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희대(稀代)의 마키아벨리스트다. 여기서 마키아벨리즘은 권모술수의 차원을 넘어선 국가 통치 철학(Statecraft)을 뜻한다. 책략과 음모는 마키아벨리즘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를 다스리며 민생을 살리는 현실주의 정치사상이야말로 마키아벨리즘의 진면목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N. Machiavelli·1469~1527)를 '악(惡)의 교사'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무지와 편견의 소산이다.

오랫동안 '간신(奸臣)이자 역적(逆賊)'으로 폄하된 정도전도 오해의 늪에 깊이 잠겨있었다. 2003년이 돼서야 정도전 재평가를 위한 '삼봉 학술회의'가 처음 열렸을 정도다. 마키아벨리도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지만, 이론과 실천을 결합한 경세가(經世家)로는 정도전이 단연 마키아벨리에 앞선다. 마키아벨리는 인구 7만~8만명의 도시국가 피렌체 정청(政廳)의 2인자에 불과했고, 정도전은 총인구 600만명에 가까운 조선 건국의 아버지이자 국정 책임자였다.

한마디로 정도전은 성공한 마키아벨리스트이고, 마키아벨리는 실패한 정도전이다. 변방의 장군에 지나지 않았던 이성계(1335~1408)를 추동해 500년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닦은 이가 정도전이다. 참모를 넘어 공동 창업자였던 만큼 자부심도 대단했다. '이성계가 정도전을 이용한 게 아니라 정도전이 이성계를 이용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에 비해 공직 14년 동안 마키아벨리는 관료로 헌신했을 뿐이다. 해직 후 재임용 로비를 위해 로렌초 메디치에게 바친 '군주론'이 철저히 무시된 데 비해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헌법 역할을 했다.

물론 정도전과 마키아벨리는 중세에 태어나 근대의 새벽을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새 정치'로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려 한 역사의식도 비슷하다. 정도전은 유교 이상 국가를 기획했고,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을 지향했다. 최고의 정치사상가였던 둘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정도전은 국가를 세웠지만 마키아벨리의 비전은 좌절됐다는 점이다. 정도전은 국가 이념을 정립하고 한양을 건설했으며 토지개혁과 사병(私兵) 혁파로 새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탁월한 철학자가 국정 운영에도 성공한 극히 드문 사례였다.

마키아벨리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상 국가를 설파한 플라톤도 시라쿠사의 정치 멘토로 초빙받지만 처절히 실패하며, 중국 통일 왕조의 뼈대를 제시한 한비자는 감옥에서 비명횡사했다. 진흙탕 현실 속에 이상을 구현하는 정치는 이처럼 지난(至難)한 과업이다. 민본(民本)사상과 부국강병책을 결합한 정도전의 성취가 새삼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정도전은 명·원(明·元) 교체기 대륙 정세를 정확히 읽고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 명태조(明太祖) 주원장이 정도전을 '조선의 우환(憂患)'이라며 압박했지만 꿋꿋이 버텼다. 정도전의 행보는 미·중 패권 경쟁의 회오리 속에 담대하게 한반도 통일을 준비해야 하는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 크다.

적확한 정세 파악과 국력 강화, 지도자의 강철 같은 의지와 국민 통합이 요체다. 정도전의 외교 국방 중시는 오늘의 화두인 통일 문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내치(內治)에서도 정도전의 통찰이 빛난다. 세습 군주의 독주(獨走)를 경계한 정도전은 군신공치(君臣共治)를 주장했다. 지금으로 치면 제왕적 대통령제 대신 책임총리·책임장관제를 주창한 것이다. '함께 가야 멀리 간다'는 삶의 이치는 오늘의 국정 운영에도 들어맞는 교훈이다.

마키아벨리같이 비전을 갖춘 경세가는 권력이 없고, 대다수 현실 정치인은 고려 말 권신(權臣) 이인임처럼 사리사욕에 빠져있다. 오로지 정도전만이 난마(亂麻)처럼 얽힌 현실을 비전과 권력을 합친 힘으로 돌파했다. 정도전의 토지개혁과 세제 개혁은 21세기 한국의 경제 민주화와 복지 강화에 비견할 만하다. '박정희의 딸'로서가 아니라 2012년의 시대정신을 선점(先占)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원대한 비전을 차츰 잃어가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비록 이방원에게 불의의 기습을 받아 살해당했지만 정도전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비전과 권력을 일체화해 새로운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권력과 비전이 균형을 이루는 지도자만이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 통일 한반도를 준비하는 박근혜 정치의 관건은 '100% 대한민국'을 먼저 실천하는 데 있다. '성공한 마키아벨리스트 정도전'을 통해 박 대통령이 지난 1년을 통렬히 돌아봐야 할 때다. 우리가 역사를 외면하면 역사도 우리를 외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