"고 했다. "요전에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서 노는데, 다들 자기는 '사랑 못 받고 살았다'고 해요. 우리 집 양반은 저밖에 몰랐지요. 그 양반이 워낙 책을 좋아했어요. 저도 책 만지고 파는 게 참 좋았고요. 우리 집 오는 손님들이 좋았어요. 헌책 사러 오는 사람은 다 착해요. 돈 없는데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거든."

조 할아버지 생전에 6남매는 수없이 "이사 가자"고 했다.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이 집에 우리 식구 삶이 다 들어 있다"고 했다. 그가 헌책방 하면서 건설업도 잠깐 한 적 있다. 믿었던 사람에게 돈을 떼여 금방 망했다. 딸 조씨는 그때 초등학생이었다. "학교에서 오다 아버지가 남의 집 허드렛일 해주는 모습을 보고 얼른 도망갔어요. 저만치서 돌아보니 아릿했지요."

헌책방 전성기는 1970년대까지다. 참고서·자습서가 주로 나갔다. 어려운 시절 한두 권 슬쩍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해 질 무렵 문 닫고 가게를 살피다 책이 몇 권 없는 걸 봐도, 조 할아버지는 "필요한 사람이 가져갔겠지"하고 더 말 안 했다. 없어진 책이 며칠 뒤 가게 앞에 도로 놓여 있었던 적이 있다. '양심에 걸려 못 보겠다'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권 할머니는 "그 일 생각하면 내가 되레 미안하다"고 했다.

"6남매 키우느라 빠듯했어요. 책 도둑을 잡아내진 않았지만, 돈 없는 학생들한테 '거저 가져가라' 소리도 못했지요. 세월이 가니 '아이고, 그냥 줄걸' 싶어요. 그때 책 가져간 분들이 꼭 한번 들러주시면 좋겠어요. 차 한잔 대접하고 싶어요."

헌책방 상호는 조 할아버지가 지었다. 신혼부부 이름에서 가운데 글자를 하나씩 땄다. '대'와 '오'. 권 할머니는 "첫딸 안고 나일론 치마 입고 친정 가던 날, 평생 제일 행복했다"고 했다. 나일론 치마는 그해 서울을 휩쓴 패션이었다. 그 치마 지어준 시어머니를 권 할머니는 평생 모셨다. 시어머니는 2005년 아흔아홉에 눈을 감았다. 말년에 권 할머니 손을 잡고 "내가 너 고생시키면 어떡하느냐"고 한 적 있다. 권 할머니는 "제가 6남매 낳을 때 어머님이 친딸처럼 구완해 주셨잖아요? 저도 똑같이 할 테니 걱정 마세요"했다. 마지막 8년 두 노인은 한 방에서 한 이불 덮고 손잡고 잤다.

그런 사연이 깃든 집이 헐리지 않고 오래오래 손님 맞는 게 대오서점 주인장 3대(代)의 바람이다. 학생 견학 대환영. 홈페이지(www.facebook.com/deobookstore33), 전화 (02)735-1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