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는 원칙을 버린 대충주의와 숱한 판단 오류가 겹쳐 일어난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이 배는 짙은 안개 속에서 무리하게 출항했고, 입사 4개월 차 3등 항해사의 지휘로 위험한 물길을 통과하다 사고를 냈다. 엉성하게 묶은 짐이 쏠려 배가 기울자 선원들은 승객을 버리고 가장 먼저 탈출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선원의 명예란 말을 들먹이기조차 낯뜨거운 세월호 사건은 원칙이 송두리째 무너져내린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그 대가를 어린 고교생들이 치렀다. 세월호 참사에 나타난 판단 오류와 잘못을 10가지로 나눠 짚어봤다.
1. 안개 속 무리한 출항… 예고된 비극
세월호는 출항부터 모든 것이 대충이었다. 세월호 출항 예정 시각이었던 지난 15일 저녁 6시 30분엔 인천항에 안개가 자욱해 다른 선박들은 출항을 포기하고 있었다. 세월호만 2시간 30분 늦게 출항을 강행했다.
세월호는 운항 허가가 나자 규정을 위반해 짐을 더 싣기 시작했다. 50t짜리 대형 트레일러부터 굴착기, 지게차까지 더 실어 자동차 총 180대 등 화물 3608t을 실었다. 규정상 화물은 987t만 실어야 했다. 규정의 4배에 가까운 화물이 실린 것이다. 화물 적재를 마친 뒤 10~15분간 화물을 단단히 고정해야 했지만, 이것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세월호는 마지막 짐을 실은 지 3분 만인 오후 9시에 출항했다. 화물을 제대로 고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렇듯 선내에 대충 실린 화물은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규정 무게의 4배에 가까운 화물은 배가 기울면서 한쪽으로 밀렸고, 이는 세월호의 복원력을 잃게 해 침몰하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구속된 1등 항해사 신모(34)씨는 사고 원인을 묻는 말에 "세월호의 복원력이 없었다"고 답했다.
2. "세월號, 사고 전부터 뒤뚱거리고 불안"
만든 지 20년 된 '고물배' 세월호는 언제 어떤 사고를 낼지 알 수 없었다. 무리한 증축으로 무게중심이 불안정했고, '사고 이전부터 뒤뚱거려 불안했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청해진해운은 2012년 18년 된 노후 선박을 일본에서 사들여 면허를 받았고, 선실 증축을 위해 개조했다. 선박 후미 윗부분이 증축되면서, 배 아래쪽에 있어야 할 무게중심이 위로 올라가 세월호의 복원력이 크게 약해졌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선사 검사를 통해 증축 허가를 내준 곳은 선사들의 모임인 해운조합이었다. 지난 2월 통과한 선박 설비 안전검사도 제대로 됐는지 의문이다. 승객 전원을 구하고도 남을 구명정 46개가 있었지만, 펼쳐진 건 한 개뿐이었다. 구명정 잠금장치가 풀리지 않으면서 나머지는 정상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낡은 하드웨어도 문제였지만, 소프트웨어는 더 엉망이었다. 10일에 한 번 선내 비상훈련이 기본이지만, 선장·선원들은 비상훈련은커녕 기본 매뉴얼도 모르고 있었다. 청해진해운 이 지난해 쓴 교육훈련비는 54만1000원 이었다.
3. 험로 지휘한 '입사 4개월차 3등 항해사'
세월호 침몰 사고는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적당주의와 대충주의가 부른 참사로 드러나고 있다.
세월호가 침몰한 곳은 우리나라에서 둘째로 조류가 빠르다는 위험천만한 '맹골수도(孟骨水道)'였지만, 이 지역의 운항을 지휘한 사람은 입사 4개월째인 3등 항해사 박한결(26)씨였다. 합동수사본부 관계자는 "박씨가 인천에서 제주로 운항할 때 맹골수도 구간에서 조타를 지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밝혔다. 원래 맹골수도 구간 조타 지휘는 박씨가 아닌 1등 항해사의 몫이었다. 그러나 세월호의 출항이 2시간 30분 늦어졌음에도 시간표를 그대로 놔뒀기에 '초보 항해사'인 박씨가 지휘를 맡게 된 것이다. 이곳을 통과할 때 이준석(69) 선장은 조타실도 비웠다. 그는 교대를 마친 뒤 선실에서 잠을 자고 담배를 피운 것으로 알려졌다. '맹골수도같이 물길이 험한 곳을 지나갈 때 누가 조타를 지휘해야 한다'는 식의 규정은 없다. 그러나 선원법은 '선장은 좁은 수로를 지나갈 때 또는 위험이 생길 우려가 있을 때는 직접 지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4. 초기대응 실패… '골든타임' 12분 날려
세월호는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기 시작할 때 사고 신고를 엉뚱하게 제주 해상교통관제센터(VTS)에 가장 먼저 했다. 이때가 16일 오전 8시 55분이었다. 급선회로 배에 이상이 생긴 지 7분 뒤였다. 사고 수역 관할인 진도 VTS와 세월호의 교신이 이뤄진 것은 오전 9시 7분. 승객 구조에 가장 중요한 초기 대응 시간을 12분이나 허비한 셈이었다.
뒷북 대응은 진도 VTS도 마찬가지였다. 세월호는 진도 VTS 관할 수역에 16일 오전 7시 7분에 이미 진입해 있었다. 하지만 진도 VTS는 세월호의 관할 해역 진입 사실은커녕 사고 소식을 해경 본부를 통해 들을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세월호가 진도 해역에 진입한 두 시간 동안 100도 이상 급선회하는 등 이상 징후가 포착됐다. 진도 VTS가 레이더만 제대로 봤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진도 VTS와 세월호는 승객의 탈출 결정을 서로 미루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에 대해 "선장이 먼저 탈출을 결정했어야 하며, 그렇게 안 할 경우 해경 소속인 진도 VTS가 지휘했어야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허둥대는 사이에 구조를 위한 '골든 타임'은 지나갔고, 학생들은 바다에 가라앉았다.
5. 승객 버리고 脫出… 사상 최악의 선원들
침몰 신고를 받은 해경과 주변 선박이 구조를 위해 세월호로 빠르게 접근하는 동안 선내에는 "제자리에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만 나왔다. 세월호가 제주 VTS에 침몰 신고를 한 후 30여분이 지난 오전 9시 30분까지도 별다른 조치 없이 똑같은 방송이 반복됐다. 이미 선체는 45도 가까이 기울어져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인 건 선원들뿐이었다. 승객들이 안내 방송을 믿고 있던 사이 선장과 항해사 등은 9시 37분쯤 자기들만 아는 통로를 이용해 배 밖으로 나왔다. 이들은 해경 경비정에 의해 제일 먼저 구조됐고, 배가 완전히 가라앉기도 전에 땅을 밟았다. 승무원 29명 중 68.9%인 20명이 구조됐다. 단원고 학생들은 325명 중 23%에 불과한 75명만 구조됐다. 선장 이준석씨는 구조 당시 선원이 아닌 일반인으로 신고해 고의로 신원을 숨겼다. 이씨는 구조된 다른 승객 사이에 섞여 응급진료소에 들어와 있었다.
외신들은 이 선장을 '세월호의 악마'로 불렀고, 승무원들은 '선원의 치욕'이라고 했다.
6. '전원 구조' 문자… 천당·지옥 오간 나라
세월호가 침몰한 날인 16일 오전 11시 9분 국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경기도교육청이 알려온 '학생 전원 구조' 소식 때문이었다. '큰 사고가 날 뻔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사람들은 곧 절망적인 소식을 듣게 됐다. 대참사가 예상된다는 얘기였다. 도교육청은 "해경의 섣부른 첩보를 듣고 잘못된 소식을 전했다"고 사과했다. 이후로도 관계 부처의 헛발질은 계속됐다.
안행부·해수부·해경은 이날에만 구조 인원을 368명→164명→175명으로 계속 정정했다. 오락가락 발표에 온 나라가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전체 승선자도 477명에서 459명→462명→475명으로 바뀌었다. 실종자 수는 계속 늘어났다. 16일 오후 1시에 107명이던 실종자는 같은 날 오후 4시 30분 기준 293명으로 껑충 뛰었다. 정부는 참사 사흘째인 18일 "전체 승선자 인원은 476명, 구조자는 174명으로 확인됐다"고 확정 발표했다. 하지만 정부는 22일 수습된 외국인 시신 1구가 승선자 명단에 없는 사람이라고 발표했다가, 이미 발견된 동일인이었다고 정정하는 등 계속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7. 허둥댄 정부… 대통령만 쳐다본 공무원
사고 대응 과정에서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대통령만 바라보는 일부 공직자들의 행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실종자 가족들이 16일 사고 직후부터 "수색 현장을 실시간으로 보고 싶다"고 CCTV 모니터 설치를 요청했지만 이는 묵살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17일 현장에 와서 설치를 약속하자 그날 밤 즉각 설치됐다. 대통령이 "왜 자꾸 통계가 틀리느냐"고 지적하자 공무원들이 승선자 숫자가 틀린 걸 알면서도 한동안 바로잡지 않았다는 말도 나왔다. 공무원들은 책임이 돌아올 일을 면하자는 생각만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답답한 가족들은 지난 20일 청와대로 가겠다며 행진을 시도하기도 했다.
사고 발생 직후 해수부·안행부·해경 등은 별도의 사고대책본부를 꾸려 전국에 대책본부만 10여 개가 난립했다. 정홍원 총리를 본부장으로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를 꾸리기도 했지만 다시 본부장을 이주영 해수부 장관으로 교체하는 등 혼란은 극에 달했다. 대책을 총괄해야 할 안행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17일 이후 공식 브리핑을 하지 않고 있어 사실상 '임무 해제'됐다.
8. "진입" "아니다"… 오락가락 구조 작전
22일 오후 4시. 세월호 실종자들이 모여 있는 전남 진도 실내체육관. 선내 실종자 구조 작업에 '고등어잡이배'가 동원된다는 소식이 들리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졌다. 이 배에 달린 수중등은 물 안까지 불을 밝힐 수 있어 야간 구조에 큰 도움이 된다. 실종자 가족들은 사고 첫날부터 "밤에도 구조를 할 수 있도록 '집어등'이 있는 오징어잡이배, 고등어잡이배, 잠수대원들이 쉬다가 재잠수를 할 수 있는 바지선을 동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해경 측은 이에 즉각 반응하지 않고 있다가 너무 늦은 시간에 이를 도입해 비난을 사고 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정부 구조 작업에 대한 실종자 가족들의 불신은 극에 달하고 있다. 18일의 첫 선내 진입 성공, 19일의 첫 선내 시신 수습 모두 민간 잠수요원들이 해냈다. 가족들은 "지금껏 군·경은 뭐 하는 거냐"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지난 18일 안행부 측은 "선체에 구조대가 진입했다"고 발표했지만, 해경은 1시간 만에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 안행부는 이에 대해 사과했다. "잘하는 건 사과밖에 없느냐"는 말도 나왔다.
9. '나사 빠진' 사후대처, 가족들은 울었다
정부는 어설픈 사후 대처로 가족들을 울렸다. 지난 21일 오전 1시 15분. 안산 제일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겨진 A(17)군의 시신은 가족에게 인계됐다. 그러나 DNA 검사 결과 그는 다른 사람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7일엔 박모(17)양으로 알려진 시신이 이모(17)양인 것으로 정정돼 목포→안산→목포로 이동하는 일이 있었다. 첫 시신 인계 당시 정부는 "현장에서 유족이 시신을 확인하면 바로 인계할 수 있다"고 밝혔다. 17일 시신이 바뀌는 사고가 나자 "DNA 검사를 거쳐야 시신을 인계할 수 있다"고 방침을 변경했다. 그러나 DNA 검사에 하루가 걸리는 등 유족의 반발이 커지자 22일엔 "DNA 검사 없이 인계가 가능하지만 장례식은 DNA 검사 후에 해야 한다"고 방침을 또 바꿨다. 22일 오전 1시엔 시신 검안을 맡은 검찰·병원 측이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해야 시신 인계가 가능하다"고 해 유족과 충돌했다.
합동분양소 설치도 진통을 겪고 있다. 22일 경기도교육청은 "유족·안산시와 협의해 화랑유원지에 확대 분향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으나 경기도는 "확정된 바 없다"고 부인했다.
10. 유언비어 난무…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온 국민이 비탄에 빠진 가운데 실종자 가족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유언비어와 괴담(怪談)이 기승을 부렸다. 대형 사고 때마다 우리 사회의 허점과 불안을 노리고 움직이는 세력이 이번에도 등장했다. 18일 오전 6시 자신을 '민간 잠수부'라고 소개한 홍가혜(여·26)씨는 종합편성채널 MBN에 나와 "민간 잠수부가 배 안에 남아 있는 생존자와 대화했다" "정부가 민간 잠수부의 작업을 막고 있다"는 등 황당한 주장을 펼쳤다. 수많은 사람이 '생존자가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고 정부의 거짓말과 무능에 흥분했다. 하지만 이는 거짓으로 드러났다.
홍씨뿐 아니다. 인터넷과 SNS에서는 '세월호가 미국 잠수함과 충돌해 침몰했다' '정부가 국정원 사건을 덮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 '정부가 시신을 인양한 뒤 감추고 있다'는 등의 근거 없는 괴담이 나돌았다. 천안함 폭침 당시 좌초설 등 음모론을 제기했던 신상철 서프라이즈 전 대표는 "세월호는 (실종자를) 못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 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