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클럽에서 키보드를 치는 '경천'은 어느날 갑자기 알 수 없는 마법에 의해 얼룩소로 변해버린다. 경천은 동물로 변한 인간을 제거하는 '소각자'(인간이 아니라 거대한 소각용기)에게 쫓기는 상황에 처하지만 두루마리 화장지 마법사 '멀린'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탈출한다.

한편, 수명이 다해 지구로 추락하던 인공위성 '우리별 일호'는 우연한 기회에 멀린의 마법으로 소녀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고, 경천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경천을 팔아넘기려는 '오 사장', 마법에 걸린 사람들을 태워버리려는 '소각자'에 대항해 '경천'과 '멀린', '우리별 일호'는 힘을 합친다.

벌써 눈치 챘을지 모른다. 판타지 애니메이션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영화다. 동물로 변한 인간, 두루마리 휴지 마법사, 동물을 태우는 소각기, 인간으로 변한 인공위성…. 어떤 영화나 만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캐릭터다. 여기에 몇 가지 세부사항이 더해진다. 동물로 변한 인간이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인간 모양 옷을 입는다는 설정, 마법사가 휴지인 자신의 몸을 희생해 주인공을 돕는 장면, 인간의 모습을 갖춘 인공위성이 로봇처럼 날아다니고 신체 특정 부위를 이용해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식 같은 것들이다.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의 이런 아이디어들은 분명 '판타지'라는 장르에 걸맞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전에 본 적 없는 것들을 창조해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공적이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 부분은 딱 여기까지다. 한 편의 영화는 아이디어의 합으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애니메이션에는 아이디어만 있고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 치명적인 결함이다. 이때 이 영화가 늘어놓은 상상력은 부머랭이 돼 돌아온다. 상상력이 공상이 되지 않으려면 왜 그것이 필요했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나 이야기의 핵심이 특별한 캐릭터로 짜여져 있는 경우 그 영화의 이야기는 결국 관객에게 제시한 특이한 인물들이 왜 생겨났는지를 설명하는 것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 관객의 머릿속에 넣어준 상상을 유의미한 정보로 회수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경천'이 왜 동물로 변했는지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다.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을 동물로 변하게 한다"는 대사가 나오기는 하나 이것으로 관객이 뭔가를 유추해낼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멀린은 왜 휴지로 변해야 했는지 그리고 그가 갑자기 원래의 모습으로 어떻게 돌아오게 됐는지도 알 수 없다. '경천'과 '일호'의 로맨스는 왜 생겨나는지, '소각자'는 어떤 존재인지, '오 사장'은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무엇을 본 것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가 목표하는 지점은 분명 지브리 스튜디오의 그것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좋은 상상력으로 현실의 어떤 문제점을 세련되게 비판하는 방식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내놓은 '붉은 돼지'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같은 영화를 보고 우리가 감동을 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그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최대한 성실하게 회수해 관객에게 명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가 하지 못한 바로 그 지점이다.

한국의 열악한 장편 애니메이션 시장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디즈니의 '겨울왕국'이 1000만 관객을 향해 가는 상황은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겨울왕국'을 본 관객이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를 보고 만족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