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오후 1시 30분쯤 서울 종로구 운니동 덕성여대 종로캠퍼스 토플(TOEFL) 시험장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응시자의 인상착의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시험 감독관의 신고를 받았던 것이다. 경찰과 맞닥뜨린 중국 베이징(北京) 명문대 박사과정 리모(30)씨는 "1만위안(약 175만원)을 받고 대리 시험을 봤다"고 곧바로 실토했다. 대리 시험 의뢰자 역시 캠퍼스 부근에서 바로 찾아냈다. 둥근 안경테, 검은색 점퍼, 회색 바지 등 리씨와 옷차림을 꼭 맞춘 산시(山西)성 출신 고교 3학년 이모(17)군이 초조한 듯 시험장 주변을 서성이는 모습이 바로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군이 먼저 시험장에 들어가 신원확인을 마친 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면서 나온 후 대리 응시자인 리씨가 들어가 시험을 치도록 하는 '바꿔치기' 수법을 썼다. 경찰 관계자는 "일견 기상천외한 수법 같지만, 두 사람은 열세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고 체격도 달라 한눈에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중국인으로, 부정 시험을 치르기 위해 지난 23일 한국에 입국했다.
28일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한국·싱가포르·태국·말레이시아 등지에서 적어도 51차례 대리 토플 시험 부정을 저지른 중국인 5명을 붙잡았다"고 밝혔다. 경찰은 미성년자인 이군을 제외한 4명을 구속하고, 중국에 체류 중인 의뢰인 3명을 쫓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중국 베이징의 명문대에 재학하거나 졸업한 리씨 등 4명은 브로커를 끼고 중국 내 인터넷 사이트나 SNS를 통해 대리 시험 의뢰인을 모집했다. 이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신원확인 절차가 덜 복잡하다는 점을 노려 한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도 대리 시험을 봐준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바꿔치기' 수법 이외에, 의뢰자 명의의 위조 여권을 만들어 대리 응시자가 이를 들고 시험장에 가는 수법도 쓴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체재비 포함 1만~1만5000위안(약 175만~261만원)을 받고 시험을 봐준 것으로 나타났다. 최다 응시자는 프로그래머 티모(29)씨로 지금까지 최소 25차례 대리 시험을 봐준 것으로 조사됐다. 티씨뿐 아니라 베이징의 명문대 재학생 장모(22·여)씨와 유명 방송국 직원 장모(28·여)씨, 신문학 박사과정 리씨는 모두 중국 부유층 출신 엘리트로 알려졌다. 리씨는 "부모님이 현직 의사로 일하고 있는데, 용돈을 벌까 하는 마음에 (대리 시험에) 응하게 됐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시험 주관사인 미국교육평가원(ETS)으로부터 "신원확인 과정에서 의심스러운 응시자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시험장인 동국대·덕성여대 등에서 이들을 검거했다. 경찰 관계자는 "붙잡힌 대리 시험 응시자들은 120점 만점인 토플에서 모두 100점 이상을 획득한 실력자로, 원하는 점수를 의뢰받으면 자유자재로 이를 맞춰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