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게 가장 결정적인 시기는 언제였을까? 다음 주 새로 시작하는 '세종실록강독'을 준비하면서 '세종실록' 전체를 일별해보았다.
부왕 태종의 '꼭두각시'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집현전에서 인재들과 비전을 공유하는 모습, 청주 초수리에서 두 달간 머무르며 한글을 백성에게 전파할 방법을 짜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세종에게 가장 보람 있는 때는 아마 1443년(재위 25년)이 아니었을까. 그해에 한글 창제 사실이 천명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즈음 세종은 자신의 국정 운영에 대해 회의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노력으로 먹는 문제가 해결되고, 과학기술의 성과가 나타났으며, 북방 영토가 개척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기근으로 백성은 여전히 괴로워하고, 여진족의 침략은 계속되고 있었다. 세제 개혁도 자리 잡았다고 하지만 남쪽 지역 사람들은 계속해서 반대 상소를 올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꽤 많은 길을 걸어왔지만, 아직도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결정적으로 이 시기의 세종을 힘들게 한 것은 그의 건강 문제였다. "옛 사람들은 친구가 죽거나 눈이 어두우면 통곡한다고 하였다. 내 눈동자를 가리는 막이 있어서, 앞에 서 있는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는 그해 8월의 한탄처럼 당시 그는 거의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그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육체적으로 눈이 먼 것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글자를 읽을 수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통곡하고 싶을 것인가. 만약 지금 이대로 내가 눈을 감는다면, 무지하고 힘없는 백성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세종실록 25년을 전후한 기사에는 왕의 그런 고민들이 배어 있다. 국왕 자신이 꼭 해야 하는 것을 거듭 숙고한 결과, 세종은 재위 초반에 제시했던 비전 '생생지락(生生之樂)의 나라'를 떠올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살맛 나고 올바른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세종은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즉 부왕도 인정했던 학문의 힘을 빌려 글자를 만드는 데 전심전력했다. 백성 누구나 쉽게 배워 쓸 수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는 그런 고통과 노력 끝에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