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개봉된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2003년작 '몽상가들(The Dreamers)'이 남긴 가장 강렬한 기억은 영화 속 남녀들의 누드 신과 섹스 신일 것입니다. 1968년, 혁명의 열기가 가득하던 프랑스 파리의 한 집에서 젊은 세 남녀가 함께 토론하고 먹고 자고 벗고 뒹굴며 놉니다. 거침없는 몸짓들을 따라가는 영화는, 단언컨대 지금까지 국내에서 합법 상영된 극장 영화 중 가장 높은 수위로 남녀의 몸, 특히 성기를 노출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우리나라의 심의 시스템은 성인용 영화라 하더라도 성기는 물론 음모 한 오라기도 나오지 못하도록 가위질해 왔습니다. 루이 말 감독 1992년작 '데미지(Damage)'의 개봉 때 우리 관객들은 제레미 아이언스가 전라로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종반부의 처절한 장면에서 달리는 남자의 성기를 가리려고 모자이크 자국이 우스꽝스럽게 따라가는 화면을 봐야만 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1993년작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에서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 남성들의 성기 노출 장면이 무삭제 상영돼 뉴스가 됐지만, 에로티시즘과 관계없는 홀로코스트의 참상 묘사라는 점에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후 우리 영화 심의는 노골적인 누드 신이라도 예술적 완성도를 위해 필요하다고 보이는 경우에는 관대해지는 쪽으로 변화해 왔습니다. 카트린 브레이야 감독의 2000년작 '팻 걸(Fat girl)' 국내 개봉때는 베드 신 중 남성 성기가 노출된 대목이 무삭제로 심의를 통과해 상영됐습니다. 영화 심의가 전향적으로 바뀌었음을 실감하게 해 준 작은 사건이었습니다.

'몽상가들'에서 프랑스 쌍둥이 남매 테오, 이사벨과 미국 청년 매튜.(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셋은 부모가 여행 간 사이 집을 해방구 삼아 꿈꾸던 모든 것을 함께 한다.

'몽상가들'에서 거의 도발적-충격적으로 반복되는 누드 신들을 보면서 두 가지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첫째는 노출의 수위에 놀랐습니다. 박찬욱 감독 '박쥐'(2009년)에서 송강호의 성기 노출처럼 멀리 있는 전신의 자그마한 일부로 잠깐 비추는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몇몇 장면의 남녀 성기 노출은 그 수위로 보면 합법 영화와 포르노그래피의 경계선에 있는듯 아슬아슬합니다.

쌍둥이 남매인 테오와 이사벨은 파리의 시네마테크를 자주 찾아가 영화에 빠지며 지내다가 이 곳에 온 미국 청년 매튜와 알게 됩니다. 때마침 테오의 부모가 한 달간 여행을 가게 되자 빈 집에서 세 남녀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합니다. 닫힌 공간에서 그들은 서로의 모든 벽을 허뭅니다. 일종의 해방구가 됩니다. 셋이 홀랑 벗고 한 욕조에서 목욕도 합니다.

매튜는 이사벨에게 이끌리지만 놀랍게도 이사벨이 쌍둥이 오빠인 테오와 벗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을 봅니다. 어느 날 테오는 게임에 패한 매튜에게 벌칙으로 '이사벨과 지금 내 앞에서 섹스하라'고 주문합니다. 전라의 매튜가 역시 옷 벗고 누워 있는 이사벨의 하반신 중요 부위에 뺨을 비비는 듯한 장면도 있습니다. 이런 파격적 몸짓들을 담아내는 화면들은 젊은 몸의 향연 같습니다. 이 작품 속 섹스 신은 실제 성행위를 촬영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고 합니다.

'몽상가들'에서 파리 시네마테크 원장 해임 항의 시위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매튜와 이사벨, 테오.(왼쪽부터).
'몽상가들'에서 한 욕조에 함께 들어가 있는 매튜, 이사벨,테오. 외설스러운 행위라기보다는 제도, 관습에 맞서는 저항의 몸짓으로 읽힌다.

하지만 이토록 노골적인 '몽상가들'의 누드 신들을 보면서 느끼는 또 한가지 놀라움이 있습니다. 남녀들이 그렇게 몸을 드러내고 서로 접촉하고 성행위를 하는데도 '야하다'는 느낌이나 성적인 자극을 별로 주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속 누드 신들이 에로티시즘과 전혀 다른 문맥 속에서 진행되는 몸짓이기 때문입니다. 세 남녀는 성적 쾌락에 탐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기성 세대들이 강요하는 모든 관습과 제도에 대한 반항을 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셋은 "떼거리로 데모나 하면 새 세상이 올줄 아느냐"는 기성 세대에게 함께 저항합니다. 파리 시네마테크 원장의 해임에 항의하면서 "영화를 죽이지 말라"고 격렬하게 외칩니다. 영화와 세상을 함께 논의합니다. 옷을 벗어제끼고 뒹구는 그들 모습은 성적 행위라기보다는 세상의 모든 꺼풀 다 벗어버리고 맨살로 서로 만나면 어떨까 하는 순수한 열망의 실천처럼 보입니다. 벗은 그들 모습은 음탕한 누드가 아니라 에덴 동산 아담-이브의 원초적 누드에 가깝습니다.

셋이 거실에 쳐 놓은 작은 텐트의 비좁은 공간에 들어가 한없이 편안해지는 장면은 그들이 사실상 어린애 같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영화 제목 그대로 세 남녀는 유토피아를 몽상이라도 하고 있는 듯합니다. 갑갑한 기존 체제를 뒤엎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드는 것을 함께 꿈꾸면서 그들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관계를 온 몸으로 실천해 보는 듯합니다. 남녀의 모습은 꿈꾸는 모든 것을 이뤄보려던 한 시대의 열정을 보여주려는 풍경 같습니다.

'몽상가들'은 고전 영화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한 여성과 두 남자라는 영화의 큰 뼈대부터가 프랑스 누벨바그의 기수로 꼽히는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 작품 '쥘 앤 짐'의 설정과 흡사합니다. 클래식 영화들의 명장면과 음악들을 대거 끌어들였습니다. 베르톨루치 감독은 세 주인공을 영화광으로 설정하여 고전영화를 돌아보게 하는 장면들과 에피소드를 집어넣었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에서 하워드 혹스 감독의 '스카페이스'까지, 주옥같은 영화들에 관해 추억하게 하는 대목들이 이어집니다. 영화속 테오, 이사벨, 매튜가 '쥘 앤 짐'에서 세 인물이 루브르 박물관 실내를 질주하는 장면을 흉내내 박물관을 똑같이 질주하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21세기에 만들어진 '몽상가들'이 40여년전의 파리를 끌어들인 까닭을 생각해 봅니다.감독은 아마도 혁명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그 시절만큼 젊은 영혼들이 거침없이 꿈꾸고 살았던 적이 있던가 하고 묻는 것 같습니다. 혁명과 우정, 사랑과 섹스가 한몸으로 부둥켜 안고 돌아가는 듯한 이 영화에서 누드 신들은 청춘의 매끄러운 피부처럼 그냥 빛날 뿐입니다. 외설이냐 아니냐는 구분법 자체를 넘어서는 아름다운 백일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