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 정말 바보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조금 심하게 말해서 '병신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이런 좌절감이 찾아올 때 마음속에 이는 불길을 끄기는 쉽지 않다. 작가가 자신을 바보 같고 엉망이라고 느끼는 건 물론 대부분이 원고 때문이다.

독감에 걸렸던 지난주 나는 거의 기다시피 병원에 갔다. 의사들이 하는 말은 늘 똑같다. "일단 쉬세요! 물 많이 마시세요! 푹 자는 게 최고입니다!" 아니, 누가 그걸 모르나. 그런 하나 마나 한 소린 나라도 하겠다. 하지만 '마감'이라는 한계 상황에 처해 있으니 절대 쉬면 안 된다. 그래서 10만원이나 하는 '칵테일 주사'인지 면역력을 높여주는 주사인지 뭔지를 맞고 몽롱한 상태에서 끙끙대며 글을 썼다.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샌디에이고 시내의 초저녁 풍경. 미 동부보다 날씨가 온화하고 겨울에도 햇볕이 따뜻하다. 에세이집 ‘병신 같지만 멋지게’의 저자인 저스틴 핼펀은 여자 친구에게 차인 반(半)백수 신세로 10년 만에 샌디에이고에 있는 아버지 집에 들어온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험악하지만 애정 섞인 ‘막말’을 듣는다.

미국 작가 저스틴 핼펀의 에세이집 '병신 같지만 멋지게'를 읽은 건 마감이 코앞에 닥친 저녁이었다. 큰 시험을 앞두고 마감 뉴스마저 재미있게 느껴지는 수험생의 기분…. 그때 내가 딱 그 짝이었다. 집도 절도 없는 반(半)백수에 막 여자 친구에게 차인 스물여덟 청춘. 갈 곳이 사라진 저자는 집을 떠난 지 10년 만에 아버지 집에 들어왔다. 샌디에이고 집으로 돌아온 이유를 아버지에게 어떻게 설명하나 전전긍긍하고 있던 참에 아버지가 말한다.

"됐다. 그 지랄을 모조리 되짚고 앉아있을 필요는 없다. 여기 머물러도 되는 거 너도 알잖니. 내가 바라는 건 별거 없다. 네 방이 뭔가 한바탕 하고 난 방처럼 보이지 않게 네 것만 좀 치우고 살아라."(원문의 글은 표현이 훨씬 적나라한데 모든 연령대가 읽는 신문의 특성상 순화해 싣는다.) 아버지는 그러고는 덧붙인다. "아, 여자 친구랑 헤어진 건 안됐구나!"

푼돈이나 벌어볼까 하고 거실에 노트북 한 대 놓고 작업 중이던 저자는, 아버지 입에서 나온 '○까'라는 말에 영감을 받아 트위터 계정을 만든다. 그리고 그날부터 아버지의 말을 기록했다. 'Shit My Dad Says(내 아버지의 막말)'라는 이름의 이 트위터는 4개월 만에 100만 팔로어를 돌파하고, 미국에서 책은 물론이고 시트콤으로까지 만들어지는 일대 사건을 일으켰다. 남들 눈치 안 보고,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아버지 이야기를 덜컥 써놓고선 마음이 불안해진 그는 형 '댄'에게 이 일에 대해 고백한다.

형의 답은 이렇다. "가출할 준비나 하는 게 좋을걸. 내가 너였으면 벌써 짐부터 쌌겠다. 난민 스타일로 제일 중요한 물건들만 골라서 한 팔로 들 수 있을 만큼만 챙겨!"

정말 끔찍하게 도움 되는 형이 아닌가! 그 형을 낳은 아버지의 말은 강도가 더 세다. 그는 이런 말을 아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내가 만들어준 햄버거에 지금 너 케첩 뿌리는 거냐? 그건 고급 수제 햄버거란 말이다! 네가 만드는 말똥 나부랭이가 아니라고. 내가 시간을 얼마나 들였는데. 다음엔 똥이나 지어 먹일 테다."

어디 그뿐인가. 방학 과제인 과학 실험을 게으름 피우다 놓치게 되자 얼토당토않게 과제를 지어내 제출한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자세는 학원 다니라고 부모가 대신 방학 숙제까지 해주는 우리나라 실정과 과격하게 대비된다.

"아버지는 실험 일지를 걷어차고도 성에 안 차는지 개 장난감 하나를 집어 들어 투포환 금메달 후보처럼 앞마당에 멀리 던져버렸다. 브라우니(집에서 키우는 개)가 의기양양하게 장난감을 물고 오자 결국 아버지는 폭발했다. 넌 과학계를 싸잡아 모욕했어. 빌어먹을 아인슈타인까지!"

그 결과 저자는 반성문을 쓴다. "나의 급우들과 과학계 전체에 대해 나는 비리를 저질렀습니다. 나는 결과를 조작했고, 그럼으로써 인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과정에 불명예를 안기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날 "너무 심하게 혼내서 미안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널 구라치는 거짓말쟁이로 보는 건 싫다. 넌 거짓말쟁이가 아니잖아? 넌 훌륭한 사람이니까. 이제 방으로 돌아가거라!" 하는 말과 함께 이렇게 소리 지른다. "외출 금지야!"

사실 무식하고 폭력적으로 보이는 저자의 아버지는 뇌과학을 공부하고 암 연구를 했던 저명한 과학자다. 그런 그가 소위 '먹물' 근성을 버리고 삶에 대해 "세 살이라고 개새끼처럼 굴어도 괜찮은 건 아니잖니"라거나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거야. 벽에 똥칠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지!" "괜찮아, 인생은 원래 글러 먹었어" "할 줄도 모르는 놈이랑 자고 싶어 하는 여자는 세상에 없어" 같은 말을 해주는 건 배설의 쾌감 이상을 불러일으킨다.

여덟 살짜리 아들이 쌓아놓은 '레고 블록'을 보며 무조건 '브라보'를 외치는 것보단 "봐라. 네 창의력을 뭉개버리자는 건 아니지만 네가 만들어놓은 건 그냥 똥 무더기로밖에 안 보여!"라고 솔직히 말해주는 아버지가 어쩌면 영혼 없는 칭찬을 늘어놓는 쪽보단 더 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란 다른 부모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코 찔찔이 허접스러운 바보라도 내가 낳은 이상 너를 미치게 사랑한다는 것, 육아 방식에 '정답'은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 아들에게 '긴급 상황에선 기꺼이 기대도 좋다'는 사인을 보내는 것 말이다.

이 에세이집의 배경인 샌디에이고가 은퇴한 미국인들이 꽤 살고 싶어 하는 도시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미 서부 캘리포니아주(州)이니 동부보다 날씨도 온화하고, 겨울에도 햇볕은 따뜻하단다. 언젠가 샌디에이고에 다녀온 친구에게 물었다. "샌디에이고는 어때?" 친구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피시 타코(fish taco·생선을 갈아 전병 속에 채워 넣은 음식)를 그곳에서 먹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문득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피시 타코가 스스로 바보처럼 느껴질 때 먹기 적절한 희귀하고 멋진 음식처럼 느껴졌다.

●병신 같지만 멋지게―맥심닷컴 편집자인 저스틴 핼펀의 에세이집. 클래지콰이의 가수 호란이 번역했다. 원제는 '내 아버지의 막말'이라는 뜻의 'Shit My Dad S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