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보조 보컬과 무명 가수. 열두 살 차이 두 사람은 지난 1월 처음 만나 어색하게 인사 나누고 곧바로 녹음실에 들어가 디지털 싱글용 단 한 곡을 불렀다. 본격적 앨범 출반이라기보다 시험용이었다. 그런데 지난달 초 나온 이 시제품(試製品)이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음원차트에 올라 정상을 찍더니 소녀시대·투애니원 같은 대형 아이돌들의 융단폭격에도 끄떡없다.
흘러간 옛 노래들이 초강세인 노래방 차트도 오랫동안 정상에 있던 임창정의 '소주 한 잔'을 끌어내리고 1위. 드물게 '많이 듣는 동시에 많이 부르는 노래'가 된 이 곡, 소유(22)·정기고(34)의 '썸(some)'이다. 서울 광화문에서 최근 만난 둘은 아직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가요 프로 1위까지 하고…. 예상 못했는데, 지금도 마음 다잡아요. 욕심부리지 말자고. 욕심 많으면 화(禍) 된다고…. 하하."(소유)
"얘야 무덤덤하겠죠. 저한텐 특별해요. 대중들의 눈에 띈 게 처음이니까."(정기고)
롱런하는 이 노래에 대해 "영리한 맞춤형 음악 상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발라드·R&B·소울 등 대중의 귀에 익숙한 요소를 적절히 배합하고 버무려낸 무난한 음악에, 최신 유행어 '썸탄다(친구와 연인 사이의 어색하면서도 설레는 감정을 칭하는 은어)'에서 제목을 따와 요즘 연애 스타일을 노래한 대중성이 들어맞았다는 분석. "요즘 따라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너/네 거인 듯 네 거 아닌 네 거 같은 나"처럼 재치 있는 운율의 후렴구는 중독성이 강하다.
'썸'은 두 사람에게 변화의 계기가 됐다. 2002년 데뷔한 정기고는 서울 홍대 앞에서 언더그라운드 래퍼들과 작업해왔고 음악 페스티벌에서도 꾸준히 공연해왔다. 이 '실력파 인디 보컬리스트'가 작년 말 아이돌 기획사에 들어갔다. 싱어송라이터였던 그가 이례적으로 공동 작사가로만 이름 올리더니 방송 출연을 앞두고 14㎏을 감량했다. 일부 인디 팬들이 '변절자'라며 핏대를 세울 법하다.
"자기 스타일대로 밀고 나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자기 스타일 지키며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 후자예요. 제가 부르면 어쨌든 제 노래잖아요. 다른 분들이 쓴 멜로디를 부르면서 못 본 부분을 발견하는 점도 있고요."
인기 걸그룹 씨스타 멤버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소유지만, 관심은 주로 메인 보컬 효린에게 쏟아졌던 게 사실. '썸'으로 '소유를 다시 봤다'는 얘기들이 나오는 이유다. "제 위치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기보단 '나는 어떻게 뭘 해야 할까' 고민 많이 했어요. 이젠 걸그룹일 때와는 다른 음악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커졌어요."
'썸'은 단발성 기획 상품이지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음악을 해온 두 사람의 시너지를 보여줬다. 데면데면했던 둘은 하루를 48시간으로 쪼개다시피 해 빼곡한 스케줄을 소화하며 오누이처럼 친밀해졌다. 다음 계획을 물으니 돌아온 이구동성. "제대로 된 음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