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은 날이야말로 커피 마시기 좋은 날씨예요. 기압이 낮기 때문에 커피 향도 더 많이 우러나거든요. 그래서 시애틀 커피가 유명해요. 그곳은 항상 비가 내리잖아요."
전광수와 만나기로 한 날, 오전부터 비가 내렸다. 전광수커피 본점이 위치한 명동에서 그를 만났다. 신맛이 강한 커피를 주문하는 기자에게 '좀 더 무겁고 진한 향의 커피를 마셔보라'며 다른 커피를 권한다. 그렇게 우리 앞에 준비된 커피가 '오즈의 마법사'. 전광수커피 본점에서만 맛볼 수 있는 블렌딩(서로 다른 커피 2가지 이상을 배합한 것) 커피 중 하나다.
커피를 시작한 지 어느덧 20년. 커피 하면 전광수를 떠올릴 만큼 그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가장 잘 볶는 사람 중 하나다. 그와 함께 깨알 같은 커피 이야기를 나눴다.
평범한 회사원, 무작정 미국으로 떠나다
몇 년 전 그는 로스팅(생두를 볶아 특유의 맛과 향을 만들어내는 공정)에 대한 자신만의 노하우를 책으로 펴낸 적이 있다. 그리고 최근 두 번째 책이 나왔다. 커피의 연한 갈색을 띤 이 책은 그의 20년 노하우가 집약된 비법 노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는 사실 오픈하는 스타일이에요. 저만의 노하우라고 감추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첫 번째 책을 낼 때 다 오픈하려 했는데 제자들이 하도 반대하는 바람에 자제를 했어요.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까발려야겠다, 맘먹고 모두 까발린 겁니다.(웃음)"
국내에서는 커피 하면 전광수를 떠올리지만 정작 그는 '장인'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저더러 장인이라고 하는데, 사실 창피한 말이에요. 저는 장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지 장인은 아니거든요. 우리나라는 커피 역사가 짧아요. 커피 볶은 지 30년도 안 됐는데 어떻게 장인이 될 수 있겠어요. 적어도 한 세기는 지나야죠. 어쩌면 우리 다음다음 세대쯤엔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우리 세대는 장인이 나올 수 있게 준비해주는 과정이에요."
그런 그가 커피의 맛을 처음 알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자판기 커피 덕분이다. 제약 회사 영업 사원 시절, 그는 하루에 5~6잔씩 자판기 커피를 들이켜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 시절 우리나라에 핸드드립 커피가 있겠어요, 뭐가 있겠어요. 자판기 커피를 즐겨 마셨죠. 그러다보니 원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어요. 근데 국내에 커피와 관련된 번역서는 거의 없었어요. 배울 수 있는 루트가 마땅치 않았죠."
국내에서는 커피를 배울 기회가 없다시피한 상태. 평범한 직장생활을 이어갈 것인가, 커피를 공부하러 떠날 것인가 한동안 고민하다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버클리대에 다니는 후배를 통해 미국의 커피 공장 하나를 소개받았어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작은 공장인데, 엘살바도르 출신의 사장님이 운영하고 계셨죠. 그분을 스승 삼아 커피를 배웠어요."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그는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커피를 공부했다.
"영어가 짧으니까 대화는 거의 불가능했어요. 그때그때 궁금한 걸 적어놓은 다음 후배가 들를 때마다 대신 물어봐달라고 부탁했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열심히 영어를 공부해야지' 다짐했는데, 막상 한국에 돌아오면 바쁘다는 핑계로 잘 안 되더군요. 말이 안 통하는 게 얼마나 답답했던지 한번은 선생님이 직접 한글을 배우겠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부양할 가족이 있었으므로 미국에 계속 눌러앉아 공부할 여유는 되지 않았다. 그는 틈나는 대로 미국을 오가며 짬짬이 공부를 이어나갔다.
"오히려 아내는 저를 믿고 밀어줬어요. 물론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죠. (커피를 공부한) 20년 중에 15년 정도 고생했어요. 이제야 조금 먹고살 만해진 거죠. 하지만 단 한 번도 '내가 왜 커피를 선택했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특히 콩 볶을(로스팅) 때 느끼는 행복감은 말로 표현 못해요. 저와 딱 맞는 것 같아요."
콩 볶는 일은 미술이고 음악이다
커피에는 다양한 공정이 있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분야는 '로스팅'. 로스팅은 선천적인 감각이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로스팅은 감각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콩을 볶으면 색깔에 변화가 생겨요. 큰 틀에서 녹색, 노란색, 갈색, 검은색 이 네 가지로 나뉘죠. 이런 색감의 변화가 미술과 관련이 없지 않아요."
게다가 색감 외에 청각적인 변화도 있다. 커피 콩 볶는 소리는 그를 즐겁게 한다.
"콩 볶을 때 나는 소리가 있어요. '다닥다닥' 하고 콩 조직이 벌어지는 소리예요. 콩을 칼로 잘라 현미경으로 관찰해보면 벌집처럼 이루어져 있어요. 그게 열을 받으면서 커지는 소리죠."
그런데 이 소리도 원두마다 차이가 있단다.
"공교롭게도 커피 종류나 성질에 따라 볶을 때 나는 소리가 달라요. 타악기 소리와 비슷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커피 볶는 일을 감각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콩 볶는 데 별거 있냐고 반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광수에게는 그 일이 미술이고 음악이다.
"저처럼 의미를 두고 볶을 수도 있고, 원하는 색만 뽑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어느 것이 맞다는 정답은 없어요. 눈을 뜨고 볶든 감고 볶든 결과물이 말해주니까요. 하지만 콩이 변화하는 과정을 민감하고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자기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제 생각은 그래요."
로스팅 외에 그가 맡은 업무 중 하나는 핸드피크(hand-pick). 결점두를 골라내는 작업이다. 처음부터 값비싼 고품질 생두를 구입할 형편이 아니라면 결점두를 골라내는 안목을 키우는 게 좋다.
"콩도 농작물이기 때문에 결점두가 없을 수 없어요. 결점두가 섞이면 커피 맛이 나빠지기 때문에 결점두를 골라내는 작업이 중요해요."
이렇게 커피를 고르고 볶으며 몸소 배운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지인과 함께 커피 공장을 운영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공장을 나오면서 다시는 제조업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돈이 모일라치면 설비에 재투자해야 하고, 그러다보니 통장에 돈이 모이질 않았죠."
잠시 주저하던 그는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친구들과 어찌어찌 다시 공장을 운영하게 됐는데 사기를 당했어요. 물건을 해가겠다는 사람이 생겨서 계약금도 안 받고 추진했는데 알고 보니 사기꾼이었던 거예요. 그때 구입한 기계들은 결국 못쓰게 돼버렸지요. 아주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그 일까지 겪고 나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때 포기했더라면 지금의 전광수는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조그맣게 공방을 차려 다시 한 번 재기를 꿈꿨다.
"공방을 운영하다 몇 년 후에 커피 하우스(전광수커피)를 오픈했어요. 가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거든요. 정상 궤도에 오르면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어요. 근데 오픈하자마자 대박을 친 거예요. 깜짝 놀랐죠."
공방 운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싶어 문을 연 전광수커피는 기대 이상의 반응을 얻었다. 그가 손수 내린 핸드드립 커피는 주변 회사원들의 입소문을 타고 전국에 퍼져나갔다. 지금도 전광수커피 본점에는 단골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마니아층도 있고 가끔 지방에서도 올라오세요. 요즘은 주변에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많이 생겨서 전 같지는 않지만요.(웃음) 그래도 오시는 분들의 연령대가 다양해요. 나이 드신 분도 있고 젊은 커플도 있고요."
커피 농장, 커피 학교… 전광수의 꿈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요즘, 전광수커피의 노선은 조금 다르다. 로스팅한 지 길어야 10일밖에 안 된 신선한 원두를 사용하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블렌딩 커피를 판매하기 때문이다. 이를 관리하기 위해 본점이 오픈한 지 6년이 지났지만 전국에 전광수커피는 16곳뿐이다.
"누구는 커피가 생선 같다고 해요. 처음엔 신선한데 급속도로 산화된다고요. 포장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한번 개봉하면 끝이거든요. 저희는 실온에 보관한 커피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기간을 10일까지로 봅니다."
젊은 바리스타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농담을 나누며 대화하는 사장의 모습 역시 흔히 말하는 '갑을 관계'와는 거리가 멀다.
"일요일에는 각 지점을 돌며 직원들과 얘기하고 커피 마시는 시간을 가져요. 직원들이 가게에 애착을 가져주면 좋죠. 전광수커피는 뭔가 다르다고 느끼면 저도 고마운 일이니까요."
이어 그는 2003년 처음 방문한 외국의 커피 농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건이 안 돼서 (커피 공부한 지) 10년 만에 처음 가봤어요. 그때 기분요? 완전 감동이었죠. 생두가 들어 있는 체리를 직접 따서 먹어보고 향도 맡아볼 수 있다는 게 말이에요. 먹어보면 정말 달아요. 잘 익은 수박 정도의 당도가 있어요. 안 익은 건 아주 떫고요. 책에는 (체리에서) 재스민 향이 난다고 쓰여 있지만, 실제로 맡아보면 아카시아 향도 희미하게 느껴져요. 이런 내용은 책을 보면서는 알 수 없는 거잖아요. 그때 사람들 모르게 체리를 따서 안주머니에 넣었던 기억이 나요. 한국에 돌아가면 학생들에게 보여주려고요. 근데 그걸 농장 사람이 본 거예요. 막 웃으면서 '저기 다 준비해놨으니 그만 따고 저거 가져가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커피 아카데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언젠가 커피 농장을 사는 게 꿈이다.
"아카데미 친구들에게 농장을 체험시켜주고 싶어요. 제가 직영으로 운영하는 농장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제자들 중 체험을 원하는 학생들을 마음껏 보내줄 수 있잖아요. 더 나아가 커피 학교를 만드는 것도 꿈이에요. 아직은 목표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이지만 말입니다."
문득 커피와 반평생을 살아온 그가 가장 즐겨 마시는 커피는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커피가 나는 지역을 세 군데로 나누면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예요. 그중에서 개인적으로는 아프리카 커피에 매력을 느껴요. 아프리카 커피는 맛이 제각각 다르거든요. 탄자니아, 에티오피아, 예멘, 르완다, 짐바브웨 등 나라마다 개성이 강해요. 아마 내년쯤이면 아프리카에도 가볼 수 있을 것 같아요."
※ 핸드드립의 tip ※
1. 갈지 않은 원두를 소량으로 구매하라
"맛있는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려면 무엇보다 신선한 커피가 우선입니다. 커피를 살 때는 갈지 않은 홀빈(whole bean) 상태로 구매하세요. 분쇄된 커피는 급속도로 신선도가 떨어지니까요. 어떤 분은 1kg씩 사가서 한 달 내내 드시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일주일치씩만 소량으로 구매하세요."
2. 분쇄기를 구비하라
"핸드드립을 즐길 정도라면 분쇄기 하나 정도는 있어야겠죠? 원두를 마실 때마다 조금씩 갈아서 드세요. 커피 향을 더 잘 느낄 수 있습니다."
3. 물의 온도를 조절하라
"(원두) 콩에는 볶음도가 있어요. 진하게 볶은 커피, 연하게 볶은 커피가 있죠. 진하게 볶은 커피는 물의 온도를 85도 정도, 약하게 볶은 커피는 90도 이상으로 맞추는 게 좋아요. 그래서 온도계가 필요합니다. 볶음도가 많은, 즉 진한 커피를 고온에 내리면 불필요한 성분이 많이 나와 쓴맛도 강해집니다. 95도에 내린 것과 85도에 내린 커피는 맛이 달라요. 볶음도가 진할수록 물의 온도를 낮춰주세요."
4. 입자 굵기를 조절하라
"커피를 갈 때는 입자 굵기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입자가 굵으면 물이 바로 흘러나올 확률이 많죠. 즉 커피가 연하게 뽑힙니다. 반대로 입자가 고우면 물이 그 사이를 거치는 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리면서 커피가 진하게 뽑힙니다. 입자 굵기는 기호대로 조절해서 마시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