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떠떠 떠떠떠 떠떠떠떠떠~(미미미 미미미 미솔도레미)"
돼지 멱 따는 소리를 깔끔하게 보정해서 음계를 입힌 듯한 목소리가 지난주 서울 서초동의 한 녹음실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두 눈을 부라렸다 혓바닥을 날름 내미는 등 얼굴을 수시로 바꿔가며 기기묘묘한 소리들을 냈다. 이 요상한 녹음 현장은 인기 국산 애니메이션 '라바'의 주인공 벌레 '옐로우'의 목소리를 입히는 현장.
'라바'는 "2013년은 라바로 시작해서 라바로 끝났다"(월간 '아이러브캐릭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올해 국산 애니메이션 중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다. 지상파와 케이블을 포함해 13개 채널에서 방영됐고, TV 외에 버스·지하철·카페 등을 통틀어 6만3345개의 모니터를 통해 선보였으며, 전 세계 97개국에서도 방영됐다. 캐릭터 상품만 1000개가 출시됐다.
이날 녹음분은 성탄절 특별 번외편. 하수구 애벌레 콤비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1분 30초 안팎의 초단편으로 그려낸 '라바'는 대사가 없어 기계음을 썼을 것이라 짐작하기 쉽지만, 주인공인 먹보 애벌레 '옐로우'만큼은 온전히 사람이 만드는 '자연산 소리'다. 그 목소리를 맡은 성우가 홍범기(39).
홍씨는 2003년 만화 전문 케이블 채널 '투니버스' 공채로 성우 생활을 시작해 애니메이션·광고·TV를 넘나들며 활동 중이다. "2010년이었나. 녹음 제의가 왔어요. 그런데 구체적인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웃고 호흡하고 이런 간단한 소리만 내달래요. '이게 뭔가' 싶었는데 어느 날 버스에서 벌레 두 마리가 치고받는 만화를 보여주는데 끝에 제 이름이 나오는 거예요."
선명한 영상과 기기묘묘한 음향이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는 '라바'의 백미는 먹보 애벌레 옐로우. 쿨쿨 자는 소리, 쩝쩝 음식 먹는 소리, 헉헉 숨찬 소리, 게다가 '꺼억' 하는 트림 소리에, '뿌직' 방귀 소리까지 쉴 새 없이 터진다.
미성(美聲)의 중저음을 가진 홍범기는 주로 애니메이션에서 꽃미남 목소리를 도맡았지만 동물 소리에도 일가견이 있다. "강원도 동해 출신이에요. 생물들이랑 편하게 지냈고, 짐승 연기도 많이 했어요. 오죽하면 별명이 닭범기겠어요. 하하." 지금까지 119편이 방송됐지만, 홍범기가 녹음실을 찾은 것은 채 열 번도 되지 않는다. 제작진 주문에 따라 갖가지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녹음하고 나면 맞는 소리를 입힌다. "그래서 중요한 게 녹음 당일의 '느낌'"이란다.
눈코 뜰 새 없이 1년을 보낸 벌레들의 향후 스케줄도 바쁘다. 내년부터 내후년까지 차례대로 세 번째 시즌, 어린이 뮤지컬, 극장판 이 나온다. "초등학교 직업교육 강의하러 가서 '라바 목소리 내는 아저씨'라고 하니까 아이들이 '우와' 하면서 몰려들었어요. 주차장 옆 차에 항상 라바 더듬이가 꽃혀 있어요. 힘이 나죠. 내가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고 있구나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