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서는 '평등'이란 단어가 원래 뜻과 다르게 쓰인다. 농장의 동물들은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며 혁명을 일으켜 주인을 내쫓지만 뒤이어 권력을 쥔 돼지들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그 후 '평등'은 돼지가 다른 짐승을 인간에게 팔아먹고 배타적 특권을 누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조지 오웰은 이 소설을 통해 단어의 뜻이 특정 집단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갈파했다.
지금 이 땅에도 동물농장식 어휘 목록이 엄존한다. 지난 24일 일부 대학생들이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손에 '신이 만드신 울타리 안에서 갖은 교설과 기만을 일삼는 정의구현사제단은 사죄하십시오.'란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정의를 구현하는데 사죄를 하라고? 부조리극에나 나올 만한 대사 같은 표현이지만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정의'로 인정할 수 없는 최근 사제단의 행태가 그 뜻을 왜곡한 결과다.
사제단은 북한 공작원 김현희의 KAL 858기 폭파가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허위로 드러났지만 그들은 사과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사제단의 정의는 그 후 '막무가내 주장과 시치미 떼기'라 해도 됐다.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박창신 신부는 지난주 연평도 주민들에게 포를 쏘아댄 북한을 옹호하더니 엊그제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컴퓨터 부정이 저질러졌다고 주장했다.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정의라면 그런 정의는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지 않고 특정 정파에 기운 편파성을 은닉하는 언어적 분칠일 뿐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한 1987년의 정의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다.
지난 5월 한 걸그룹 소속 가수가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라 민주화시키지 않아요"라고 했다가 곤욕을 치른 사건도 근본적으로는 이른바 '진보 진영'의 독선적 행태에서 빚어진 측면이 크다. 진보 진영은 이 가수가 민주화의 가치를 폄훼했다고 비난했지만, 그보다는 민주화의 뜻이 왜 변질됐는지, 그런 변질에 자신들이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 반성하는 계기로 삼았어야 했다.
절차에 의해 정권을 교체하고,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하는 방식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승복시키기 위한 민주주의의 핵심 장치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실질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며 자기주장을 관철하는 것만이 민주화라는 주장을 폈다. 광우병 괴담을 퍼뜨리며 폭력 시위로 도심을 마비시켰고, 법 절차에 따라 진행된 제주 해군기지 공사를 물리력을 동원해 방해한 것도 그런 경우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의를 구현하다'라는 말이 '민주화시키다'처럼 '독선에 빠져 사회를 편 가르고 종교의 이름으로 분노를 자아낸다'는 엉뚱한 뜻으로 바뀌어 쓰일지 모른다. 그 책임은 정의라는 단어를 방패 삼아 무책임하게 선동하고 함부로 편파의 말을 쏟아낸 정의구현사제단이 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