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봄인가, 박정희 대통령이 진해에서 열린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나서 창원으로 가보자고 해요. 창원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설 현장을 직접 보자는 거예요. 함께 차를 타고 진해에서 창원으로 들어가는데 비가 와서 길이 엉망이었죠. 달구지길 정도의 소로를 가다가 운전사가 ‘더는 못가겠다’고 해요. 그때 뒷좌석의 박 대통령이 ‘어디쯤 지을 거냐’고 묻더군요. 제가 가물가물 보이는 산들을 가리키며 ‘저기 저기까지 다 쓸 겁니다’고 답했죠. 박 대통령이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됐구먼’ 그래요. 배포가 큰 양반이 구상한 규모랑 맞아떨어진 셈이죠. 비오는 날 그렇게 오케이를 받았습니다.”
창원산단의 산파 역할을 한 오원철(86)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아흔이 가까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창원산단의 탄생에 얽힌 과거사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오 국보(國寶)”라며 아낀 오 전 수석은 1971년 신설된 청와대 경제2비서실을 이끌며 우리나라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추진 업무를 전담했다. 창원을 비롯해 울산, 포항, 온산, 구미, 여수 등 6대 국가산업단지의 밑그림을 그린 장본인이다. 지난 3월 19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찻집에서 만난 오 전 수석은 올해로 탄생 40주년을 맞는 창원산단의 밑그림을 그릴 때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규모’였다고 강조했다.
“창원산단은 처음부터 종합기계 메이커를 지향했습니다. 정밀기계부터 초대형 제품까지 모든 걸 한 곳에서 만들자는 계획이었죠. 이때 모델이 일본의 히타치였습니다. 미쓰비시 등도 있지만 히타치가 모든 기계를 다 만드는 종합기계 메이커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박 대통령은 처음부터 모든 걸 히타치보다 크게 만들라고 했습니다. 당시 우리 조사로는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는 히타치 공장에서 일하는 전체 종업원 수가 8만명이었는데 창원산단은 최대 종업원 15만명의 규모로 짓자는 것이었죠.”
오 전 수석에 따르면, 창원산단은 처음부터 3300만㎢(1000만평)가 넘는 대규모로 계획됐다고 한다. 그가 첫 현지 방문을 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설명한 단지 규모는 ‘폭이 5~6㎞에 길이가 12㎞, 넓이가 1500만평(약 5000만㎢)’이었다. 부지 안에 창원역·상남역·성주역 등 철도역 3곳과 3개 면이 포함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당시 차 안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이 부지 안의 인구와 가구 수, 농지 규모도 꼼꼼하게 물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인구 1만명, 1700여가구에 농지가 420만평(1388만㎢)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400만평의 농토가 없어지고 1500만평의 공업기지가 생겨난다고 생각하면 되겠군”이라며 “이주민에 대한 빈틈없는 대책”을 주문했다는 것이 오 전 수석의 회고다.
실제 창원단지는 조성과정에서 현장을 돌아본 한 외국 경제 전문가가 “자유경제 체제하에서 약 2000가구, 1만명의 주민이 큰 불상사를 야기시키지 않고 이처럼 빨리 정부 계획에 순응하며 공업지역 건설을 가능하게 한 사례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할 만큼 빈틈없이 이주민 대책이 마련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원칙은 △땅값을 제대로 줘서 다른 고장에 가도 같은 면적의 농토를 살 수 있도록 하고 △공장 건설에 이주민을 우선 쓰도록 하며 △이주민의 자식들에게 무료로 기술을 가르쳐서 창원산단에 취직시키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종합기계, 방위산업의 메카가 왜 하필 창원에 자리 잡았을까. 오원철씨는 창원이야말로 당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적지였다고 설명했다. “기계공업의 경우 따뜻한 날씨가 중요합니다. 추우면 옥외 작업을 하기가 불편하고, 날씨가 추웠다 더웠다 기온 차가 커도 철강 소재들이 줄었다 늘었다 하면서 정밀도에 문제가 생깁니다. 또 처음부터 방위산업체들이 입주할 것으로 구상했기 때문에 적의 공격에 대비해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또 1973년 1기가 완공된 포항제철에서 철을 싣고 오고 원자로 등 완성된 대형 제품을 수출하려면 수심이 깊은 만도 필요했습니다. 이걸 다 만족시켜 주는 곳이 창원이었죠.”
오 전 수석은 “창원산단 부지는 주변이 600m급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기 때문에 주변 산에 대공포를 설치하면 적의 공중 공격으로부터 지킬 수 있다는 판단도 했다”며 “기계산업에 필요한 용수는 남강의 물을 끌어다 쓰는 것으로 해결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창원산단은 구상 단계부터 난관도 적지 않았다. 구상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안팎으로 있었다. 정부 내에서도 “우리에게 기계공업은 맞지 않는다”며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고, 외부 용역을 맡긴 전문가들도 ‘유례없는 실험’이라며 반신반의했다. 오 전 수석에 따르면, 당시 사전조사 용역을 맡은 일본의 ‘동양엔지니어링’은 보고서에서 “기계공업 발전 과정으로 보거나 또는 세계적인 예를 통해 보더라도 대규모의 ‘종합기계공업 센터’ 같은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썼다.
오 전 수석은 “또 하나의 용역회사인 ‘일본 개발계획연구소’ 소장인 사사오 박사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창원공업기지 같은 것은 전례가 없기 때문에 성공 여부의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한국은 독특한 바이탤리티(vitality)가 있고 또 한국인의 예지가 있으므로 호기심을 가지고 앞날을 기대해 보겠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일단 계획 수립 후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여 40년 전인 1974년 첫 기업 입주가 시작된 창원산단은 우리 안보에도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 오 전 수석의 평가다. “처음부터 창원산단은 대한민국의 안전판으로 설계된 측면이 있습니다. 김정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미국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이 중요한 계기가 됐죠. 당시 미국 고위 관계자가 김 실장에게 ‘베트남은 농업국가이기 때문에 미국이 포기할 수 있고 일본은 공업국가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해요. 이 말을 전해 들은 박 대통령이 ‘우리도 방위산업을 기간으로 한 공업구조를 가지면 미군이 철군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창원 등 산업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한 겁니다.”
오 전 수석은 “창원산단이 모습을 드러낸 후 미국 고위 관계자들이 줄줄이 견학을 왔었다”며 “세계에서 유례없는 대규모 병기창을 보고 미국 측 인사들은 당혹감을 나타냈다”고 했다.
오 전 수석은 이날 인터뷰 자리에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낡은 화보집을 갖고 나왔다. ‘1977년 1월 문교부 발행’이라고 돼 있는 화보집에는 까까머리 젊은 남학생들이 기계를 깎고 다듬는 사진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사실 공장은 껍데기이고 사람이 다 이룬 거예요. 창원산단을 구상하고 중화학 공업정책을 펴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한 게 연 5만명 기능공 양성이었습니다. 이들 기능공이 없으면 공장을 지어봤자 물거품이란 걸 안 겁니다. 그래서 전국에 공업고등학교를 짓고 우수학생들을 선발하기 시작했죠. 이 젊은이들이 창원산단의 오늘을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오 전 수석은 “창원산단은 ‘3정 정신’이 구현된 곳”이라는 말도 했다. “3정 정신은 ‘정성을 들여 (도면대로) 정직하게 작업을 해야 정밀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에요. 이걸 박 대통령이 평소에도 강조했죠. 직접 ‘3정 정신’이라는 휘호를 써서 금오공고에 내려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날 오 전 수석은 거칠게 인쇄된 몇 장의 낡은 사진들도 보여줬다. 출처가 불명확한 사진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행사를 주관하는 장면들이 담겨 있었다. “창원산단 안에 직업훈련원을 만들었는데 이 설립자가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벨기에의 자금 지원으로 설립돼 1977년 1기생을 모집해 이곳도 기능공 양성의 요람으로 컸습니다. 벨기에 황태자가 도움의 주체로 나서 당시 영애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설립을 맡았죠.”
오 전 수석은 창원산단뿐만 아니라 현 창원시의 골격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창원시를 가로지르는 8차선 대로와 창원시의 명물인 둥그런 대형 광장(3만5000㎡)도 그의 작품이다. 오 전 수석은 “창원대로 역시 박 대통령이 얼마나 크게 만들 거냐고 해서 ‘폭 50m’라고 답한 게 지금의 8차선 대로가 됐다”며 “시청 앞 광장은 창원의 ‘창(昌)’이란 한자가 해(日) 두 개로 이뤄져 있어 태양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 전 수석은 2010년 창원시청 개청 30주년을 맞아 창원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