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4, 중1 두 아이를 둔 직장맘입니다. 매일 전쟁을 치르는 기분입니다. 아침엔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나대로 챙겨서 회사 가기 바쁘고, 회사에서는 아줌마라고 알게 모르게 무시를 당합니다. 퇴근해 집에 오면 집안일이 산더미이고 아이들 오면 일이 또 늘어납니다. 남편은 집안일은 여자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걸 나한테 떠넘기고, 청소를 안 한 날은 집에 오자마자 화부터 내니 또 상처를 받습니다. 모든 걸 자식과 남편 위주로만 살아가면서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스트레스로 두통이 잦고 화병까지 생겼습니다.”

서울시직장맘지원센터의 게시판에 지난 9월 아이디 ‘cswxxxx’가 올린 사연이다. 직장맘이 육아와 가사까지 전담하다시피하면서 겪는 심리적 고충이 절절하다. 비단 한 개인의 특수한 사연이 아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2013년 대한민국 직장맘의 자화상이다. 맞벌이 부부의 일·가정의 건강한 양립을 위해서는 부부간 육아와 가사가 합리적으로 분배돼야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여성에게 집중돼 있어 직장맘의 고충이 크다. 2012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남녀 경제활동 특성별 가사노동시간의 차이’를 보면 실태가 보인다.

이 자료에 의하면 맞벌이 여성의 평일 가사노동 시간은 178.6분, 남성은 29.3분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6배 많고, 집안일을 149.3분 더 많이 했다. 주말에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일요일의 경우 남성은 86.4분, 여성은 247.5분을 육아와 가사에 할애했다. 남성은 평일보다 크게 늘어난 3배 이상의 시간을 집안일에 썼지만, 여전히 여성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회사일은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더 많이 할까? 조사 결과를 보면 그렇지 않다. YWCA에서 지난 5월에 조사한 ‘서울 시민의 일·가정 양립 실태 및 의식조사’ 자료를 보자. 이 자료는 서울 소재 기업에 근무하는 기혼 남녀 5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하루 평균 실제 근무시간은 남성 10.1시간, 여성 8.7시간 정도로 남성이 여성보다 15% 정도 회사일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회사 일과 가사노동을 합친 하루 노동시간은 남녀 각각 얼마일까? 남성은 635.3분, 여성은 700.6분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65.3분을 더 많이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회사일과 집안일을 합쳐 직장맘이 직장대디보다 하루 한 시간 이상 일을 더 많이 한다는 얘기다.

지금 이 시대 대한민국 직장맘의 고충은 최고조다. 사회가 급변해 여성의 사회진출이 크게 늘었는데 인식은 여전히 가부장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 크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서울시직장맘지원센터에서 만난 황현숙 센터장은 이를 “과도기에서 오는 이중고”라고 표현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본격화된 게 20~30년밖에 안 됐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직장맘이 거의 없었다.

지금 직장맘은 격동기를 겪고 있다. 직장맘에 대한 인식과 현실의 격차가 엄청나다.” 황 센터장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성 역할 분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과거에는 남성은 일, 여성은 육아와 가사를 전담했다면, 다음 세대는 남성과 여성이 어느 정도 동등하게 일과 육아, 가사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과도기다. 맞벌이 남성은 여전히 일만 하고 맞벌이 여성이 일에다 육아와 가사까지 담당해야 하는 구조다.”

◇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혼자 회사 다니는 것처럼 생색 내는 남편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회사일은 물론 육아와 가사까지 책임지는 ‘수퍼맘’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얼마 전 직장맘 김소영(38)씨는 아홉 살 아이로부터 “엄마가 가장 같아요”라는 웃지 못할 말을 들었다. “다른 집 엄마들은 살림만 하고, 아빠들은 회사일만 하는데, 엄마는 회사일도 하고 우리도 보살펴주고, 밥도 해주고, 운전도 다 하니까요”라는 이유다.

김석철(42)·이진희(40·경기도 성남시)씨는 부부교사다. 같은 직업군을 가졌음에도 부부의 퇴근시간은 천양지차다. 아내는 오후 6시면 집에 도착하지만 남편은 일주일에 3일 이상 야근을 한다. 이진희씨는 “남편이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다. 남자가 직장에서 인정을 받아야 가정이 화목하다면서 회사일에만 집중한다. 그렇다 보니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혼자 회사에 다니는 것처럼 생색을 내면서 집안일과 육아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출근시간에 아침밥하고 애들 챙기는 것도 내가 하고, 퇴근 후 저녁하고 집안일 등도 거의 다 내가 한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언쟁도 많이 해 봤지만 사고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더라. 이제는 거의 포기했다”라고 말했다.

한국 남성에게 있어 일과 가족의 양립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뭘까? YWCA 5월 조사 결과, ‘장시간 노동을 강조하는 기업문화’(60.7%)를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뒤를 이어 ‘국가지원의 부족’(59.7%), ‘가정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개인의 의식’(32.3%)이 차지했다. 여성의 경우 크게 다르다. ‘국가지원의 부족’(65.9%)을 가장 큰 방해요인으로 꼽았으며, 다음으로 ‘가정일을 여성에게 전담하게 하는 사회풍토’(60.6%)가 차지했다. 남성이 일찍 퇴근하고 싶어도 직장의 눈치가 보여서 못한다는 얘기다.

일하는 여성의 ‘경력 단절’의 가장 큰 원인은 ‘출산 및 육아’다.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는 인식 때문에 아이를 낳으면 자연스럽게 직장을 그만두는 여성이 많다. 출산 휴가도 마찬가지다. 한국에도 아빠의 육아휴직이 있다. 아빠도 1년간 육아휴직이 가능하며, 통상임금의 40% 범위 내에서 월 최대 100만원까지 지원된다. 그러나 실제 사용자는 극소수다. 취재를 위해 주변인들에게 “지인 중 육아휴직을 사용한 아빠가 있냐?”라고 물었을 때의 반응이 의미 있다. “남자도 육아휴직이 가능하냐? 처음 알았다” “그런 간 큰 남자가 어딨겠냐?”는 답이 대부분이었다.

지난해 전체 육아휴직 사용 비율은 68.6%. 직장인 중 3분의 2 정도만 육아휴직을 사용했다. 그중 남성사용률은 2.8%로, 1500명 정도의 아빠가 육아휴직을 사용했다. 한국에서 남성 육아휴직제도는 2001년에 처음 도입됐다. 2002년 78명에 불과했던 남성 육아휴직자가 점차 늘어 10년 만에 1500명에 이른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점이 고무적이긴 하지만 속내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남성 육아휴직자 중 40% 안팎은 공무원이다. 일반 기업 남성들에게 육아휴직은 여전히 그림의 떡이라는 얘기다.

외국의 경우는 어떨까. 북유럽은 양성평등의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녔다. 북유럽 국가에서는 아빠 혼자 아기를 유모차에 데리고 다니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스웨덴은 세계 최초인 1974년에 남성 유급 육아휴직제도를 도입했다. 1977년 국가노동시장위원회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동일한 기준으로 자녀를 책임질 권리는 반드시 인정되고 권장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스웨덴은 유급 육아휴직을 부부가 합쳐 1년4개월간 사용할 수 있는데, 주목할 만한 부분은 남성 할당제가 있다는 점이다. 남성도 최소 2개월 이상 육아를 하도록 법에 명시돼 있다.

스웨덴의 고위직 임원 중 육아휴직 사용 비율은 88%에 이른다. 한국 남성이 육아휴직을 사용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인사고과 등 불이익 우려’라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한국에서는 아빠가 육아에 신경을 많이 쓰면 ‘회사 업무에 전념하지 않는 불성실한 직원’으로 낙인찍히지만, 북유럽에서는 반대로 ‘좋은 아빠가 회사일도 잘한다’는 인식과 풍토가 일반화돼 있다. 핀란드 역시 1990년에 남성 할당제를 도입했으며 2주간의 부성휴가를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 '직장맘의 10대 버킷리스트' 중엔 죄책감 들지 않는 엄마 되기도 있어

흔히 모성애는 본능이라고 한다. 과연 엄마가 아빠보다 육아를 더 잘할까? 연구 결과를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동물들의 세계에서 수컷들의 부성애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 연구가'인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 카페 교수는 신생아를 키우는 아버지를 관찰했다. 그 결과 아버지들도 어머니와 똑같은 정도로 아기와 말을 하고 스킨십을 하고 놀아주었으며, 배고픔이나 불안, 지루함 같은 아기의 상태도 똑같이 알아차린다고 한다. 한국워킹맘연구소 이수연 소장은 "아빠가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아이의 학습능력과 사회성, 인성, 성취욕구 등이 향상된다는 '아빠 효과'에 대한 연구 결과들이 점점 더 많이 도출되고 있다"고 말한다.

전 세계적으로 ‘아빠의 육아’는 확산 추세다. 미국에서는 아내 대신 육아와 가사를 책임지는 ‘트로피 아빠’가 늘고 있다. ‘트로피 아빠’라는 표현에 전업주부 아빠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이 담겨 있다. 일본은 국가 차원에서 아빠의 육아 참여를 권장한다. 후생성에서는 ‘육아를 하지 않는 남자는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는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배포했다.

한국에서도 최근 아빠의 육아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교보문고에는 아빠 육아서적 코너가 별도로 마련돼 있고, 아빠용 아기띠 등 아빠를 위한 육아용품도 출시됐다. 문제는 의욕은 있으나 방법을 모른다는 점이다. 이수연 소장은 “시대가 바뀌었으니 아빠들도 변해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른다. 육아하는 아빠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상태에서 좋은 아빠의 역할만 강조하니 아빠들도 죽을 맛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육아 휴직 및 육아 관련 제도 자체는 뒤처지지 않는다. 문제는 실제 사용자가 적다는 점이다. 황현숙 센터장은 “우리나라는 제도가 인식을 크게 앞서간다”며 이렇게 말했다. “‘사내 눈치법’이라는 게 있다. 회사의 관행이 법·제도보다 우위에 있다는 현실에서 나 온 우스갯소리다. 한국의 법과 제도는 다른 나라에 비해 그렇게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법·제도와 현실과의 괴리가 크다.”

이 시대 직장맘의 고충은 쉽사리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의식의 변화 속도는 더디기 때문에 20년, 30년이 지나야 육아와 가사에 대한 양성평등 인식이 확산될 수 있다. 또한 인식이 바뀐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구체적인 아빠 역할을 가르쳐야 한다. 황현숙 센터장은 “무엇보다 의식개혁이 시급하다. 남성 육아 참여의 중요성을 알리는 캠페인이 필요하다. 또한 직장맘, 직장대디가 편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가족친화직장’의 좋은 예를 만들고, 찾고, 퍼뜨리는 것도 필요하다.”

서울시직장맘지원센터의 팸플릿에는 ‘직장맘의 10대 버킷리스트’가 있다.

1. 정시에 출근해서 정시에 퇴근하기
2. 눈치 보지 않고 출산휴가, 육아휴직 쓰기
3.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가족과 저녁식사 하기
4. 낮 시간에 아이 담임선생님 만나보기
5. 남편과 오붓하게 극장에서 데이트하기
6. 회사 회식에 끝까지 참석하기
7. 자기계발을 위해 공부하기
8. 가사 분담은 공평하게
9. 일주일에 하루는 자유시간 갖기
10. 죄책감 들지 않는 엄마 되기

버킷리스트 열 개의 항목 중 무엇 하나 호락호락한 게 없다. 직장인이 누려야 할 권리이자 누군가에게 당연한 일상이 직장맘에게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되는 것이 2013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직장맘의 슬픈 자화상이다.

[- 더 많은 기사는 2013년 11월 18일 발매된 주간조선 2282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