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기자

이기웅(73) 열화당 대표는 일견 '시대착오론자'다. 종이책 지상주의자만으로도 모자라 세로쓰기까지 옹호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로쓰기 조판은 긍정의 독서, 가로쓰기 조판은 부정의 독서. 세로쓰기는 시선의 동선이 위아래(↕)이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고, 가로쓰는 좌우(↔)이기 때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이 대표는 작가 이청준의 첫 창작집 '별을 보여드립니다'(1971)와 박완서의 첫 장편 '나목'(1976)을 세로쓰기 판형으로 복간했다. 그는 자신을 책의 염(殮)꾼이라 불렀다.

―염꾼은 부정적 의미가 강한데.

"복간이나 복각은 염과 같다. 한 사람이 생을 마치면 고인의 삶을 정리 정돈하여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떠나보내듯, 뛰어난 저술가, 문필가들이 남긴 책을 가다듬어 다시금 역사에 올려놓는 행위는 고귀하다. 지난 시대의 참된 말씀을 제대로 담아낼 아름다운 그릇을 구워내는 일. 또 우리가 과거를 잘 살펴 삶의 교훈을 얻듯, 책의 원형, 책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달 초 그는 자신 인생 후반전의 숙원인 '영혼도서관'의 건축설계 전시회를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서 열었다. 김언호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방송인 황인용씨, 북디자이너 정병규씨, 이은 명필름 대표 등 200여 명이 참석했지만, 아직 일반인에게는 낯선 도서관의 이름.

―우선 '영혼도서관'의 개념부터.

"나는 47년 동안 책을 만들고 공급하는 일에만 몰두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 책이 제 구실 못한다는 문제의식에 괴롭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를 보라. 자기를 계발하는 게 아니라 인간을 망가뜨리는 도구로까지 가고 있다. 법정 스님이 돌아가실 때 말씀을 기억한다. 내 책 모두를 절판하라. 내가 쓴 말 모든 게 다 거짓이고 허위다. 인간이 어찌 이리 아름다울 수 있나 생각했다. 그렇다면 책다운 책이 무엇일까. 일기이건 자서전이건, 자기반성을 위한 글쓰기라면 어떨까."

이기웅 대표의 영혼도서관은 책의 수도원을 꿈꾼다. 자신이 부지를 내놓고, 건축가 조병수가 설계를 기부하며, 화가 임옥상이 작품을 기증하는 공간. 함께 만든 그 수도원에서 책의 원형과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겠다고 했다.

―자서전이라니.

"정치의 목적으로, 또 명예욕에 들떠 가식의 수단으로 쓴 경우도 허다하다. 정치인의 꼴불견 출판기념회를 보라. 내가 떠올리는 건, 러시아의 톨스토이(1828~1910)가 쓴 '참회록', 죽은 지 100년이 지나 출간하라고 유언했던 마크 트웨인(1835~1910)의 자서전이다. 내 제안은 우리 모두 참다운 자서전을 써보자는 것. 영혼도서관은 한 인간이 평생 동안 자서전을 쓸 수 있도록 기획해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깊이 개입해 지도해주는 일까지 할 수 있을 거다."

파주 열화당의 이 대표 책상에는 2010년에야 미국에서 출간된, 두툼한 두 권짜리 마크 트웨인 자서전(캘리포니아 주립대 출간)이 놓여 있었다. 그의 열정이 느껴지는 증거였지만, 동시에 다시 한 번 '시대착오'는 아닐까. 위선과 허영의 존재인 인간에게 진정한 자서전 쓰기가 가능할 것인가. 반성이나 참회보다는 자기 합리화의 마당이 되지 않을까. 게다가 '반성'이나 '참회'의 문제라면, 구태여 물리적인 도서관이 필요할까.

―'진심의 자서전'이라는 게 과연 가능할까.

"나는 믿는다. 서로 손을 내밀고, 제안하고, 따뜻함을 권하는 사회. 이게 영혼도서관의 궁극적 지향이다.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톨스토이라고 어느 날 갑자기 깨달아 '참회록'을 쓰게 된 건 아닐 거다. 모든 인간이 대문호처럼 글쓰기를 할 수는 없겠지만, 자서전을 쓰는 동안 거칠었던 우리 인생은 따뜻한 성찰과 사랑의 삶으로 가다듬어질 거라고 본다. 그때야말로 인간 본연의 진정성을 얻게 될 순간이다."

―수십억 사업이라고 들었다. 구태여 모금까지 해서 물리적 공간이 필요한가.

"마을 사람들에게 광장이 필요하듯, 무대로 나와 공적으로 이야기할 공간이 필요하다. 우선 나부터 예술인 마을 요지의 500평을 기증했다. 황인용 음악감상실 카메라타 옆의 땅이다. 카메라타를 설계한 건축가 조병수씨는 설계를 재능 기부하고, 임옥상씨는 작품을 기증키로 했다."

이 대표는 영혼도서관을 '책의 수도원'이 되게 하고 싶다고 했다. 굳이 자서전이 아니더라도 진정성을 가지고 잘 만든 책이라면, 참된 자서전의 가치와 진실에 다를 바 있겠느냐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세로쓰기'의 정신과 '염꾼'의 정신으로 '목민심서' '난중일기' '백범일지'도 새로 펴내겠다고 했다.

예전에 이 대표는 독일의 한 공구회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독일인 회장은 한 해 30만, 40만개 팔리는 공구가 있는가 하면, 겨우 20개 팔리는 공구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스무 개 팔리는 공구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더라는 것. 이유는 다양한 공구의 가장 어미가 되는 존재라고 했다는 것이다.

말과 글이 넘치는 사회. 하지만 이 대표 역시 모든 글의 원천이 되는 책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 시대착오론자가 영혼도서관, 책의 수도원에 전력투구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