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다니는 김모(33)씨는 재작년 아들(2)을 낳고 6개월 육아 휴직계를 냈다. 부장이 "(출산휴가) 3개월이면 충분하지 않아?"하며 드러내놓고 싫은 기색을 했다. 눈치 보면서 휴직을 한 뒤에도 회사로 돌아갈 일이 걱정이었다. 집 근처 어린이집 3곳 모두 대기 번호가 400번대였다. 막판에 운 좋게 집과 멀리 떨어진 어린이집 한 군데에 자리가 나 아이를 보냈다. 회사에 복귀한 뒤 지금까지 김씨는 승진에서 두 차례나 누락됐다. "열이 펄펄 끓는 애를 어린이집에 보낼 땐 회사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많이 해요. 제발 육아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는 그런 직장에 다니고 싶어요. 애 때문에 마음 졸이면서 무슨 일이 되겠어요?"

여성은 이제 우리나라 인구의 딱 절반(2013 통계청 조사)이 됐다. 대학 진학률은 남성을 앞질렀다. 인재 시장의 절반은 여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김씨 회사는 직원들에게 일 시키고 월급만 줄 뿐 그들의 경력 관리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김씨와 같은 여성 인력들이 수없이 회사를 떠났다.

본지와 여성가족부가 국내 상장 기업 1745곳의 여성 근무 환경과 여성 인력 활용 현황을 전수(全數) 조사한 결과 조사에 응한 1228개 기업에서 여성 인재를 관리하는 실태는 심각할 정도로 초라했다. 기업들이 말로만 '인재 전쟁'을 외칠 뿐 정작 절반의 인재를 내모는 꼴이다. 정부 차원에서 상장 기업을 전수 조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입 10명 중 3명이 여성

작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 기업들이 뽑은 신입사원 10명 중 3명(28%)이 여성이었다. 신입 정규직 사원의 월급은 남성 236만7000원, 여성 209만6000원으로 남성 월급이 여성보다 13%(27만1000원) 많았다. 남성 평균 월급이 여성보다 높은 것은 군 복무 경력을 호봉으로 인정해주는 기업이 상당수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기업 10곳 중 4곳은 '육아 휴직 사용률 20% 안 돼'

보통 여성들이 취업에 성공한 뒤 다음 단계로 겪는 일이 결혼, 출산, 육아다. 출산·육아에 대한 부담이 대개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무겁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와 관련된 근무 환경이 뒷받침되어야만 여성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상장 기업들의 여성 근무 환경 현주소 그래픽

그러나 조사 기업 중 '육아 휴직을 사용하는 직원이 20% 미만'이라고 응답한 기업이 41%나 됐다. 법적으로 1년간 보장되는 제도인데, 활용률은 상당히 떨어지는 것이다. 다음으로 '직원 80% 이상이 육아 휴직을 사용한다'는 기업이 34.7%, '직원 20~50%가 사용한다'는 기업이 8.1% 순으로 나타났다. 유연근무제도를 활용하는 기업도 매우 적다. 시간제 근로자를 채용하는 곳은 8.9%, 직원들이 출퇴근 시간을 선택하게 하는 '시차출퇴근제'를 운영하는 곳은 10.1%에 그쳤다. 재택(在宅)근무제와 원격근무제를 활용하는 기업은 각각 6.1%, 4.4%에 불과했다.

직장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곳은 전체의 5.6%밖에 안 된다. 법적으로 직장 어린이집 설치 의무 사업장인데도 설치하지 않은 기업이 54.8%나 된다. 현행 영유아보육법은 여성 근로자 300명 이상이고, 상시 근로자 500명 이상인 기업은 직장 어린이집을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를 두고 베인앤드컴퍼니 유달내 상무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근무 환경은 여성에게 일과 가정 중 하나를 택일하도록 강요하는 구조"라고 표현했다.

◇신입 28%→관리자 7%→임원 1.9%

지난해 상장 기업들의 신입사원 10명 중 3명이 여성이고 전체 직원 중 여성 비율도 24%에 이르지만 팀장·부장 등 업무를 지휘·감독하는 관리직에 있는 여성 비율은 7.1%밖에 안 된다. 심지어 여성 관리자가 단 1명도 없는 기업이 절반을 훌쩍 넘는다(56%·680곳). 임원으로 가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국내 상장 기업에서 여성 임원 비율은 1.9%에 그쳤다. 여성 임원이 1명도 없는 기업이 87%(1066곳)로 대다수였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소영 연구원은 "여성 관리직 비율이 7%밖에 안 된다는 것은 이미 상당수 여성이 직장 생활 초기에 육아 등의 문제로 일을 그만둔다는 뜻"이라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여성들은 계속 직장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